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추석맞이 대행사, 벌초 흐르지 않는 강물을 상상한 적이 있던가. 흐른다는 건 사명이고 존재의 이유다. 흐르는 게 강물만이었던가. 시간도 흐르고,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도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또 저만큼 흘러갈 것이다. 도저히 흐를 것 같지 않았던 여름날의 폭염도 어느 순간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서늘함에 허무해진 아침. 아들 딸 모두 대동하고 벌초를 나섰다. 나보다 앞서 흘러가 어느 야산에 누워있을 조상이라는 이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다. 죽...
(24) 유기농을 꿈꾸며 여름순까지 돋아난 나무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 빈틈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조심조심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몸의 유연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나무 사이를 걷고 있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 포화된 초록이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일까. 초록빛을 잔뜩 머금은 이파리들이 그 한계치를 넘어 아예 검정색깔의 문턱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보호색처럼 둘러싸인 이파리 위 한라봉 열매들이 탐스럽다. 언뜻언뜻 향긋한 한라봉의 향기가 코끝을 ...
(23) 다시 잡초를 뽑다 머리를 흐트러뜨린 바랭이가 연하다. 나물로 치면 맛이 제일 좋은 시기처럼 야들야들하다. 아주 연하지도 아주 짙어지지도 않은, 딱 거기 그 만큼의 색감을 지닌 채 나무 아래 무리를 지어 서 있다. 언제 여기다 미래를 예약했던가. 무지막지한 제초제의 폭압에 밀려 목숨을 놓으면서도 용케 씨앗 몇 톨 흙에 떨구고 간 바랭이의 질긴 생명력이 저토록 푸르렀던가. 밀감나무 아래 섬처럼 나 있는 바랭이를 손으로 뽑아낸다. 굳이 호미를 갖다 대지 않아도 쉽게 쉽게 제 뿌리를 드러내는 건,...
(22) 한라봉 효소를 걸러내다 6월말에 담갔던 한라봉 효소를 걸러냈다. 12리터 병에 담겨 있던 한라봉 열매를 건져내고 남은 액을 따라내니 삼다수병 하나가 조금 넘게 찬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고체 속 물기가 내 눈 앞에서 제 존재를 증명해 내고 있다. 갈색 설탕을 타 놓은 듯한 색깔의 효소액이 삼다수병 안에서 곱다. 자잘한 한라봉 과즙이 부서져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탁한 액체인데 삼다수병 안이라서 그런지 투명하기까지 하다. 한 국자 덜어내 물을 섞었다. 연두 빛이 도는 듯, 노란색이 도는 듯, 제...
(21) 여름나기 한라봉 매달기까지 끝낸 과수원은 조용하다. 새벽을 열던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멎고, 아침 저녁 농부를 실어 나르던 자동차 소리도 없다. 자동센서로 비닐하우스 천정이 열리고 닫히던 소리도 없다. 태풍을 대비해 하우스 천정에 있는 비닐을 걷어 냈기 때문이다. 그 새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잊었나. 문 열기가 무섭게 달려오던 두 마리 오리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 시원한 그늘을 골라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인가. 한 눈에 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다. 마지막 한라봉까지 끈으로 묶어 매단 뒤, ...
(20) 숲에 깃든 하루 직선과 직선 사이 햇살이 들어왔다. 무표정했던 수직이 밝고 부드러워졌다. 검게 굳어 있던 색깔이 잔잔하게 부서졌다. 부서지는 색깔은 갖가지 제 본색을 드러내며 숲속에 퍼진다. 맑고 가볍다. 햇살처럼 통통거리는 색깔이 숲속에 가득하다. 아직 사람들이 한산한 아침 아홉시. 혼자 멍하니 앉아 숲속의 느낌을 즐기기엔 안성마춤이다. 아침 숲속은 원초적이다.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바람, 원시의 숲에 깃들어 있던 이슬, 이제 막 빛을 내기 시작한 태양, 자연의 일부임이 분명한 사람도 ...
