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미의 제주여행(21)] 가파도

▲ ⓒ양영태
가파도는 보리밭 풍경이 아름다운 섬이라고들 한다.
봄,
온 섬을 파랗게 뒤덮은 보리밭 위로 한줄기 바람이 스쳐 가면
섬은,
파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인지, 일렁이는 보리밭 물결 속에 잠겨 있는 섬인지 모를 정도로 황홀감에 빠져 든다고들 한다.

▲ ⓒ양영태
하지만 지금은 8월,
보리밭은 볼 수 없는 가파도를 찾아갔다.
모슬포항에서 하루 두 번 왕복하는 도항선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30여분을 가면, 가파도의 남쪽에 있는 황개포구에 닿는다. 큰 포구라는 뜻의 ‘한개’가 발음상 ‘항개’로 변화된 것이라는 설과 남풍이 드셀 때 파도가 ‘뒷성’에 맞닥뜨려 부서지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무지개가 곧잘 서는 포구라 ‘황개’라고 일렀다는 설이 있다. 무지개의 제주어가 ‘황고지’다.
가파도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전에는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포구 안쪽에 있는 두개의 비석을 찾아가면 된다.

▲ ⓒ양영태
“가파도 개경 일백이십주년 기념비(加坡島 開經 一白二十週年 記念碑)”라고 한자(漢字)로 새겨진 비석과
그 옆에 한글로 새겨진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가파도 입주를 기념하여 1962년 건립한 기념비가 한자(漢字)로 조각되어 있어 해석이 곤란하여, 1985년 다시 한글로 해설문을 조각하여 별도로 옆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그 내용을 읽어 보면 가파도를 조금은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양영태
가파도는 섬이면서도 많은 역사문화유적이 있다. 선돌, 고인돌, 패총, 유물산포지 등.
우선 가파도 주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을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하나씩 있는 포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堂’)이다.
남쪽 황개포구에는 ‘뒷성’이라는 빌레가 있다. 포구 남쪽에 걸쳐 있는 빌레인데, 지금은 방파제가 그 위를 지나가며 축성되어 있다. 그 방파제 넘어 바위궤를 신체로 하여 울타리를 두르고 궤안에는 지전 물색을 걸어 놓은 석원형, 궤형, 지전물색형의 당이 있다. ‘뒷성 서낭당(황개당)’으로, 가파도 하동의 어부와 해녀를 수호해 주는 해신당이다. 지금도 궤 안에는 지폐가 걸려 있다.

▲ 해안도로 넘어 마라도가 떠있다.ⓒ양영태

사람이 사는 섬에는 어김없이 해안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가파도 역시 해안도로가 있는데, 서쪽의 해안단구를 빼고 해안선을 따라 잘 포장되어 있었다. 중간에 끊긴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서 섬 안을 바라봐도 섬 내부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최고 해발고도가 18.9m인 섬의 중앙부가 얕은 구릉을 형성하고 해안 쪽으로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지만, 그 곳에는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쌓아 놓은 돌담들로 둘러쳐져 있어 시야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양영태
가파도에는 탐라전기유적으로 파악된 선돌 1기와 고인돌 군락이 산재해 있다. 남서쪽 교회가 있는 옆쪽에 가면 밭 한가운데 드문드문 커다란 바위들을 볼 수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인돌로 보이는 것들로부터, 그냥 조금 큰 바위가 하나 돌출된 것 같은 것들을 비롯하여 수십기가 산재해 있다. 가파도에는 전체적으로 4개의 고인돌 군락이 있다. 대부분 지석이 없거나 지표 밑에 묻혀 있는 형식으로 최근 경작으로 인해 많은 상석들이 이동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96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0여기 정도가 알려져 있다. 1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선돌은 경작지를 조성하면서 훼손되어 밭 한 모퉁이에 눕혀 있다고 하는데 찾지는 못했다. 주민은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가 있으니….

▲ ⓒ양영태
도항선이 접안하는 황개포구에서 서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그 끝나는 곳에 소각장이 새로 만들어져 있고, 그 아래 해안에는 해안단구가 형성되어 있다. 5~7m의 높이를 이루는 이 해안단구는 과거 간빙기의 해수면 상승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 ⓒ양영태
해안단구의 해안선은 직경 20~40cm의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해안이 있다. 갖가지 몽돌들이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이 곳의 돌들은 표면에는 둥그런 구멍들이 뚫려 있고, 특이하게도 분홍색에 가까운 색을 가진 돌들이 많이 눈에 띈다.

