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은 고립돼야 하는 하얀색 얼음바다 '백해'
반년은 고립돼야 하는 하얀색 얼음바다 '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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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혁이 떠난 러시아 여행] (4) 솔로베츠키 군도


백해의 서쪽 해안 중간쯤에 위치한 카렐리아 공화국의 케미에 도착하여 기차역을 나서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배낭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챙겨간 일회용 비옷을 꺼내어 입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정류장이라고 가르쳐준 곳은 표지판 하나 없이 낡은 나무 벤치 하나 달랑 놓여있을 뿐이다. 정류장 옆에 은행이 있어서 버스요금에 필요한 잔돈을 바꾸려고 들어갔다. 여직원 두 사람이 전부인 작은 은행의 실내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줄을 서지 않은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1000루블을  100루블로 교환해줄 것을  요청하니 의외로 선선하게 바꿔주었다.

▲ 작은 어촌 마을 라보체오스트로브스크의 버스 종점. ⓒ양기혁

낡은 미니버스는 20여분을 달려 몇 개의 시골마을을 지나친 다음, 버스의 종점인 듯 차를 한바퀴 돌리더니 아무도 없는 시골 버스 정류장에 나를 내려줬다.

인적 없는 마을 쪽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지은지 얼마 안돼 보이는 깔끔한 통나무 주택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솔로베츠키 군도를 찾아가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소용으로 지어진 것들로 보였다. 관리사무실에서 왕복 배표를 사고, 맞은 편 카페에서 닭고기 샤쉬릭과 흑빵 두조각, 커피 한잔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배를 타기까지 또 몇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군도로 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 주변엔  통나무로 지어진 정교회의 순례자를 위한 작은 채플(기도소)가 덩그마니 세워져 있을 뿐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오래전 나무로 지었던 선착장은 허물어져 내려 방치되어있고, 철근이 들어간 콘크리트로 새로 배를 댈 수있게 지어놨는데 다지은 건지 짓다만 건지 알 수 없다.

▲ 버스종점에서 바라본 마을의 풍경. ⓒ양기혁


 
먹구름이 밀려와 날이 어둑해지고,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면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준비를 할 때 혹시나 해서 배낭 속 안쪽에 쑤셔 넣었던 긴팔의 파카를 꺼내 입으면서 챙겨오길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해(white sea), 이 바다는 어째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물빛은 이름과 달리 검게보일 정도로 짙푸르다. 겨울이 되어 땅과 바다가 전부 얼어붙게되면 이곳이 거대한 빙판을 이루어 눈부신 하얀색 얼음바다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은 아닐까? 이 곳을 소개하는 안내책자에는 백해가 완전히 얼어붙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에는 육지의 해안변으로 그리고 백해 안의 수백개에 달하는 섬들 사이로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이 수킬로미터에 걸쳐 분포하며, 빠르게 흘러다녀, 군도는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일년의 절반가량을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고립되게 된다고 한다.

▲ 솔로베츠키 군도로 가는 선착장의 한쪽에 세워진 순례자를 위한 기도소. ⓒ양기혁

줄여서 ‘솔로브키’라고도 하는 솔로베츠키 군도는 백해의 많은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인  ‘볼쇼이 솔로베츠키’와 가까이 인접해 있는 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볼쇼이 솔로베츠키는 군도 전체 면적 300km²의 70%가 넘는 218km²이고, 나머지 5개섬은 볼쇼이 솔로베츠키의 부속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볼쇼이는 ‘크다’는 뜻의 형용사이다.)

▲ 나무로 만든 옛 선착장은 허물어지고, 옆에 새로 만들었다. ⓒ양기혁

오랜 세월 동안 라플란드와 포모르 지방의 랩족과 핀족들이 여름이면 이 곳에 들어와 바다표범과 흰돌고래를 사냥하거나 어로작업을 하면서 생활하고, 죽어서 주검이 묻히는 곳이 되었으며, 매장지에는 작은 돌무더기들을 쌓아올리면서 그들만의 상징체계를 만들고,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 솔로호텔. 통나무로 지어진 이 호텔은 관광객이 늘면서 옆에 조립식 건물로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양기혁

 

1429년 한 정교회 수도사가 이곳으로 은둔지를 찾아들어오면서 솔로베츠키 군도는 정교회의 성스러운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교도들의 땅이었던 이 곳은 곧 북 러시아 정교회의 심장이 되었다. 노브고로드 공국에 속해있던 이 곳은 1479년 모스크바 공국이 노브고로드를 정복하면서 모스크바 공의 보호하에 들어가게되었고, 16세기말에 수도원의 바깥쪽에 돌로 성채를 쌓아올리고, 자체의 군대를 보유하여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이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는 북러시아를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다.

 

▲ 선착장에서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가는 길. ⓒ양기혁

외부의 적들과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교회 내부에서 찾아왔는데 그것은  니콘 대주교가 주도한 교회개혁이었다. 정교회 전례에 있어서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규정한 개혁은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는 성직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평신도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을 사용하는 대신에 세 손가락을 사용할 것, 알렐루야를 두 번 부르는 대신에 세 번 부를 것과 같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전례의 형식적인 면들이 목숨을 건 저항을 불러왔고, 이단과 정통을 가르게 했다.

