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8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4·11총선이 끝났다. 막말 파문을 일으킨 후보는 낙선하고, 성추행, 논문 표절을 했다는 후보는 당선되는 등 이번 선거의 결과 또한 정책 대결 또는 후보의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지역 대립 구도로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더해진다. 그렇다고 아예 희망을 놓아버릴 일은 아니다. 파장이 되었다고 다시 새 장이 서지 않으리라는 억측은 지나친 가치 축소 혹은 과잉 재앙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돌아보아야 할 것은 감정에 이성이 함몰해버리는 비논리와 비합리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택의 결과가 온통 빨갛거나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졌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가치의 다양성이 일반화되지 않은 불건강한 사회라는 증명일 것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물리적 분단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동서 대립 구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 집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우매함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즈음에 생각나는 책 한 권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이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의 미국사회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 사회상과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22년 뉴욕시 외곽에 있는 마을 롱아일랜드는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가 마주하고 있었다. 중서부 출신인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웨스트에그에 낡은 집을 하나 얻어 살고 있었고 이웃에는 백만장자인 개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미국 중서부 노스다코타 주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장교가 되어 세계 제1차대전에 참가한 바 있고, 그 후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한다.

개츠비는 주말마다 자신의 초호화 저택으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대규모 파티를 연다. 닉 캐러웨이 또한 개츠비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참석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츠비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듣는다. 옥스퍼드 출신에, 사람을 죽인 적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스파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밀주 판매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백만장자가 되어서는 잃어버린 옛사랑을 찾기 위해 그곳에 와 호화 별장을 지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사실 닉 캐러웨이의 사촌 누이인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부와 안정된 삶이었다. 그래서 개츠비를 버리고 부유한 청년 톰과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온 부가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톰은 마을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남자의 부인과 내연관계였고, 아이를 낳은 데이지는 늘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타난 개츠비로 인해 잃어버렸던 삶의 생기를 되찾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부의 노예가 돼 있었고, 옛사랑에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개츠비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낸 후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서 잘 알 수 있다. 차의 핸들을 쥔 것은 데이지였고, 사고가 나자 개츠비는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혼자만의 사랑이었다. 사고가 나자 톰과 데이지는 음모를 꾸미고 개츠비를 죽게 한 후 사라지고 만다.

개츠비의 장례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닉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개츠비의 죽음을 알리고 참석해주기를 부탁하였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생존해 있을 때 그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가 죽고 나자 아무런 효용가치도 못 느끼게 된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까. 원래 돈과 권력으로 맺어진 관계는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작품 속 책갈피...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이 점을 명심해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점을 말이다."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 (중략)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랜 미지의 세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다. '개츠비의 무엇이 위대하단 말인가' 하고 한참 생각하였다. 옛사랑을 잊지 못해 그녀가 사는 마을 언덕에 살면서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 사고를 낸 옛 애인의 안전을 위해서 밤새 달빛 아래 서성이던 한 남자, 결국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였네라'라는 싯귀처럼 사랑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끝까지 사랑을 지켜주려 했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의 순정만큼은 충분히 아름답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보여준 인간 군상들에 대해 생각한다.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 급작스럽게 부를 거머쥐게 된 신흥 졸부들은 정신과 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해 환락의 세계에 빠져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이 시대를 일컫는 표현 중에 '재즈 시대'라는 말도 있듯이 걸핏하면 가든파티를 열어 춤과 노래에 젖거나 도박판을 벌이고, 보트를 사서 낚시를 즐기는 등 향락의 문화에 젖은 일상이었다.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책임성은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었다.

개츠비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사랑의 회복'에 있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부는 밀수입으로 벌어들인 돈이었고, 그가 찾는 사랑 또한 이미 다른 남자의 사람이 된 여자였다. 그리고 그토록 애타게 찾는 그의 사랑 데이지는 그가 그렇게 찾아 헤맬 만큼 순수성을 지녔거나 자기 삶의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사고가 나자 그녀는 남편과 음모를 꾸며 도망가기에 바빴고, 그의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지 않았다. 그리고 개츠비가 죽자 어느 한 사람 그의 무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물질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얼마나 허망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돈 때문에 사랑이 떠났고, 돈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생전에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의리, 우정, 나눔, 사랑, 그 모든 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죽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은 명료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일찍이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일갈했다. 가면을 쓰고 현란한 불빛 아래 치러지는 무도회의 향연, 한때는 동지였던 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돌아서고 마는 무서운 전복의 시대에 진짜와 가짜는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선거 기간 동안, 우리가 목격한 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과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말들의 홍수였다. 하나같이 자신이 진짜라고 외쳤고, 하나같이 우리들의 동지라고 외쳤다.

이제 선거가 끝나고, 이 땅의 평화와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이들이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누구든 철석같이 믿고 던진 한 표, 그 유일한 희망이 꼭 지켜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개츠비 식으로 말하자면 한 번만이라도 믿어보고 싶다. 어쩌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벚꽃이 진 자리에 발그레 덧난 상처를 아물리며 새잎이 돋아나고 있다.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