▲ ⓒ양영태
해안을 따라 걷다보면 갖가지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는데, 그 곳에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붙어 있다. 서북쪽 바닷가 ‘아끈여’라는 곳에 커다란 둥근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바윗돌을 ‘큰돌(일명 왕돌)’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바위에는 동남쪽 해안에 있는 ‘까마귀돌’이라는 바위와 남쪽에 있는 ‘보롬바위’와 함께 사람이 올라가면 갑자기 날씨가 거칠어지고 파도가 일어 배가 뒤집힌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바위이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모진 바람과 거친 풍랑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잘 나타나는 곳이다.

▲ ⓒ양영태
가파도는 대정읍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유인도이다. 면적은 마라도보다 약2.5배 넓은 84ha로 남북간의 거리가 약 1.4km, 동서간의 거리가 약 1.5km로서, 네 귀퉁이가 길쭉한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소와 말을 기르는 목장지로 진상용 소를 주로 방목하다가, 1842년 사람이 왕래하며 경작을 시작했고, 1863년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섬은 전체적으로 나지막하여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 듯 하다. 마을은 북쪽에 있는 상동과 남쪽에 있는 하동의 2개 자연부락이 있고, 상동의 ‘모시리’ 포구보다는 모슬포를 잇는 뱃길인 하동의 황개포구가 더 번창하고 마을의 중심지를 이룬다. ‘모시리’라는 이름은 옛날 말을 실어 나르던 곳[몰(馬)+실이/모+시리]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가파도와 모슬포를 잇는 최초, 최단거리의 포구이지만 항구로서의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 ‘황개’에 관문을 내주고 쓸쓸히 앉아 있는 포구이다.

▲ ⓒ양영태
‘모시리’포구 오른쪽 바위에는 ‘매부리당’이 있다. 상동의 어부와 해녀를 수호해 주는 해신당인 이 당은 우측 정면에 돌로 만든 신석(궤)를 신체로 하고 그 궤 안에 지전과 물색을 걸고 울타리를 두른 당이다.

▲ ⓒ양영태
가파도는 예로부터 겨울작물로 보리농사를 하고, 여름작물로 감자(고구마)나 콩을 주로 심는다고 한다. 농토가 비옥하여 작물이 잘 생장하였으나, 조수와 바람으로 농사를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매년 심는 작물은 지금은 여름에 주로 콩을 심는 것 같았다.

▲ ⓒ양영태
현재는 지하수 관정을 통해 식수를 공급받고 있고, 담수화시설과 수도관 매설공사가 한창이지만, 옛날에는 해안가에 솟는 용천수와 사람이 직접 판 우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하동 황개포구 동쪽 해안에는 시멘트로 정비되어 지금도 물이 솟아나고 있는 용천수가 있고, 마을 중심부에 ‘물앞밭’이라고 불리는 소규모 구릉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입도하면서 판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있다. 예전에는 그 앞이 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동마을에도 ‘통물’이라는 우물이 있다.

▲ ⓒ양영태
농사를 지을 때 바람의 피해를 많이 받는, 섬 특유의 자연환경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방풍을 하는 것이다. 해안을 돌아가며 바다 쪽으로 쌓은 돌담들은 이런 바람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들을 만나다. 특히 개경 당시 쌓았다는 섬의 북동쪽 ‘갬주리코지’ 해안에 있는 방풍담은 지금도 그 돌을 움직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조금씩 허물어지는 밭담 너머로 송악산과 산방산의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곳이다.

▲ ⓒ양영태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섬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8월의 태양을 막아줄 수 있는 나무 한그루 없는 섬,
바람은 마치 행인의 옷 벗기기 시합에서 진 양 잠잠하고, 승자인 태양은 더욱 힘을 더하는 여름,
뜨거운 햇빛 아래서 섬은 조용히 숨 고르고 있고, 공사하는 중장비의 엔진소리도 조용하게만 느껴진다.

※ 양영태님은 '오름오름회' 총무, 'KUSA동우회 오름기행대' 회원입니다. 이 글은 양영태님의 개인 홈페이지  '오름나들이(ormstory.com) 에도 실려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