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릭 하멜(Hendric Hamel)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선박의 서기였다. 1653년(효종 4)에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타이완을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일행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13년간 조선에 억류되어 병영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1666년(현종7) 9월 4일에 자신들이 배속되었던 여수 전라좌수영을 탈출하여
산방산은 점성이 큰 마그마가 냉각되어 형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산 전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산방산은 높이가 약 395m에 타원형의 장축이 약 1250m, 단축이 약 750m이며, 둘레가 약 6.1㎞에 이른다. ▲ 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 산방산은 제주도 서남쪽 해안의 이정표다. ⓒ 장태욱 산방산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한
제주 서부관광도로 길가에 활짝 핀 억새풀의 울렁거림을 보면서 사계리(沙溪里) 마을로 향했다. 오름과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관광도로는 동광 진입로를 지나면서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정면에 두고 바라보면서 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면 산방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계리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 사계리 마을 산방산 중턱에서 바라본 사계리
소론파였는 제주목사 김시구는 전라감사 박우원과 내통하면서, 제주 삼읍에 흩어져 있는 유배인들을 물샐틈없이 염탐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다. 당쟁이 극에 달한 시기였기라, 기회가 있을 때 반대파의 씨를 말리기 위함이었다. 박우원은 김시구의 보고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임금에게 보고했으니, 조정철은 그 보고내용에 ‘무고함이 끝이 없다’
정헌 조정철은 1777년 정조시해 건과 연류되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제주에서 죄인으로 지내는 동안 '홍윤애'라는 여인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26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 못지않게 처절하여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그는 정조의 시대가 지나고 순조대인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양이(멀리 유배
정헌 조정철은 1777년 정조시해 건과 연류되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제주에서 죄인으로 지내는 동안 ‘홍윤애’라는 여인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26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 못지않게 처절하여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정조의 시대가 지나고 순조대인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양이
▲ 해녀들은 잠수 도구도 없이 맨 몸으로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한다. ⓒ 해녀박물관 해녀들은 제주도와 일본에만 존재하는 여성 잠수부를 말한다. 제주에 언제부터 해녀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에 전복 속에서 진주를 캤다는 기록이 나온 이래로 해녀는 각종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제주 해녀의 역사는 제주에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역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흥얼거리며 아이들과 함께 하도리 철새도래지를 향했다. 노래가 씨가 되었는지 하도리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시원한 바람이 몰려왔다. 하긴 이곳에 바람이 없는 날이 있겠는가?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제주에서 성산포 방향으로 뻗어 있는 12번 국도는 함덕을 지나면서부터는 바다 멀리까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가을날 높고 푸른 하늘 아래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차를 운전하는 것은 이 길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제주시 구좌읍 하도리는 제주시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36km쯤 되는 거리에 있다. 일주도로(12번 국도)를 따라 운전해보니 45분
'예'를 숭상하는 마을에 충격을 안긴 사건 신례1리는 농부들이 귤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조용한 마을이다. 사람들이 예절바르고 양순하다하여 조선시대에는 예촌(禮村)이라 불렸기에 지금도 주민들은 신례1리를 예촌이라 부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예촌은 주민들 중 다수가 제주 양(梁)씨인 양씨 집성촌이다. ▲ 한겨레 만평 1991년 11월 9일 자 한겨레 만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1리는 520가구에 1600여 명의 주민이 대부분 감귤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는 전형적인 제주도 농촌 마을이다. 제주도의 대부분 감귤 농가가 경험했던 것처럼 신례1리 마을도 감귤산업이 풍요를 누리던 80년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오렌지 수입개방과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감귤 농가는 침체기를 맞았고, 2000년 이후에 농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1리로 가기 위해 5·16도로(11번 국도)로 들어섰다. 한라산의 속살에 해당하는 5·16도로 주변은 쌀쌀해진 날씨로 얼마 전 갈아입은 붉은 옷마저도 벗을 태세다. 5·16도로를 타고 가다 수악계곡을 지나면 신례1리 마을이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수악계곡을 지나 서성로(1119번 도로)에
여름을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날씨가 쌀쌀하다. 만추에 이슬비까지 더하니 겨울이 성큼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이른 아침 '야생노루관찰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유치원가는 대신에 아빠와 노루를 구경하겠다고 나서는 딸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가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 유치원생인데도 벌써 옷맵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봉개 마
▲ 명도암 입구 동부산업도로 차도 한복판에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명도암 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다. ⓒ 장태욱 제주시내에서 동부관광도로를 따라 6km쯤 동쪽으로 가면 대기고등학교와 봉개동사무소가 있는 봉개마을에 이른다. 이곳을 1km쯤 더 지난 곳에서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차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명도암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다
오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사평마을에서 남쪽으로 난 좁은 찻길을 따라가면 연미마을에 당도할 수 있다. 연미마을은 제주시내 도심권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한적한 시골 농촌과 같은 이미지를 던져주는 곳이다.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마을이 제주 4·3 과정에서 학살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오라리방화사건'의 현장이었다.오라리방화
▲ 안내표지 방선문계곡 진입로 입구에 설치된 안내표지 ⓒ 장태욱 제주시 오라동 종합경기장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정실마을에 이르면 방선문을 알리는 표지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제주교도소를 끼고 남쪽으로 뻗은 포장도로를 1.6Km쯤 따라 올라가면 방선문 계곡이 나온다. 방선문은 한라산 탐라계곡과 열안지오름 동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
▲ 오라동 사무소 ⓒ 장태욱 제주시 오라동은 시외버스터미널과 제주시종합경기장을 기점으로 그 인근 남쪽에 산재한 마을들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동이다. 오라동은 과거에는 월라(月羅)라 기록되기도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라리로 제주면(濟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제주시(濟州市)에 편입되었다. 1962년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연동(蓮洞)
▲ 석주명 기념비 서귀포시 토평마을에 있는 석주명 기념비. 그는 일제말기에 이곳에서 2년을 지내면서 제주나비와 제주방언을 연구했다. ⓒ 장태욱 5.16도로를 따라 서귀포 시내를 향하여 길을 가다보면 토평 사거리에서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를 볼 수 있다. 석주명은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며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다
5.16도로는 제주 시내와 서귀포 시내를 가장 짧게 연결한다. 이 도로를 통해 두 도시를 오고 갈 때는 한라산을 지난다. 두 도시를 오가는 도중에 성판악이 5.16도로의 분깃점이 된다. 성판악을 지날 때 오르막 길은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된다. ▲ 성판악 휴게소 5.16도로를 타고 가는 여정 가운데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 장태욱 제주
하가리 연화못 인근 남쪽에는 도시 아이들이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울타리 담벼락에는 아이들이 심고 키우는 조롱박과 콩이 탐스럽게 영글어가고, 정원에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예쁘게 피어나 자라고 있다. ▲ 더럭분교의 울타리에는 아이들이 심어서 키우는 박, 콩, 나팔꽃 등이 어우러져 자란다. ⓒ장태욱 이 학교 입구에는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