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걸으멍 보멍 들으멍] (1) ‘오곡상회’ 강치숙 할머니 / 정신지

<제주의소리>의 주말 코너 ‘걸으멍 보멍 들으멍’에서 제주 곳곳을 누비며 할망 하르방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온 인터뷰 작가 정신지가 이번엔 제주 전통시장에서 걸으멍 보멍 들으멍 글을 쓴다. 그녀는 일본에서 12년간 유학생활을 했고, 그 사이 유목민처럼 세계 17개국을 떠돌며 사람과 사회,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지역연구학) 과정을 수료한 그녀가 타고난 역마살을 내려놓고 지난해 초 고향 제주로 돌아와 할망 하르방들을 만나는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왔다. 이제 그 발길을 잠시 전통시장으로 돌려 올해 문화관광형시장에 선정된 제주서문공설시장에서 상인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펜 끝이 전하는 시장사람들의 사람냄새 진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 제주서문공설시장의 오곡상회에서 40년을 오롯이 쌀을 팔아온 강치숙 할머니. 머지않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도 수영을 즐긴다는 할머니는 최강 동안이다. 동안 비결이 뭐냐고 묻자 파안대소하며 얼굴을 붉히신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언뜻 보면 고생 하나 안 하고 살아오셨을 것 같이 고운 얼굴을 한 오곡상회 강치숙 할머니.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할머니는 올해 일흔 여덟(1936년생)이라신다. 도대체 할머니의 동안의 비결이 뭐냐 물으니, 발그스레 얼굴을 붉히며 한 말씀 하신다. “내 이야기야 뭐, 아주 파란만장하지!”

일제 강점기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해방되던 11살까지 오사카에서 자랐다. 해방 후 제주에 돌아오니 이내 4.3사건이 일어났고, 얼마 안 가 또 한국전쟁이 터졌다. 정신없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머리에 철이 들기 시작하니 이제는 돈을 벌어야했다.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바다를 건너 그이는 부산으로 간다.  전쟁에 필요한 피복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양재(洋裁) 일을 했다. 그렇게  7년간의 타향살이를 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고, 스물넷이 되던 해 제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는 좀 살만하다 싶더니 남편이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슬하에 남겨진 아들들을 홀로 키워나갈 생각을 하니 너무나 막막하고 슬펐지만, 살아야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쌀가게다.

 

▲ 스물넷에 결혼식을 올린 꽃다운 처녀는 이제 일흔 여덟이다. 시장에서 보낸 고단했던 삶이 주름 깊게 패인 그의 손에서 묻어난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논이 없는 제주에는 쌀이 귀하다. 아니, 귀했었다. 명절이나 제사상에나 오르던 쌀을 어르신들은 ‘곤쌀’이라 불렀고, 곤쌀로 지은 희고 고운 밥을 ‘곤밥’이라 불렀었다. 곤밥 한 수저 먹어보겠다고 명절날 아버지께서 남기신 밥상 앞에서 침을 꿀꺽 삼키던 어린 시절의 기억, 제사를 지내는 동안 쉬어버린 밥조차 아까워 쉰밥으로 ‘쉰다리’(제주의 전통 발효 음료)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들의 지혜, 이 모든 것이 모자람 속에서 태어난 제주인들의 나눔의 정서이자 ‘쌀’이라는 먹거리가 우리에게 남겨준 향수가 아니던가.

이렇듯 쌀이 귀했던 시절엔 쌀가게도 귀했었다. 할머니가 가게를 시작한  1970년대 초반에는 쌀가게는 정부의 허가제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쌀도 아니었거니와, 아무나  팔고 싶다고 팔수 있는 쌀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만 쌀가게를 가질 수 있었으니, 할머니는 운이 좋았다. 어렵게 얻은 허가로 쌀가게 문을 열게 된 날,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할머니는 가게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 관한 가족회의를 열었다. ‘무언가 근사한 이름 없을까?’ 다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찰나, 작은 아들이 “어머니, 뭐니 뭐니 해도 쌀가게에는 오곡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라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정직한 의견을 꺼냈고, 가게 이름은 만장일치로 ‘오곡상회’가 되었다. 그 아들이 머지않아 예순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할머니는 미소 짓는다.

▲ 오곡쌀상회와 옆 가게 사이의 유리창에 붙여진 두자리 숫자의 국 전화번호가 세월을 느끼게 한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시골 할망들은, 이렇게 (제주)시에서 장사하며 사는 할망을 보면 그게 무슨 노동이냐 그래. 하지만 생각해 봐. 농사는 비 오면 쉬고, 눈 와도 쉬고, 명절 때는 손을 놓고 계절마다 다른 일을 하니 지루하지도 않지. 그런데 사실 시장에서 일을 하면 여기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이 오나 쉬는 날도 없고, 팔든 못 팔든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어야 하잖아. 그러니 여긴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어! 손님들 오는데 민얼굴로 있을 수도 없으니 매일 아침 화장도 해야 하고, 시골 할망이 보면 고생을 덜 해서 얼굴이 뽀얀 거라고 하지만도, 무거운 쌀 배달하고 옮기고, 시장에서 내가 하는 노동도 중노동이라고. 하하하”

홀어머니의 몸으로 가사를 돌보고, 자식들에게는 아버지의 노릇까지 해가며 오곡상회의 모든 일을 홀로 도맡아 하며 살아온 할머니는 이제 다리도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나마 10년 정도 꾸준히 수영장에 다니며 건강관리를 해 온 것이 지금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을 위해 단 한 푼의 돈도 투자한 적이 없고, 몇 분의 시간도 자신만을 위해 써본 적이 없는 할머니에게 수영은 커다란 가르침이었다.

