[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요건 ‘제주도민’, ‘재심 무죄 선고자’ 한정
재일제주인, 훈방 피해자 ‘진실규명’ 잇따르는데 조례상 피해 신고 못 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문을 비롯한 각종 가혹 행위, 불법적인 강압 수사를 받고 없는 죄를 인정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살아나왔다.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간첩’이라는 새빨간 딱지가 붙어 제주말로 ‘속솜허게’ 살아야만 했다. 숨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삶이다.

그러나 이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숨기고 살았던 아픈 상처를 꺼내 보이며 억울함을 풀어내고 있다.

피해자들은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연구책임을 맡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연구진들의 도움을 받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조사’를 청구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원들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진실규명 개시 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피해 사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정리, 보고서를 진화위에 전달했다.

진화위는 구체적인 진술과 자료가 담긴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사개시’를 결정한 뒤 검찰 수사기록, 법원 판결문 및 공판기록, 가족·친척·지인·마을 주민 진술 등 자료를 추가로 입수해 사건을 다시 살폈다.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사진 왼쪽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 가운데는 영화 1987, 오른쪽은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이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이희훈, 네이버 영화 갈무리.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사진 왼쪽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 가운데는 영화 1987, 오른쪽은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이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이희훈, 네이버 영화 갈무리.

전방위적 조사를 펼친 진화위는 ▲故김두홍,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강병선, 1986년 제주 보안부대에 의한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김양진, 반공법 위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故고찬호 재일동포 인권침해 등 사건을 ‘진실규명’ 결정하고 일부는 재심을 권고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분명 국가폭력 피해를 겪었는데 법적 피해자가 아니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21년 7월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의 한계 때문이다. 

조례에 따른 ‘간첩조작사건’ 정의는 “제주 출신으로 공안사건에서 국가보안법(반공법 포함) 등 위반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다. 

‘피해자 등’의 정의는 “간첩조작사건 피고인으로 사망·행방불명 또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과 그 유족으로 제주특별자치도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제주도민이어야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최근 진화위로부터 ‘진실규명’, 즉 거짓 없는 사실을 바로 밝혀내 과거 잘못된 국가 행위에 따른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음에도 법적 피해자가 될 수 없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는 점이다.

앞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4가지 사건 중 조례에 따른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건은 故김두홍, 김양진 사건뿐이다. 이들은 모두 도민으로 법원 판결에 따른 옥살이를 했다.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을 바탕으로 재심 신청한 뒤 ‘무죄’를 선고받으면 조례가 인정하는 피해자가 된다.

간첩조작사건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과 지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인권신장과 민주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하지만 정의에 따르면 일부 피해자들은 조례에 따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nbsp;ⓒ제주의소리<br>
간첩조작사건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과 지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인권신장과 민주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하지만 정의에 따르면 일부 피해자들은 조례에 따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제주의소리

그러나 강병선, 故고찬호 사건은 다르다. 강병선 씨는 총 7일간 영장 없이 불법구금돼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고문도 받고 후유증도 생겼지만, 재판을 받지 않고 풀려나 재심조차 신청할 수 없는 억울한 신세가 됐다.

故고찬호 씨의 경우 60일 동안 불법구금 당한 채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7년형에 처해져 옥살이를 했다.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을 바탕으로 재심도 신청, 무죄를 선고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지 않아 조례에 따른 피해자가 될 수 없는 형편이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양의남, 김치병, 故김주섭 씨가 연루된 사건[관련기사 = 일본 여행 다녀왔는데 “이북 몇 번 오갔냐”…생뚱맞은 추궁 ‘끝없는 조작’] 역시 ‘진실규명’ 결정이 나더라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의남 씨의 경우 고문으로 어깨 인대가 끊어지고 무릎뼈가 부서졌다. 고인이 된 김주섭은 메달리스트일 정도로 건강했지만, 고문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생을 달리했다. 김치병도 모진 고문을 받고 겨우 풀려났다. 이들은 모두 공안당국의 각본대로 죄를 인정한 뒤 그냥 풀려났다.

이처럼 ‘제주도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사람’,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만 피해자로 규정하는 조례의 한계 때문에 국가폭력 희생자임에도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할 우려가 따른다. 

조례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받는다면 국가폭력으로 송두리째 빼앗긴 삶, 얼룩지고 망가진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다.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사업은 △의료 및 장례지원금 △생활지원금 △상담 및 치료 △인권증진 및 사회적 관심 유도를 위한 문화·학술행사 △사회적 공감대 형성 및 도민 이해증진을 위한 교육 및 홍보 등이다. 

이제야 진실규명이 이뤄지고 재심을 신청하는 단계에 접어들어 아직까지 제대로 활용된 사례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이 명확한 조례의 한계를 바꿔 피해자들이 제대로 지원받도록 할 수 있는 최적기로 판단된다.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린 군사독재 정권의 만행을 겪은 피해자들. 인구 1% 제주에서 나온 간첩만 대한민국 전체 3분의 1 수준이었다. 억울한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또 소외되지 않도록 도민사회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주시 이도1동 옛 제주경찰 대공분실 모습.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희철 씨는 지난 2006년 5월 15일 비공개로 진행된 재심청구 법원 현장검증 당시 고문, 조사를 받은 대공분실 2층 조사실과 지하실 상황을 소상하게 증언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시 이도1동 옛 제주경찰 대공분실 모습.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희철 씨는 지난 2006년 5월 15일 비공개로 진행된 재심청구 법원 현장검증 당시 고문, 조사를 받은 대공분실 2층 조사실과 지하실 상황을 소상하게 증언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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