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먼 하늘로 날려 보낸 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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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칼럼> 연북정은 송매죽의 혈맹결의를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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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북정. 사진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문학작품 속의 연북정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여기로 오라/ 내  책상다리를 하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가끔은 소맷자락 긴 손을 이마에 대고/ 하마 그대 오시는가 북녘하늘 바다만 바라보나니/ 오늘은 새벽부터 야윈 통통배 한 척 지나가는가/ 새벽별 한두 점 떨어지면서 슬쩍슬쩍 내 어깨를 치고 가는가/ 오늘도 저 멀리 큰 섬이 가려있어 안타까우나/ 기다리던 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신다기에/ 연북정 지붕 끝에 고요히 앉은/ 아침이슬이 되어 그대를 기다리나니/ 기다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느냐/ 그대의 사랑은 일생에 한번쯤은 아침이슬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갖게 되기를’ -정호승(鄭浩承)의 시 「연북정(戀北亭)」  
  
‘북쪽 언 하늘로/ 날려 보낸 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허공 그 어디쯤에서/ 꽁꽁/얼어붙었나 보다// 아니면 어디 험한 곳/ 헛발 디뎠나 보다// 달콤한 혀는 늘 가까이 머물고/ 뼈 있는 말은/ 멀리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 별로 다르지 않다//  새를 자꾸 날려 보내는 뜻은/ 아직도,/ 심장이 붉기 때문이다’ -김광렬(金光烈)의 시 「연북정(戀北亭)에서」

김시태(金時泰)의 제주4․3항쟁을 다룬 장편소설 <연북정 1,2>(도서출판 善)는 작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 조천에서 일어난 제주4․3항쟁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낀 실제체험이 오롯이 녹아 있다. 

어린 시절 작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연북정(戀北亭)과 만세동산은 그때 그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들의 정신적 분위기가 어떤 모호한 형태로나마 작가의 한 구석에 뜨겁게 남아 숨 쉬고 있다.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연북정과 만세동산은 조천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우리 시대 처참했던 역사의 자취가 숨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정국, 그때 그 젊은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의 사랑과 열정과 고뇌, 조절과 운명은 대체 어떻게 전개되는가? <연북정>은 작가의 고향인 조천에 있었던 '조천중학원'을 주춧돌로 하여 제주4․3항쟁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슬픈 이야기다. 그때 조천중학원에 있었던 사람들은 서울이나 일본 유학생 출신의 교사들과 나이와 출신이 다른 학생들이 함께 모여 혁명과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이덕구(李德九)는 조천중학원 교사였으며, 김봉현(金奉鉉)․김민주(金民柱)의 『濟州道(제주도) 人民(인민)들의 4․3武裝鬪爭史(무장투쟁사)』(일본 문우사, 1963)의 공동저자 김민주는 이덕구의 제자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딸인 '지인숙'과 해녀의 아들 '김현준'. 이 둘은 조천중학원에서 만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는 연인 사이다. 하지만 그 둘이 살아가는 시대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미군정시대이자 이승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이루어지는 어지러운 시대다.

해방공간에서 현준과 인숙의 아름다운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숙은 "널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보이고 교회가 보였어, 이건 처음 느껴본 경험이야, 난 지금 떠나지만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라는 쪽지를 남기고 현준의 곁을 떠난다.  

현준은 인숙이 남긴 쪽지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치미는 슬픔과 그리움을 어쩌지 못한다. 특히 "이제 난 확신을 갖고 가게 되었어, 누군가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꿈을 잃지 않았고, 내일이 있고, 희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이란 내용의 쪽지는 목이 메도록 서럽다. 제주4․3항쟁에 뛰어들었던 인숙의 행방이 묘연하게 되고, 현준은 항쟁 주모자로 낙인 찍혀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현준과 인숙의 아름다운 사랑도 역사의 소용돌이가 가차 없이 빨아들이고 만 것이다. 1945년 광복 뒤, 이승만 정권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한 미군정... 그리고 이에 항거하여 떨치고 일어난 제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 제주4․3항쟁의 뿌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을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주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면서 그 시발점이 되었다.  

