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15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접힌 물살에 깃들어 흐르다가 물살이 양날을 펴는 순간, 깃털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이정표를 잃고 말았다. 삶과 몸이 동떨어져 있는 순간 포착된 현재는 그림자를 깊게 드리우고 있다. 그림자 안에서는 깃털의 갈라진 틈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제 마음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이렇듯 선명히 보일 때가 있다. 잠시 자기 안에 침잠된 시간이 선물하는 고요함일 것이다.

 소용돌이에 함몰된 깃털들에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붙잡고 있었던 건, 표피의 죽은 원소들. "깨끗이 결말짓는다는 것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깨끗이 죽을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에머슨의 주옥같은 말이 이쯤에서 떠오를 줄이야. 살다보면 내 안에서 요동치는 작은 물결의 잔영에도 가슴이 베일 때가 있다. 그 물살을 보내고 나면 다시 고요해짐을 느낀다. 인간 내면이 이렇듯 유동적이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작가이다. 1900년에 일본 문부성이 임명한 최초의 유학생으로, 영국 런던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문」,「마음」,「행인」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1905년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하고, 1916년 「명암」을 집필하던 중 사망하였다. 겨우 12년의 작품 활동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보여준 이야기의 구조는 사회적 갈등에서부터 자아의 문제까지 심도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거론되며 사랑받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인간 내면의 양심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양심이란, '良心'과 '兩心'을 포함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마음’이란 인간에게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과 사고가 혼재한 복잡한 존재이며, 인간의 이기심과 악함은 본래 그렇다기보다는 자아와 환경이 결합된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음」은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과 유서' 등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 '나'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을 만나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선생님의 유서 같은 편지를 받고 급히 기차에 몸을 싣는다는 이야기다. '나'는 '선생님'을 가마쿠라 해변에서 만났다. 알 수 없는 이끌림과 우연이 겹쳐 스승과 제자처럼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님은 말이 없고, 뭔가 해탈한 듯도 하고, 뭔가에 이끌리는 듯도 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비밀과 연관된 어쩔 수 없는 양면이었다. 

 비밀은 다름 아닌, 친구 K가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하던 K는 어느 날, 선생님에게 하숙집 딸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다. 선생님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이미 시작된 사랑이 친구가 먼저 고백을 하는 바람에 한발 늦은 사랑이 돼버렸다. 친구의 고백을 받자 사랑을 놓칠 수 없다는 강한 집착이 생기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서두르게 된다. 그리고 하숙집 주인여자의 허락을 받아낸다. 그 소식을 들은 K는 자살을 하고 만다.

 물론 자살의 이유가 사랑을 빼앗긴 충격 때문인지, 자신이 늘 앓아온 정신적 고뇌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 죽음은 선생님에게 인생의 큰 짐이 되고 만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업을 갖지 않고, 집안에만 갇혀 사는 생을 산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자살을 택하고 만다.

 어찌 보면 허무한 이야기다. 친구에 대한 배신이 목숨과 바꿀 만큼 그토록 괴로운 일일 수 있는가 자문하기도 해본다. 하지만 선생님은 양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그 양심은 스스로 자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과거는 비양심적인 작은아버지로부터 받은 배신으로부터 연유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작은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잘 보호해 주겠다고 해놓고 사업자금으로 이용하다가 전부 탕진하고 만다.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사촌과 결혼시키고자 한 작은아버지의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고 환멸감을 느끼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돼 염세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선생님이 깨달은 것은 그토록 경멸하던 작은아버지나 자신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둘 다 자신의 욕구와 이익에 따라 한 개인을 배신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결국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지만 그 기쁨은 잠시, 평생 따라다니는 양심의 소리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것은 누구의 벌도 아닌, 스스로의 양심이 내린 벌이었다.  

 작품 속 책갈피...

나는 어두운 세상이 낳은 그림자를 숨김없이 자네의 머리 위로 쏟아내겠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붙잡게. 내가 어둠이라 한 것은 윤리적인 면에서의 어둠을 말하는 것이네. 나는 윤리적으로 태어난 사람이지. 또한 윤리적으로 성장한 사람이고. 나의 윤리 의식은 요즘 젊은이들하고는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어떤 차이가 있든지 간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에서 난 나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자 하네. 정해진 기간 내에 돌려줘야 하는 대여복이 아니란 말일세.

(중략)

내가 죽으려고 마음먹은 지 오늘로 열흘 이상이 지났네. 그 대부분은 자네에게 이 긴 글을 남기기 위해 흘려버린 날들이라는 것을 알아주게. 처음엔 자넬 만나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쓰고 보니 오히려 이렇게 함으로써 솔직히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 한편 기쁘네. 이건 절대 술기운에 쓰는 글은 아니네. 나를 만든 나의 과거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모든 걸 숨김없이 토해내기 위해 들인 나의 노력은 한 인간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네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헛수고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K는 선생님에게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K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아버지는 승려였다. 그래서 매형의 주선으로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양부모가 보내준 학비로 대학에 들어왔지만 결국은 그들의 소망대로 의학을 공부하지 않아 학비가 끊기고 만다. K는 철학과 종교서적에 탐닉하고, 어떤 이상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고, 현실은 그 이상을 좇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한 가닥 희망처럼 여겼던 사랑마저도 그의 친구로부터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보호 밑에서 자랐다. 재산은 꽤 있었으나 작은아버지가 사업자금으로 이용해서 탕진하는 바람에 겨우 생활할 만큼의 재산만 확보할 수 있었다. 그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조금의 재산과 친구, 사랑하는 여자뿐이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배신으로 자살하고, 그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폐인처럼 집안에 갇혀 산다. 재산도 집 한 채 겨우 갖고 있는 정도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일으켜주지 못했다. 그것은 양심이라는 것이 매사에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고뇌의 소유자였던 그는 결국 스스로 장착한 양심의 돛대가 흔들리면서 좌초되고 만 것이다.

 "양심이란 작자는 사람을 약하게 해버리는 거야. 훔치려고 하면 꾸짖고, 중상하려고 하면 야단치고. 양심이란 작자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모반을 일으키는 아주 고약한 자야."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양심이란, 이성과 감성의 합작품이 일으키는 소리 없는 폭풍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찻잔 속의 폭풍'처럼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여운이 길어서 그 속에 풍덩 빠지고 마는.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자꾸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기 안에 갇히지 말고 날로 새로워지는 세상의 환희에 눈을 돌려 긍정성을 회복하라는 외침이다.

 긍정성이 세상을 잘 살게 하는 심리적 비결이 될 수는 있으나 양심의 울림을 외면하고 밖으로만 눈을 돌리라는 뜻으로 해석돼서는 안 될 것이다. 긍정성은 마음의 밭과 상관성이 있는 개념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닦으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스며들어 꽃이 만발해진다. 물론 썩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 더욱 마음의 밭은 기름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두루두루 불러들여 식구로 삼는 마음, 그것이 나는 긍정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선택한 죽음을 통해 나 이외의 것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스스로 건강한 삶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현대인들의 불안, 그것은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검열의 그림자가 아닐는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의 모순과 불안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주인공은 죽음 앞에서 글을 통해 그간의 삶의 질서를 해부해보는 의식을 치렀다. 겉으로는 질서 있게 포장되었던 것들이 혼돈과 무질서로 얽히고설키어 그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깨끗이 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삶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가 죽음으로써 독자는 살게 되는 역설을 또한 깨닫는다. 역설은 비장함이 묻어있는 진실의 언어다.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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