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공권력 투입은 '국가에 의한 폭력'...일상화된 폭력을 어떻게?

▲ 지난 2일 강정마을에 공권력이 투입돼 연행되는 활동가 / 제주의소리 DB
지난 2일 경찰은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과 시민사회 관계자들을 전격 체포했다. 새벽의 갑작스런 공권력 투입에 시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날 사태를 지켜보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3일자 중앙 일간지들에 실린 기사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자명하게 생각해왔던 ‘국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는 3일 안병태 전 해군총장의 말을 빌어 “영토 지킬 군사시설 못 짓다니, 여기가 어느 나라냐”라는 격앙된 어투의 기사를 내보냈다. 안병태 전 해군총장의 말에서 우리는 중요한 함의를 읽을 수 있다. 안 전 총장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며 국민은 국가의 행위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국민을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 즉 주체적 존재로서의 국민이 아닌 피동적 대상으로서의 국민으로 한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국민이 국가의 보호 여부를 선택하기보다는 국가가 자신이 보호할 국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국가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국민’이 되어 버린다. 배제와 차별의 시작이다. 국가의 보호를 거부하는 국민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라는 조롱을 받게 된다.

우리는 흔히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배웠다. 하지만 ‘어느 나라 국민이냐’라는 손가락질 앞에서 우리는 당황한다. ‘나는 국민이다’라는 확고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우리가 당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내가 국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국민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태어나는 순간, 당연히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인식해왔다. 하지만 우리의 당연한 인식과 달리 국가는 국민을 ‘선택’한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국민’이다. 국가는 ‘비국민’을 ‘국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바로 폭력의 방식이다.

용산 참사가 발생하자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철거민들을 가리켜 불순 테러 세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의원에게 불순 테러 세력은 국민이 아니다.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다. 반체제 세력이다. 따라서 ‘국가’의 권력 집행자인 경찰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며 공권력 행사이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이들은 ‘국민’으로 예우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여기서 당연한 질문 앞에 직면하게 된다.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 누구의 국가이며 누구의 국가가 아닌가. 국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에서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 행사를 독점’하며 합법적 테두리에 대한 ‘판단권을 독점한다’고 간파한 바 있다. 합법과 비합법을 판가름하는 것도 국가이며 비합법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배타적 권리는 국가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폭력(흔히 우리가 공권력이라고 부르는)에 대한 시민과 지역공동체, 연대기구들의 ‘저항적 폭력’은 엄중하게 처단된다. 국가는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과 시민사회 관계자들을 ‘불법 시위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저항적 폭력을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의문에 직면한다. 국가의 합법적 폭력은 과연 도덕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새벽에 기습적으로 행해진 공권력을 ‘도덕적’인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에 대한 저항은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저항이다. 법률적,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경찰의 연행에 항거한 주민들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짓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아버지 국가에 폭력을 행사한 후레자식이다. 독재 시절부터 국가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적 폭력을 권력이 어떻게 대했는가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폭력이 법의 이름으로(그 법은 국가가 규정한다) 정당화된다고 해서 도덕적인 권위까지 지니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은 폭력으로써 정당화된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국가이고, 그 폭력을 합법으로 규정하는 것도 국가이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가 자기 스스로를 재판하는 경우나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이 공권력에 의해 정당화되는 동어반복의 상황을 우리는 지금도 목격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2일 경찰의 공권력 투입에 대해 “법치질서 확립을 위한 지극히 당연한 조치”라며 “더는 ’평화’라는 그럴 듯한 포장 뒤에 숨어 강정마을을 분쟁으로 몰아 넣으려는 외부세력의 행태를 방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경찰 당국이 법과 원칙에 입각해 불법행위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공권력의 행사가 법에 의해 보장받는 순간이다. 국가의 폭력적 행위가 법에 의해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합법과 비합법을 규정하는 것은 국가이다. 그러니까 국가의 행위가 국가에 의해 합법화 되는 것이다. 국가 폭력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폭력의 방식으로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선택’하고 선택되지 않은 이들을 ‘비국민’으로 상정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민동식 외교부 차관이 평창 올림픽 유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고 말하고,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 대표가 해군기지 사업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국가의 폭력적 작동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결정에 찬동하는 자들만이 ‘국민’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국가의 폭력이 종종 ‘법치’라는 외피로 포장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경찰은 “불법행위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할 예정”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해고 문제에 대해서도 “법과 원칙”을 강조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유난히 강조된 ‘법치주의’는 역설적으로 국가 폭력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용산 참사, 촛불집회, 한진중공업 해고 문제, 그리고 강정마을에서 행해진 공권력의 무참한 폭거. 우리는 폭력의 일상화 속에서 살고 있다.

‘폭력’이 ‘법치’로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자명하다.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교묘하며 치밀하다. 언론이 동원되고 의회가 거든다. 유신독재 시절에는 물리적 억압의 방식으로 언론을 길들였다면 이명박 정부는 ‘자본’이라는 당근으로 언론을 순치한다.

정권의 떡고물은 언론사로, 언론사의 이익은 기자들의 주머니를 채운다. 배 부른 기자들은 권력을 감시하지 않는다. 권력을 누릴 뿐이다. 국가 권력은 이렇게 자본을 앞세워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거역하는 자들의 밥그릇은 뺏어버린다. 김훈식으로 말하자면 ‘밥벌이의 신성함’을 치졸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 권력의 작동을 막는 방법은 무엇인가.

방법은 두 가지다. 폭력이 ‘법치’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국가에 의해 독점된 폭력을 되찾아 오는 것. 전자는 벌거숭이 임금을 벌거숭이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벌거숭이 임금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즉 공권력의 폭력적 성격을 인식하는 것이 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막는 시작이다. 경찰의 물리력 행사를 공정한 법 집행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 ‘법치’의 외피를 뒤집어쓰지 못하도록 하는 첫 번째 방법이다.

또 하나는 국가 폭력에 대한 시민적 저항권의 행사를 선포하는 것이다. 다양한 저항의 방식으로 국가의 폭력적 작동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에 의해 빼앗긴 시민 주권을 되찾는 길이며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천을 가져오는 길일 것이다. 저항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 의해 ‘선택’된 국민이 아닌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이라는, 우리의 주체적 자각이 바로 저항이며 항거이다. 그리고 그 항거가 승리하는 순간을 우리는 역사에 맛보았다. 물러가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권좌에 오른 ‘대통령’이라는 것을.

▲ 김동현
사족 = 앞서 이 칼럼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국가를 괴물로 규정한 글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 ‘국가가 괴물이라니, 그런 글을 쓰는 너가 괴물이다’. ‘국가가 괴물이라고 그럼 너는 어느 나라 국민이냐’ 등등이다. ‘국가=괴물’로 묘사하는 글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들을 보면서 ‘국민’과 ‘국가’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권력이 그 성찰의 시작에 불을 붙여주었다. /김동현 국민대 대학원 박사과정(현대문학 전공)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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