북쪽 임금을 기리던 ‘연북정’ 

예로부터 ‘머리 좋은 조천, 힘 좋은 대정, 배짱 좋은 중문, 입심 좋은 애월’이라는 말이 있다. 조천(朝天)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하늘’, ‘뭍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일기를 예측하던 풍향관측소 ’조천관(朝天館)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과거 내륙을 왕래하는 제주의 관문은 조천포구와 화북포구였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중앙이나 지방 관리들이 공무로 출장을 다닐 때 머물며 숙식하던 관아 건물이 있었다. 특히 조천은 육지를 오가는 배가 출항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조천관이 세워졌다. 조천관은 부산, 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三館) 중 하나로 제주목(濟州牧)의 출입 항구였다.

연북정(戀北亭)은 유배객들이 제주도의 유일한 관문인 조천포구로 드나들면서 임금에게 네 번 절을 하며 떠나가던 곳. 더불어 조천이란 이름은 임금에게 조알한다는 뜻이며, 연북정의 '북'(北)과 조천의 '천'(天)은 곧 임금을 가리키는 글자다. 화북(禾北)과 함께 가장 오래된 항구로, 육지로 연결되는 관문이었다. 

제주로 부임하는 관리, 귀양살이 오는 유배객, 육지를 오는 장삿배 모두 이 항구로 들어왔고 떠났다. 조천진(朝天鎭)은 제주에 있던 9개의 진지 중 하나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조천관을 세웠다는 것이 가장 오랜 기록이다. 아마도 왜구가 창궐하여 이들이 쳐들어 올 때를 대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 위에 망루를 짓고 쌍벽정이라고 했는데 선조 23년(1559)에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다시 건물을 수리하고는 정자 이름을 연북정이라고 바꾸었다. 연북에서 북이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에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현재도 조천포구에는 넓은 성곽과 높은 성루가 있고, 그 위에 아름다운 정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1971년 8월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연북정이다. 원래 조천진성(朝天鎭城) 바깥에 있는 객사(客舍)로서 처음 축조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590년(선조 23) 절제사 이옥(李沃)이 조천진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은 다음에 그 위에 옮겨 세워서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다. ‘쌍벽’은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다는 뜻으로 제주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이름에 담았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당시 ‘용(龍) ·가경이십오년경진이월십오일진시입주상량(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入柱上樑) · 호(虎)’라 한 명문(銘文)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연북정은 가경(嘉慶) 25년, 즉 순조 20년(1820) 마지막으로 보수된 듯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찰관 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매죽(松梅竹) 혈맹결의(血盟結義)의 장소

1910년 김명식(金明植:1891~1943)은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 현 경기고등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義興學校)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話頭)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정하여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김명식은 1914년 4월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하고, 1919년 2.8독립 선언에도 참여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을 게재, 이는 제주의 첫 시인(詩人) 김지원(金志遠:조천)이 시단에 데뷔한 해 보다 5년이나 앞선 것이다. 

1922년 1월에는 신생활사 이사 겸 주필에 취임하여 월간지「新生活」을 발행하였다. 동년 11월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글을 게재하였다는 혐의로, 사장 박희도와  기자 신일용(辛日鎔), 유진희(兪鎭熙)와 함께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항소를 포기하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동년 7월 지병으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때부터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신생활사 재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 하여 많은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이 이 사건을 언론 탄압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뒷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조선인 노동 운동을 부추기었다는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일제는 1930년 6월 17일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 소위 필화(筆禍)사건의 잔여 형기를 복역하도록 투옥시킨 것이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김명식은 1932년 이후 잡지 「批判」에 "조선종교론"과 "민족단체 재건계획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 또 오사카에서 1936년 5월 동향의 동지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이 옥중의 여독으로 순국하자 "목우를 곡(哭)함"을 민중시보(1936. 6. 21)에 게재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나 1941년 4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제1차 대전 후 세계사"라는 글을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제2차 대전을 예언한 뒤에 이후 붓을 멈추었다. 1943년 산북 세화(細花)리 1289번지에서 사망하였다.  

송산의 큰아들 김갑환(金甲煥:1914년생)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1928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 4월 화학노조 간사이(關西)지부를 확립,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1월 가와가미(川上謙一郞)의 소개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하고 전협(全協)화학노조 플랙숀으로 활동하던 중 동년 5월에 검거되고 8월에 기소되었다. 1934년 9월 15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송매죽의 한 사람인 홍두표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실력을 길러 국권회복운동을 도모하고자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허로증으로 동경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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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순흠은 사회주의 운동가 고경흠(高景欽) 8촌 형이다.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나왔다. 또한 1920년 4월에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1924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였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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