▲ 대조국전쟁에서 죽어간 수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비(솔로브키 수용소는 1939년 폐쇄되어 수용자들은 다른곳으로 옮겨갔고 여기는 북해함대의 훈련기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곳 수병학교 졸업생들은 15,6세의 어린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에 투입되어 희생되었다.) ⓒ양기혁
▲ 뒤쪽 호수에서 바라본 수도원. ⓒ양기혁
▲ 아침 산책길에 찍은 수도원의 모습. ⓒ양기혁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니콘의 개혁을 따르지 않는 구교도로서 1668년부터 약 7년간 저항을 했는데, 개혁을 거부하는 많은 수도사와 신도들은 분신과 같은 자살을 선택했고, 대부분은 짜르의 군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니콘 대주교 자신이 젊은 시절 이 군도의 두 번째 큰 섬인 안제르 섬에서 수도사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은 폐허가 되었고, 잊혀져갔다.

1854년 여름 남쪽 검은 바다의 크림반도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만 투르크 연합군과 러시아 사이의 크림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영국은 두척의 전함을 동원하여 북쪽 하얀 바다의 군도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흑해의 크림전쟁에서 패배했고, 이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실의에 빠졌으나, 백해로 들어온 영국 전함의 공격에 저항하여 잘 막아낸 수도원은 러시아인들의 신앙심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황실 가족과 귀족들이 솔로브키로 순례를 떠났고, 기부금이 밀려들었고, 수도원에 수도사들이 채워졌다.

▲ 솔로호텔 근처 길가에 세워진 오래된 기도소. ⓒ양기혁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적군이 반혁명세력인 백군을 제압한 1920년 5월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문을 닫았다. 6월에 솔로브키에 강제노동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이듬해 1921년에는 솔로브키 집단농장이 창설되었다. 1923년 솔로베츠키 특별수용소로 이름 지어진 후 이 곳은 이후 스탈린 시대 지어진 모든 강제수용소의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수용소의 어머니(the mother of GULAG)가 되었다. (굴락(‘GULAG)은 강제노동수용소를 뜻하는 러시아어의 약어를 영어알파벳으로 표현한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58년부터 약 10년에 걸친 작업끝에 ‘수용소 군도’ 제1권을 완성했는데, 비밀경찰에 의해 발각되고난 뒤인 1973년 파리에서 발표되었다. 볼세비키 혁명 이후 1918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인 1956년까지 소련에서 자행된 숙청과 테러를 고발하고, 잔혹하며 비인간적인 고문행위같은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일 등을 기록한 다큐멘타리 작품인 ‘수용소 군도’는 강제수용소의 상징과도 같았던 솔로베츠키 군도를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소련 각지에 흩어져 고립된 수용소의 모습을 군도로 표현하고 있기도하다. 

▲ 볼쇼이 솔로베츠키 섬의 남쪽 해변. 멀리 수평선에 보이는 섬이 다섯 개의 부속섬중 큰 자야츠키 섬과 작은 자야츠키 섬이다. ⓒ양기혁

‘굴라그(GULAG)’라는 불가사의한 나라-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보면 군도(群島)로 산재해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하나로 결합되어 대륙을 형성하고 있다. 거의 눈에 띄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나라, 바로 이 나라에 수많은 죄수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 ‘수용소 군도’의 서문에서 인용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듬해인 1992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비롯한 군도의 건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배는 쾌속여객선으로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데도, 3시간이나 걸려 섬에 도착했다. 내 앞에 앉아서 줄곧 전자책을 읽고 있던 젊은 여자에게 배가 도착할 때 쯤해서 말을 걸었다.

븨 쥐뵤쩨 보트(여기에서 사십니까)?

여자는 미소를 띄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뻬쩨르부르그스카야 유스호스텔을 갈려고 한다고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배를 내려서 그녀는 따라 오라고 손짓을 했다.

주변의 카페와 자전거대여소 같은 곳에 모여 있던 청년들이 그녀를 부르고, 그녀는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비포장 길과 평평한 돌이 깔린 길을 1km 남짓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그녀는 돌로 쌓은 성채 옆의 건물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하고는 작별인사를 하는둥 마는 둥 멀어져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건물에서 나온 중년의 여인은 남은 방이 없다고 한다.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온 학생들만도 30명은 족히 넘는 숫자였고, 다른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온 것으로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가이드북에 소개된 다른 호텔로 향했다. 유스호스텔에서 멀지않은 솔로호텔은 이층으로 된 목조건물이었으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옆으로 조립식 패널로 이어 붙여서 확장한 모양이다. 호텔이라 부르기에 무색하게 보였지만 손님으로 북적였다. 6월 초에서 9월 초까지 여름 한철 장사하는 이곳 호텔들은 때맞춰 밀려드는 투숙객들에게 일 년치 양식을 뽑아낼 심산인지 숙박요금이 만만치 않다.

숙박료 2,400루블 우리 돈으로 90,000원이나 하는 호텔방에 욕실과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샤워실에 온수는 나오지 않고 물은 얼음같이 차가워서 얼굴만 간단히 씻고 샤워는 포기해야 했다. 호텔 안에 아늑한 식당이 있고, 저녁 10시까지 영업한다고 가이드 북에 소개되었으나 그 호텔식당은 문이 닫혔고, 아침식사만 가능하다고 한다. 호텔 안에 아무것도 파는 것이 없었고,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었다.

주변에 가게나 카페 같은 것이 없나 찾아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결국 포기하고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배낭을 뒤져보니 맥주안주로 먹던 땅콩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화장실에서 받아온 수돗물과 땅콩 몇 방울로 저녁을 때웠다.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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