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13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6월이다. 저절로 엄숙해지는 달이다.

초등학교 때, 오후 5시면 태극기가 하강하고, 나는 그 앞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를 속으로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6월이면 그 생각이 자꾸 난다. 이것은 필경 필자만의 단독 추억은 아닐 것이다. 강제 주입된 애국심이라 할지라도 얼마간은 그 애국심으로 하여 살아갈 힘을 얻었던 소중했던 추억이며 신념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내재적 애국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붉은 악마’가 탄생하고,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스포츠 종목이라 할지라도 한국 팀이 출전한다면 다들 TV 앞에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분명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임을 자부하며, 대한민국의 현재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미래는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믿고 바라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그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언론에서는 매일 ‘종북 세력’ 운운 하는 말이 빠지지 않고, 그런 보도를 들을 때마다 이 땅에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마저 결코 도덕적이지 않으며 국민을 위한 선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어 솔직히 불안하고 힘이 빠진다. 하지만 어쩌랴. 그 또한 우리가 지지하고 뽑은 세력인 것을. 그마저도 무책임하게 부인하며 도망가고 싶지는 않다. 자꾸만 밀어내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붙들어 매어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생각나는 작품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1984년」과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의 작품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영감을 주었던 스페인 내전과, 아나키즘의 실험 무대이면서 이념의 격전장이었던 1936년의 바르셀로나에 대해 생생히 기록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등 전 세계 지식인들을 자발적으로 불러 모았으며, 2차 세계대전의 발판을 마련한 세기의 사건이다. 그런 만큼 수많은 소설과 그림, 영화의 모티브가 되고 영감을 준 세기의 전란이었다 할 수 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샤르트르의 「벽」, 엔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 영화 「토지와 자유」 등이 그 대표작이다.

조지 오웰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 통일노동자당(POUM)의 민병대로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보수 우익인 알레한드로 래룩스 정권에 맞서 카탈로니아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유혈 진압된 후 1936년 1월 선거를 통해 공화파·사회당·공산당 등으로 이루어진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우익 군부가 이에 대항함으로써 내전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이의 기록이다.

특정한 이념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의 정의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양심의 기록이며, 또한 이념의 대립과 갈등, 혁명의 약속과 권력의 배반으로 인한 좌절과 환멸을 그린 작품이라 하겠다.

작품 속 화자인 '나'는 1936년 12월 말 영국에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가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교회는 불에 탔고, 웨이터들은 손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동등한 입장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굴종적인 말투나 격식을 차린 언어도 사라졌다. 거리에는 이발사는 노예가 아니며 매춘부들에게는 매춘을 그만두라고 호소하는 천연색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정부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고, 내전으로 인해 파시스트를 물리치고 어렵게 일궈낸 노동자 정부를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별다른 이념의 색깔도 없이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전투를 위한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고, 전투는 자주 일어나지도 않았다. 총격보다 추위가 더 무서운 전쟁이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땔감과 감자 등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가 하면, 선전전으로 상대편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간헐적으로 총격이 일어나고 더러 부상당하는 동료들도 생긴다. 하지만 자신의 총으로 적을 저격한 일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전선의 기류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군과 적군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잠시 휴가를 얻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데, 주도세력인 공산주의자들이 통일노동자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숙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코에 대항해 싸우기보다는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를 무장 해제시키고 숙청하는데 열을 올렸다. 정당에 속한 의용군들은 프랑코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혁명을 위해 무기를 쥐고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력이 흔들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투옥되고 해외 신문들은 진실과 다른 기사들을 써댈 뿐이다. 세계 언론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기사를 보도했고,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알려지고 말았다. 결국 전쟁에서 이기지도 않았는데 전쟁 이후의 권력을 위한 숙청이 거듭되었고, 혁명적 분위기는 사그러들었으며, 프랑코와 파시스트에게 패배하고 만다. 또한 화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누명, 트로츠키파로 몰려 곤욕을 치르다가 어렵게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작품 속 책갈피...                                                

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말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토 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 살짜리 스페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을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가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중략)

이어 다시 영국으로 왔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 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뱃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에는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며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분명 정치성을 띤 소설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지 오웰 스스로 「카탈로니아 찬가」를 두고 “공공연히 정치적인 책”이라고 말하며 11장을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왜 쓰는가」에서 “스페인 전쟁과 1936-1937년 사이의 기타 사건들은 정세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았고 그 이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때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의 의미는 특정한 정치 조직의 정강 정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화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은 우연한 이유로 P.O.U.M. 부대에 소속된 것뿐이고 트로츠키주의적 경향보다는 스탈린주의적 경향을 가진 곳에 관계가 깊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경험하면서 점차 P.O.U.M을 지지하게 된다. 볼셰비키(소수파라는 의미)가 혁명 이전까지 대중의 영향력을 거의 획득하지 못하다가 혁명이 전개됨에 따라 인민들이 볼셰비키에 동조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카탈로니아 찬가」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 목적-‘정치적’이라는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다.”

오랜만에 정치성 짙은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물론 내전이라든가 그로 인한 극렬한 이념의 대립이 대치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 유사한 특성은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여전히 보이고 있다.

정치와는 무관한 한 사람으로서 자꾸만 색깔론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정국이 뭔가 꺼림칙하고 비이성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스페인 내전을 보도하는 영국, 프랑스의 언론들이 보여주었듯 언론의 행태마저 제 구미에 맞게, 자신의 이익에 맞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뭇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한다. 안개가 짙을수록 저 너머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좌충우돌 헤매다가 영영 길을 잃기 전에 말이다. 애국의 달 6월에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어떤 것도 민주에 반하는 일은 공공의 적으로 공평히 평가되고 합리적으로 처벌받아야 한다.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