(19) 어느새 뿌리내린 고구마 줄기...인생도 서로를 지지하며 식물들에게 장마는 일종의 터널이다. 입구는 넓지만 출구는 좁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 무사히 반대편에 도착한 고구마줄기가 밭담 위를 넘보고 있다. 옆에서 같이 출발했던 배추며 열무는 그 긴 터널 안에서 처참하게 사그라들었다. 비에 처지고, 벌레에 뜯기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배추 쪼가리 몇 개 바랭이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고개를 숙인 배추, 당당하게 둘러선 바랭이. 이미 상황파악 다 끝내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약...
(18) 삭은 비닐을 도려내고 새 비닐을 덧대다 막바지에 다다른 것들의 표정은 우울하다. 익숙한 상태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희망이 거세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더욱 그렇다. 빛났던 과거와 바람만 드나드는 현재에 대한 비교, 거기서 오는 우주의 미세한 파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꿈의 상실은 현재를 얼마나 어둡게 하던가. 비닐하우스 샛문 옆으로 바람이 드나든다. 0.1밀리미터 두께가 넘는 비닐을 뚫고 길을 낸 바람의 행동에 우월감이 가득하다. 들고 남에 거침이 없다...
(17) 어느 하늘 맑은 날의 한 낮 하늘과 바다가 제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파란색이라는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본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는 확연하다. 바다는 멀리 나갈수록 색깔이 짙고, 하늘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본색을 감추고 있다. 파란색이라는 개념과 눈에 보이는 색깔의 괴리와 그 다양성을 언어로 다 설명해내는 건 어림없는 일이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돌아서면 잠깐 망막에 남은 여운을 즐기는 것으로 족할 일이다. 칼로 그은 듯한 하늘과 바다 사이의 수평선을 그대...
(16) 한라봉 매달기 며칠 째 장마다. 터줏대감처럼 버틴 안개 위로 오락가락하는 장대비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를 스케치하곤 했다. 태양을 잃어버린 해바라기는 아직 꽃을 품지 못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철거덕 철거덕 헐리던 과수원도 철거를 멈췄다. 안개는 과수원의 비닐하우스를 지우고, 밭으로 가는 길을 지우고, 하루의 일과마저 지웠다. 길가의 풀들은 깊어지고 정자나무 아래 모인 농부들의 어깨마다 하얗게 걱정처럼 안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 깊은 안개...
(15) 사슴벌레, 집으로 오다 난데없이 귤나무 이파리에 매달려 있는 사슴벌레 한 마리. 집게를 머리에 단 직사각형 몸뚱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무 것도 없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뭐하는 거지. 일단 조심스레 손으로 잡아본다. 갈퀴발로 붙잡고 있던 이파리를 놓고 내 손에 잡혀왔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허 참 신기하다. 얼마 만에 만나보는 거야. 예전에는 참나무 밑둥치에서 곧잘 발견되곤 하던 사슴벌레였다. 자신이 노출되었다는 ...
(14) 유년시절 공포심과 호기심이 맞닿아있는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집과 집이 이어지는 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 밭과 밭을 한참 돌아 긴 올레를 따라 들어가면 삼나무 울타리 깊은 밭 한쪽에 우리가 살던 집이 있었다. 남쪽으로 망오름이 이마를 맞추어 섰고, 마당 너머 소나무 숲이 울울창창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늘 외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되던 학교마저 가지 않는 일요일이나 방학이...
(13) 농민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열매솎기 막바지에 이른 열매들이 제법 굵다. 탁구공만한, 혹은 골프공만한 열매들을 모두 모았다. 시시때때로 쳐준 농약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물에 담가 박박 문지르며 씻었다. 세제를 넣어 한 번 더 씻어내고, 그래도 좀 불안해서 마지막 헹굼 물에 식초를 약간 타서 하룻밤 담가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는데, 향긋한 한라봉 향이 코에 닿는다. 상쾌하다. 그런데 열매의 색깔이 약간 변해 있다. 본래의 초록빛깔을 잃은 허여멀건한 색깔의 알맹이들이 풀죽은 듯...
(12)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유 며칠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몸이 이상하다 싶을 때 미리 주사 맞고 약 먹고 했지만 병은 비웃기라도 하듯 내 몸 구석구석을 활개치고 다녔다. 두통과 오한, 평소 잘 걸리지 않는 목감기까지, 기침 한 번에 목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내 목에서 나는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 같고, 팔 다리가 허공에 붕붕 뜨는 듯 했다. 무조건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따르자고 생각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도 다 학교에 나간 빈 집에 누워 약기운에 빠져 ...
