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기 칼럼>  ‘작고 약한 개인’과 집단의 냉혹

  거리를 걷다가 거리에서 걸인과 마주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지갑을 열 것인가?

  도심 거리에서 쉽게 마주하는 이 풍경에 서게 되면 나는 늘 망설인다. 비단 거리의 걸인만이 아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저녁 술집에 앉아 있노라면, 비싼 가격의 껌 한통을 들이미는 손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성과는 그리 변변치 않은 듯하다. 늦은 밤거리에 놓인 바구니에 얼마간의 동전과 천원 지폐 몇 장이 전부인것만 봐도 그렇다.

  ‘무관심’ 혹은 ‘무시’의 결과다.
  그런데 이 무관심과 무시의 뒤에는 ‘합리적’이라 붙여진 ‘의심’이 동반된다. ‘구걸 하는 저이는 정말 배가 고파 구걸할까?’ ‘저와 같은 이들이 정작 잘산다는데’, ‘지하철에서 껌을 파는 저 아이의 뒤에는 그를 사주하는 배후가 있다던데’ 와 같은 의심의 결과다. 물론, 사실인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우리의 행동은 사실에 주목해 이뤄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확인하지 않고 푼돈이라도 얹어주는 행위는 동정심이든 연민이든 옳다.
  눈앞의 곤란에 의심을 접어두고 자신을 내어 주는 것, 눈앞의 잘못에 계산 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아쉬운 시대다. 한 개인의 곤란에 의심하는 ‘합리적 개인’들의 사회는 냉혹함이 집단화된 사회다. 그 집단의 냉혹은 곧바로 혹시 스스로가 될지 모르는 ‘작고 약한 개인’을 방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고 약한 개인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방관하는 사회다.

 #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민들을 참회와 화해로 이끈 대변자로서 알려진 마르틴 뇌밀러의 이 유명한 시를 어느 네티즌(러버)은 오늘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대체한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일 조선인 학자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일본 어느 대학의 수업풍경을 소개했다.  ‘교육 현장 지도법’이라 이름 붙여진 수업에서 강사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간략히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자, 여러분이 그 시대의 독일인이었고 유대인을 벗으로 사귀고 있었다면 그 벗과의 관계를 유지하겠습니까, 아니면 끊겠습니까?”

  이 수업장면을 제자로부터 전해들은 서경식은 학생의 다수가 유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그 ‘교과서적인 정답’의 실천이 실제로는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를, 인간이란 존재의 허약함과 어리석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그 강사가 얘기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스스로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제자가 얘기해 준 학생들의 반응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수업 이수 학생 서른한 명 가운데 열아홉 명이 “내가 당시 독일인이었다면 유대인과의 교우 관계를 끊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일어나서 당당하게 그 이유를 밝혔는데, “그런 상황에서 굳이 교우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자신과 유대인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때 교우 관계를 다시 맺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학생들에게 2차대전 당시 죽음에 몰린 유대인은 ‘타자’의 처지일 뿐이다.  나아가 효율과 능력, 유불리에 대한 기준이 판단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곤란에 처한 개인과의 관계의 단절을 ‘옳은 일’로 당당히 밝히는 ‘냉혹’이 강의실의 지배적인 ‘이론’이 된 것이다.

  이를 서경식 선생은 ‘보통 존재들의 폭력성’이라고 진단한다. ‘교과서적인 정의’조차 혹시 자신에게 도래할지 모르는 피해를 의식해 포기, 혹은 보류하는 사회의 그 개인들의 방관이 차별과 폭력의 재생산을 방치한다는 것이다.

 #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걸인은 어느 시대나 존재해왔던 ‘타자’의 극단화된 상징이다. 그러나 그 ‘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풍요한 오늘 날에 더욱 예리한 형태로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하루에도 최소한 한 명의 노인이 자살하고 있다. 사는 게 어려워 30명이 매일같이 목숨을 놓고 있다. “살아서 공장 돌아가자”던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사회적 학살’이다.

  하지만, 이른바 생계형 자살은 사회현상으로 치부되고,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그것이 매년 이어져도 22명이라는 숫자로만 표상화되는 느낌이다. 강정문제는 고통에 대한 관심보다는 단지 해결이 필요한 ‘사안’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고, 정작 타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강정마을로 달려온 개인들은 ‘외부세력’이 되고 만다.

   7m 테트라포트 시멘트더미 아래로 추락했던 문정현 신부는 “누가 밀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여, 왜 그 곳에 경찰들과 내가 있어야 했는지가 문제인 것이지”라고 말한다. 국가인권위조차 추락사건을 조사한답시고, 상황론을 따지더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추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강정의 현재다. 문 신부는 퇴원 당일, 병실로 찾아온 해양경찰 관계자에게 "내가 떨어지길 천만 다행이야, 경찰이 추락했으면 어찌할 뻔했어?"라고 반문 한다. 문제의 근본을 볼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했던 것이다. 종교인다운 언행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 타자를 양산하는 구조를 알아차릴 때,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실은 모두가 타자이며 동시에 모두가 주체임을 일깨우는, 실로 오랜 세월을 고통의 현장에 섰던 노사제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작년 미국 월가를 달궜던 시위대의 표어는 ‘점령하라!’였다. 이 시위는 단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월가 금융인들의 도덕적 해이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양극화를 넘어 1% 대 99%라는 부의 집중을 양산한 ‘구조’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높은 생활수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은 이 시위의 연설에서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면서도, ”월 스트리트 사람들과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지 말자.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이다“라고 일갈했다. 문제는 ”왜 그들과 내가 그 곳에 있어야 했는지“라던 문신부의 이야기와 철저히 닮아 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지 ‘추락할 수 있는 그 곳’에 서 있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해고 노동자가 될 수 있고, 강정마을의 고통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타자가 될 수 있다.
 
  거리의 걸인을 그냥 지나쳐야 하는 ‘합리적 의심’이 옳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또한, 동시대의 강정과 월가를 통해 현대의 합리적 개인들의 의심은 시스템(구조)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젝의 연설은 이어진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지요. 저는 여러분이 지금의 나날을 ‘아, 우리는 젊었고 그때는 좋았지’ 이렇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본 메시지가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 고유기 민주통합당 제주도당 정책실장

   월가의 시위 이전, 한국은 이미 수많은 ‘촛불’을 경험했다. 그야말로 ‘작고 약한 개인’들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삶과 사회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다. 왜 거리에 촛불을 밝혔었는지. 여전히 거리의 걸인을 의심하며 지나치는지. 혹시 점령해야 할 것은 작고 약하기만한 변명이나 합리성을 가장한 의심 따위는 아닌지를 말이다. / 고유기 민주통합당 제주도당 정책실장

* 이 글은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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