“어느 날 젊은 사람이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 나 자신을 위해 돈도 쓰고 시간도 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 말을 잘 듣고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가더라고. 그러고 보니 여태껏 살면서 나를 위해 내가 뭘 했나 싶은 게…. 그래서 아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수영을 배우러 가라고 그러는 거야. 수영을 전혀 못 했던 나였는데, 해보니까 ‘아아, 예순이 넘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가능한 거로구나!’ 하면서 좀 놀랐지. 그러고 나니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수영장에 갔다가 걸어서 시장까지 나오는 일이 너무 즐거운 거야. 물론 시장에 늦을까봐 올 때는 조마조마하면서 빨리 걸어오는 것이 벅찰 때도 있었지만. 10년 즈음 하니까 이제는 한 번에 600미터 정도 연달아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쉬지 않고 왔다 갔다 왕복 12번! 이쯤 되면 할머니 수영왕이라고 해도 되지 않아?”

▲ 쌀배달을 다녀오다 카메라를 발견한 강치숙 할머니. 강 할머니가 "곱닥헐때(예쁠때) 찍으라게"라며 수줍게 웃으신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동안 비결은 이러한 자기관리에도 있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즐길 거리를 찾고, 그것을 꾸준히 해 나가는 삶의 자세, 그리고 손님이 오든 안 오든 곱게 화장을 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자세 말이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 말씀을 하시지만, 사실 지금도 쌀을 사러 오곡상회를 찾는 단골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이 바뀌며 예전처럼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지 않는다는 것. 그 근본적인 이유를 꿰뚫고 계신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 급식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엄마들이 하루에 두세 개씩 도시락을 쌌거든. 그러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집에 두 명만 있어도 아침마다 솥에 밥을 한가득 해야 하잖아.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아침밥도 안 먹지만, 옛날엔 일하러 가기 전에 먹는 밥이 가장 큰 밥이었단 말이지. 이젠 사람들이 빵 먹고 햄버거 먹고 그러니까 쌀이 많이 필요 없는 거야. 옛날에 한 달에 열 되(쌀을 재던 단위, 제주에서는 한 되가 1.75Kg)씩 쌀을 먹던 사람들이 이제는 두 되 정도 밖에 안 먹는 거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손님이 정말 뚝 하고 끊긴 거. 그나마 남은 단골들은 노인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도 나처럼 늙어가니까 이제 쌀도 많이 안 먹어. 먹으려고 해도 늙으면 밥을 못 먹어. 그러니 어디 쌀장사가 되나? 쌀 사러 오는 젊은 사람은 거의 없어. 현미나 검은 쌀은 마트보다 싸다고 사러오는 젊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있지만. 종일 앉아 있어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조금밖에 안 와, 젊은이들은.”

▲ 보리쌀에 묻힌 되박도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오곡상회를 시작해 40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가 파는 쌀의 이름은 더 이상 곤쌀이 아니다.  하얗고 찰진 쌀밥보다는 건강에 좋은 현미밥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이 왔다. 친환경을 고집하며 잡곡밥 현미밥을 먹지만, 예쁘게 비닐에 포장되어 나오는 현미며 쌀이 과연 얼마나 친환경일 수 있을까? 사기 전에 만져보기도 하고 한 알 씹어보기도 하며 가격을 흥정하던 시절의 쌀집. 사람과 쌀 사이에 존재했던 본연의 ‘친환경’적인 거리, 그 정겨움이 할머니는 그리운 게다. 오곡상회의 단골 중에는 포장되어 있는 쌀은 안 사가고 아직도 일부러 됫박으로 쌀을 사가는 오랜 손님들이 있다. 그 손님들에게는 오히려 포장되어 있는 마트의 쌀이 불안한 쌀이고 덜 친환경적인 쌀이다. 언제 어디서 왔을지, 정말 맛이 좋은 것일지 모르는 쌀을 사고 싶지 않은 고집스러운 손님들이 할머니의 오래된 단골들인 셈이다.

상점 한편에서 앉아 오래된 앨범을 꺼내와 정겨운 옛 사진들을 보여주시던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 인터뷰 작가 정신지  ⓒ제주의소리 DB

“옛날에는 모두가 힘들고 다들 고생을 했으니 내 고생이 뭐 별거야? 그저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친 아들들이 정말 그렇게 자라나준 것이 나는 참 고마워. 내가 표현이 서툴러서 말은 잘 못했지만, 건강한 손주 손녀 낳아서 나에게 안겨준 것에 나는 많이 감동 받고 살아왔어. 장사하느라 자질구레한 뒷바라지도 잘 못해주고 자식들 어렸을 때는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살면서 몇 번이고 큰일이 닥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걱정될 때도 있었지만, 밥 먹고 살다보니 살기 마련이더라고. 밥 잘 먹어서 일단 건강하고, 그다음이 성실하고, 근면할 것 !”

이렇듯 오곡상회 할머니 표 지혜의 핵심은,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자신을 사랑할 것’, ‘변하지 않는 오래된 가치를 소중히 여길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부지런히 삼시세끼 밥(쌀) 잘 챙겨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린 배를 쓸며 쌀집을 나오는 내 뒤통수에다 할머니가 물으신다. “그나저나 밥은 먹고 다니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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