(11) 생말타기 비 오는 날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성미 운동장을 빼앗긴 아이들이 교실 한켠에서 생말타기를 한다. 쟁겸이 보실보실 개미 또꼬망 비튼 손을 깍지 끼고 위로 돌려 그 틈새로 바라보는 하늘은 짓눌려 있었고, 편을 가르고 등을 굽으면 말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만주벌판 어느 새 아이들은 독립군이 된다.... [생말타기] 시집 속에 실린 를 다시 읽는다. 비닐하우스 속 한낮의 열기를 피해 잠시 쉬는 시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준비한 책이다. 오늘은 오래된 시집 한...
(10) 너도나도 땅을 팔아대는 곳 비닐하우스 하나가 헐리고 있다. 몇 명의 일꾼들이 하루 종일 하우스 위에 올라가 비닐을 걷어내고 철 구조물을 해체하고 있다. 작년 겨울 냉해 피해를 입은 귤나무들이 발갛게 목숨을 다한 채 무심하게 서 있다. 그 옆으로 미처 다 뜯어내지 못한 비닐쪼가리가 바람이 하자는 대로 몸을 흔들다 말다 한다. 작년 겨울 풍성하게 열매를 매달았던 귤나무들이 불안한 미래를 짐작했음인지 꽃도 없이 표정을 지운 채 서 있다. 희망을 놓친 것들의 무기력감. 철구조물 해체되는 소리가 덜...
(9) 고딕체로 굳어있던 24시간이 흘림체로 출근시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준다. 스물 네 시간의 조각들이 좀 더 디테일하게 나눠지면서 굳어 있던 습관들을 깨기 시작한다. 아침 아홉시 출근 시간에 걸려 포기해야 했던 것들, 게으름의 껍질 속에 담아 둬야 했던 것들이 불쑥불쑥 제 주장을 한다. 나는 그 주장에 충실히 따르는 하인일 뿐이고. 세상이 아직 시끄러워지기 전 새벽, 제2횡단도로 어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 시끄러웠던 세상의 소리들이 ...
(8) 보리콩의 일대기 과수원 입구 길가에서 자라는 보리콩. 동생이 준 씨앗을 심어놓고 저게 언제 싹이 나지, 싹이 나긴 할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지 일주일. 싹이 나왔다. 통통한 초록빛깔 쌍떡잎 두 개가 아침이슬을 머금고 말끔히 나를 올려다보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먼. 찢기고, 몽그라지고, 이파리인지 줄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식물체들이 땅을 붙잡고 바짝 웅크려 있었다. 이게 뭐야. 얘가 콩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의 유아기는 다 곱고 귀여운 게 아니었어? 하얀 쌀밥 위에서 선명한 초록색 ...
(7) 귤나무 가시 다듬기 한라봉 꽃이 피기 시작하면 꽃을 따던 일손을 잠시 멈춘다. 개화된 꽃을 잘못 만지면 과일 모양이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서다. 꽃이 떨어져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들이 서로 성장의 기운을 다투다 힘이 부족한 것들 먼저 자연낙과가 될 때, 다시 농부의 손길은 바빠진다. 나무의 수세에 맞게 열매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 쉬고, 천혜향의 가시를 다듬어 주려 했다. 쉬는 사이 집안일도 하고 밀린 숙제도 하며 보냈다. 오랜만에 늦잠도 자고, 아이들과 도서관에도 갔다. 남들...
(6) 오리 두 마리 귤나무 아래 실뭉치 두개가 굴러온다. 밭에 깔아준 지푸라기 색깔과 비슷한 두 마리 오리다. 짧은 다리를 빨리 움직일수록 좌우로 흔들리는 엉덩이의 반경이 몸 전체를 흔든다. 마음이 급했는지 양 날개를 벌려 속도를 가속시켜 보려 하지만 펼친 날개 역시 몸통을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이 작다. 허리춤에 살짝 손 하나 얹은 모양으로 붙어 있는 날개는 아직 깃털조차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파다닥 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속도에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