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지질기행 7> 하멜 표착지는 차귀진 앞 '대야수'

사계리 해안에 있는 용머리응회환과 산방산에 대한 답사를 정리해서 지난 두 편의 기사로 소개했다. 이 번 주에는 다른 화산지형으로 소재를 옮기려고 했는데, 이대로 사계리 해안을 떠나기엔 가슴 답답한 일이 있다. 잠시 한 숨 돌릴 겸 이번 주는 지질과 관련 없는 얘기를 하기로 했다. -필자 주

▲ 지난 1980년에 한국과 네덜란드 정부가 공동으로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
사계리 용머리 인근에는 17세기에 제주에 난파했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다. '하멜 기념비'로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 정부가 공동으로 출연하여 만든 것인데,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 

'네덜란드의 선박 디 스페르워르 호가 표류하여 헨드릭 하멜이 이곳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653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 뒤 13년 동안 그는 이 땅에 머물렀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책을 펴내 한국을 서방세계에 널리 밝힌 최초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 옛일을 기념하여 여기 작은 돌을 세운다.'

비석의 주인공 핸드릭 하멜(Hendric Hamel)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선박의 서기였다. 하멜이 속했던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는 1653년(효종 4)에 선원 64명을 태우고 타이완을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제주 해안에 난파되었다.  

13년 간 조선에 억류되었던 하멜 일행

이들은 조정의 명에 의해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라도 병영에 배속되어 13년 동안 억류되었다. 그러던 중 1666년 9월 4일에 하멜을 포함한 8명의 네덜란드 인은 밤에 배를 훔쳐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였다. 제주에 난파되었을 당시 생존자가 36명이었는데, 그중 20명은 조선 체류 중에 죽었고 8명은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 조선에 남았다.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조사를 받고 1년 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던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했다.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밀린 노임을 청구하기 위해 체류일지와 조선 왕국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여 동인도회사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인데, 우리에게는 '하멜표류기'로 더 익숙하다.

하멜 기념비에 하멜을 '한국을 서방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당시 베일에 가려진 조선을 이해하려는 유럽인들에게 하멜표류기는 유일한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당시 청나라와 쓰시마를 제외한 모든 외부세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에게 하멜 일행이 던진 문화적 충격은 적잖이 컸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들에 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의 실록과 하멜의 기록을 비교한 이들은 하멜의 기록이 20년 동안 책 없이 지낸 사람의 기록이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빙성이 있다고 말한다.

▲ 용머리 응회환 옆에 하멜 상선이 전시되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명장 히딩크 감독과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하멜 기념비는 하멜 일행이 마치 사계리 해안을 거쳐 간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국립제주박물관이 2003년에 하멜표착 350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항해와 표류의 역사>에서도 제주대학교 모 교수는 '하멜 일행은 … 용머리해안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하멜 일행이 사계리에 표류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하멜 일행이 사계리 해안에 표착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하멜의 기록에는 일등해사 헨드릭 얀스가 자신들이 ㅤㅋㅞㄹ파트(Quelpaert, 당시 유럽에서 통하던 제주섬의 지명)에 표착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고 되어있을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표착지에서 제주읍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성한 자들은 말을 탔고, 부상당한 자들은 들것에 실려서 4밀렌(mijlen)을 이동했으며, 대정(Tadiane)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여관이라기보다는 마구간에 가까운 건물'에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대목에 관심을 둔다. 

네덜란드 단위로 1밀렌은 약 7.4km에 해당하는 거리므로 4밀렌이라면 30km에 이르는 먼 거리다. 게다가 그들 중 몸이 성한 이들이 사계리 해안가에서 인접한 대정골까지 말을 타고 갔다는 대목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하멜의 표착지가 사계리 해안이 아니라는 확신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그런데 지난 1997년에 제주문화원이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의 저서 지영록(知瀛錄)을 그의 후손들로부터 제공받자, 하멜의 표착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답을 얻게 되었다. 

이익태는 하멜이 제주로 표착한 지 41년이 되는 숙종 20년(1694)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보다 30여년 년 전에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괴와 한 집안 사람으로, 이괴에게서 하멜의 표착 사건에 전해 듣고 흥미를 느껴서 <지영록>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하멜이 표류할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이 후임 목사인 이괴에게 하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줬고, 이괴는 이원진에게 들은 바를 그대로 이익태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야계는 <지영록>에 자신이 목사로 부임 받고 제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과 제주의 풍물들을 기록하면서, 그동안 인상 깊게 들었던 몇 가지의 표류기를 부록으로 삽입하였다.

이익태는 하멜 관련 사건에 대해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라는 소제목을 붙인 후, '계사(癸巳, 1653) 7월 24일에 서양국만인 헨드리크 얌센 등 64명이 함께 탄 배가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부서졌다.'고 기록했다. 

이익태가 남긴 기록에는 표착지가 '차귀진 밑'이라고..

국립천문대는 계사 7월 24일(음)이 하멜이 기록한 1653년 8월 16일과 일치한다고 확인한바 있다. 그리고 차귀진 밑의 대야수란 한경면 고산리와 대정읍 신도2리 사이의 해변을 지칭했던 지명으로 확인되었다.

하멜 기념비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면, 용머리의 서쪽에 하멜 일행이 타고 다녔던 배와 비슷한 모양의 상선이 전시되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명장 히딩크 감독과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운 것이다. 또,  전시장 인근에는 도내에서 꽤 잘 알려진 사계리 출신 인사가 만든 네덜란드 전시장이 자리를 잡고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두 가지 시설은 모두 무지에서(혹은 무지에 편승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에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 이상 무지가 오류를 낳고, 오류가 무지를 확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국이 하멜의 표착지에 대한 공식적 재검증에 나서야한다. /장태욱

 
   
장태욱 시민기자는 1969년 남원읍 위미리에서 출생했다. 서귀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해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42년 후배가 됐다.    1992년 졸업 후 항해사 생활을 참 재미나게 했다. 인도네시아 낙후된 섬에서 의사 흉내를 내며 원주민들 치료해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대학교 의예과 입학해 수료했다. 의지가 박약한 탓에 의사되기는 포기했다.    그 후 입시학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씨름하다 2005년에 <오마이뉴스>와 <제주의소리>에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바람이 부는 망장포로 귀촌해 귤을 재배하며 지내다 갑자기 제주도 지질에 꽂혀 지질기행을 기획하게 됐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