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량 열사 조카 부성주씨 "해녀항일운동 주역들 공적 인정돼야"

"생전 아버지께서는 '참 훌륭한 사람을 동생으로 뒀다'고 늘상 얘기하곤 하셨죠. 고모님이 애국지사로 선정됐을 때도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로 너무나 흐뭇해 했습니다."

부덕량 열사.
부덕량 열사.

제주해녀항일운동 주역인 부덕량 열사(1911~1937)의 유족 부성주(77)씨는 2005년 고모가 애국지사로 선정됐을 당시를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그의 부친의 동생이 바로 부덕량 열사다.

부 열사는 22세의 나이로 당시 제주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착취 행위에 규탄하는 항일 시위 운동을 주도한 해녀다.

1932년 1월 7일과 12일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터와 경찰주재소 앞에서 1000여명의 해녀들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일본 경찰에 맞서는 시위를 벌였고, 그 최전선에는 부 열사가 서 있었다.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동료 해녀인 부춘화, 김옥련 열사 등과 함께 일본인 제주도사(濟州島司)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같은해 1월 24일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체포돼 6개월간에 옥고를 치렀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부 열사는 옥고를 치른 후 건강이 악화돼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부씨는 "고모님은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을 하고 출옥할 당시에 병을 얻고 나왔다. 몸이 좋지 않아 부친의 집에서 생활을 했다"며 "몸이 안 좋아져서 결혼도 못해보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고모인 부덕량 열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부성주씨.  ⓒ제주의소리
고모인 부덕량 열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부성주씨. ⓒ제주의소리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늘 '훌륭한 동생을 뒀다'고 얘기하곤 하셨다. 너무나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늘 자랑스럽게 얘기를 해 온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 열사 외에도 해녀항일운동의 주역들이 제대로된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씨는 "고모와 함께 한 고차동, 김계석 해녀는 옥고를 안 치러 근거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애국지사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반드시 뒤늦게라도 공적을 인정받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또 "훈장을 추서 받았으면 국가가 그 공로를 인정한 것인데, 직계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보상이라는게 전혀 없다는 점은 아쉽다"며 "대통령이 애국지사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 만큼 묘 관리나 제사를 지내는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한 조치가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부덕량 열사의 흉상.  ⓒ제주의소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부덕량 열사의 흉상.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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