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이 떠난 러시아 여행] (12) 모스크바 세례메티에보 공항

 

▲ ⓒ양기혁

새벽 1시 모스크바 세례메티에보 공항 도착.

그러나 다른 승객들을 따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공항 직원의 안내로 베이징으로 가는 중국인 커플과 함께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20시 인천가는 비행기를 탈 때 까지 19시간을 꼼짝없이 갇혀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 같은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환승구역 안의 여직원은 내가 탈 대한항공 비행기의 티켓팅까지 해주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영업중이었고, 잠자리가 불편할 뿐 행동의 제약을 받거나 구속받는 일은 없었다.
 
술을 좀 마시고 눈을 붙일 생각으로 카페에서 맥주를 찾던 중 wheat beer(밀 맥주)라고 쓰여 있는 크로넨부르그 블랑(Kronenbourg Blanc) 1664 맥주가 눈에 띄어 마셨는데, 과일 쥬스같은 달콤하기도 하며 특이한 맛에 반해서 금세 350ml짜리 작은 병으로 세병이나 마시고 말았다.
 
몸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잠을 잘 수가 없으니 고통스러웠다. 의자에 기대보기도 하고, 팔걸이가 없는 의자 두 개가 연결된 곳에 쭈그리고 누워보기도 하지만 넓은 터미널 안은 잠을 자지 못하게 고문이라도 하는 듯이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어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 볼 뿐 참으로 시간이 더디 가고 있었다.
   
터미널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잠자리를 바꿔가며 잠을 청하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희미한 여명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사람들이 터미널 안으로 들어와서 채워지면서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마리아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써준 번호로 신호가 갔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핸드폰에 들리는 소리는 아주 작아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스마트 폰을 다룰 줄 몰라서 그런 건지 러시아의 통신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리아와의 통화를 포기해야 했다. 상트뻬제르부르그에 가지 못한 아쉬움에 마리아와 통화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더해졌다.
    
여행하는 동안 등에 진 배낭이 무거워 기념품 사는 일을 자제했는데, 마지막으로 기념품점과 면세점도 들렀다. 러시아에서 여행하는 동안 사지 못한 마뜨료슈카 인형도 값이 싼 작은 걸로 골랐고, 러시아 문장인 황금색 쌍두 독수리가 큼직하게 그려진 흰색 티셔츠도 하나 샀다.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 주변엔 중국과 일본가는 비행기의 게이트도 인접해 있어서 오후 들어 게이트 주변으로는 동양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일본 사람들, 주변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내뱉는 중국 사람들, 그 중에도 유난히 내 귀를 잡아끄는 소리는 결코 중국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 한국 경상도 아줌마들의 목소리다. 유별나게 튀는 그 목소리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 거부감도 느껴진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다되었고, 여행은 끝났다. 러시아여행은 반쪽자리가 되버렸고, 생각지 않았던 노르웨이 여행은 과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부담스럽다.
  
그런데 무르만스크 세관에서 나에게 부과한 벌금 3천 루블을 아직까지 내지 못했다. 그 벌금은 내가 비자를 다시 받아서 러시아에 들어간 다음 러시아 은행에 내야 했는데, 러시아에 들어갈 수 없었고, 따라서 벌금도 낼 수 없었다. 벌금 내러 러시아엘 다시가야 할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여행기를 정리하기 시작할 즈음, 미국의 전CIA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란 사람이 망명지를 찾아가기 위해서 모스크바 세례메티에보 공항에 도착하여 터미널 환승구역에 머물고 있다는 뉴스가 신문 국제 면을 장식했다. 며칠 전 내가 오슬로 공항을 출발하여 들어갔던 세례메티에보 공항 환승구역은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국제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만 하루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머물렀지만 나에게 세례메티에보 공항은 크로넨부르그 블랑 맥주의 달콤한 맛과 잠 못 드는 새벽녘 대합실 의자에 기대어 고통스러웠던 추억으로 남아있고, 마리아와 통화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기도 했다. 

(여행 중 찍은 사진 중에 여러 장이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 중 소실되어 버렸고, 특히 노르웨이에서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없어져서 아름답고 멋진 장면들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끝.  /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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