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서북청년단, 반공 이데올로기에 파묻힌 극우 폭력집단

1946년 서울, 백색테러 단체의 탄생

선우기성
고은

해방 뒤 38선 이북은 일제 잔재 청산이 있었다
행정에 필요한
일제 하급 공무원은
우선 활용했으나
악질 친일파로 숙청당한 사람들 많고 많았다
숙청을 피해
38선을 넘은 사람들 많았다
1946년부터 38선은 생사의 경계였다
넘어와
북의 공산당에 이를 갈았다
남의 현실에 환멸이었다
혼란
굶주림
무직
올 데 갈 데 없었다
안 되겠다 뭉쳐보자
평남년회
평북청년회
함북청년회
함남청년회
황해청년회 들 통합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바쳤다
나는 선우기성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손가락이다
오늘도 이승만의 주먹 두 개를 쥔다
서북청년회 지도자 선우기성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 쟁취
균등사회 건설
세계 평화의 건설
서북청년회 3대 강령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자주와
평등
평화가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철저한 반공노선
회원 6천명
첫 투쟁은 좌익단체 습격
백색테러가 시작되었다
유혈낭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 첩보보조원으로
38선도 넘나들었다
김일성 별장도 습격했다
선우기성
점점 살벌해졌다
인간보다 비인간이 더 치열했다
38선 이남이 떨어댔다
모든 도시들
모든 촌락들
선우기성의 밤뿐 아니라
뭇 사람들 겁먹은 눈에 다 드러나는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댔다

서북청년단(North 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西北靑年團)은 월남한 청년들 중심으로 결성된 반공 이데올로기의 극우 조직이다. 원래 명칭은 서북청년회이다. 그들은 늘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좌익이 날뛰는 남한의 현실이 늘 불안했다. 남한마저 공산당이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갖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단체로 뭉쳤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YMCA 강당에서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초대단장으로 ‘서북청년회’를 창단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의원 500명이 참석하였다. 선우기성이란 인물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백색테러의 지휘자였다.

서북청년단은 주로 친일파나 지주,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로 구성돼 있었다.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쳐 나온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치를 떨었다. 출신지에 따라 각각 평안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청년회 등을 구성한 뒤 좌익을 쳐부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려갔다. 서울 후암동·아현동·금호동 등 야산에 돌과 나무로 대충 집을 지어 살았다. 

미군정과 한민당 등 우익 세력은 서북청년단의 탄생이 반가웠다. 이들은 좌익에 대적하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청년 단체를 필요로 했다. 광복 이후, 38선 이남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좌익은 박헌영의 조선노동당을 필두로 학원계(전국학생동맹)·노동계(노동조합전국평의회)·농민계·법조계·문학계 등을 손에 쥐고 있었고, 우익은 지리멸렬했다.

1946년 12월에는 회원 수가 6000명에 이르렀다. 서북청년단에게 은밀하게 접근한 이들이 미군정과 집권을 노리던 이승만(李承晩), 그리고 반공을 내세우며 친일경찰을 비호하던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장택상(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이었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의 보호와 자금 지원을 받게 된 서북청년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이 주로 한 일은 ‘빨갱이 사냥(Red-hunt)’이었다.

서북청년단은 소련군정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세력으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대구노동자파업,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4.3사건에 개입하여 20~40만 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서북청년단은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했다. 예컨대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 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저지시킨 부산극장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서북청년단이 적으로 노린 대상은 좌익 인사만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주의자·항일운동가·독립운동가도 좌익으로 몰았다. 상당수 처녀가 서북청년단 단원에게 겁간당하고 일부는 자살했다. 아녀자 중에는 그들의 아내가 되어 일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비의 가족으로 지목된 양민을 공개 총살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4.3평화공원 상설전시장 내용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과 서북청년회 부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문봉제(文鳳濟)는 서북청년단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서북청년단에 대해 “우리의 배후엔 이미 당시의 군정 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나오고 있다”거나, “경찰을 행동의 배후라고 한다면, 돈암장은 정신적인 배후”라고 말하기도 했다.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돈암장을 찾았고 이승만으로부터 격려금과 거사 자금을 수시로 받았다. 

서북청년단은 1948년 12월 공식 해산했다. 이승만 대통령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승만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당시 우익단체 40여 곳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북청년단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대다수 단원은 군에 입대해 반공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한국전쟁 전후로, 서북청년단원들은 육군정보국, UN군 유격대 KLO부대, 한국군 유격대 호림부대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일부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5기와 8기로 입학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 되고, 일부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창립 구성원이 됐다.

한편, 2014년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하면서 사회적 우려를 높이기도 했다. 이 단체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이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극우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에 올려 사회적 비난을 받은 데 이어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를 위한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극우개신교의 뿌리 서북청년단

서청청년 단가

우리는 서북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아가 나아가 38선 넘어 매국노 쳐버리자
진주 같은 우리 서북(西北)이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밝힌 꽃봉이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서울)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의 본거지였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만들었고, 제주4.3사건에 토벌대로 참가해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 ‘서북청년 단가(團歌)’는 한경직(韓景職)이 지어 줬다. 서북청년단에서 감찰부장을 지낸 '시라소니' 이성순이 영락교회 집사였고 나중에 장로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영락교회와의 연결 고리를 한경직이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 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吳制道) 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蔡命新) 장군, 그리고 이세호(李世鎬)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락교회 청년들이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를 습격한 일도 있었다. 기독교민주동맹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金昌俊) 목사가 좌익 기독교인을 결집해 만든 조직이다. 영락교회 청년들을 포함한 우익 단체들은 1947년 2월, 창립총회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소재 시천 교당을 습격해 난투극을 벌였다.  

서북청년단은 제주4.3사건에서 토벌대로 참여한 일을 '하이라이트'로 여긴다. 한경직은 회고록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무장대 진압에 가담했다고 밝힌다. 그는 1951년 전쟁을 피해 교인 350여 명과 미군 상륙함을 타고 제주도로 온다. 미군정이 군사작전 일환으로 영락교회 교인을 활용했다. 교인들은 제주도 피난민 마을에서 3년 반을 천막 생활을 했다.

특히 영락교회와 서북청년단은 지역 기반부터 동일하다. 둘 다 '서북'이라고 불리는 평안북도에서 월남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다. 서북청년단은 평안도 동향인 모임 평안청년회를 주축으로 만들어졌고, 영락교회는 평북 신의주에서 월남한 교인들이 세운 교회다. 당시 영락교회를 두고 "서북사람 신앙공동체"라고 했다.    

한경직은 교인들의 반공 활동을 기독교 신앙으로 받쳐 줬다. 서북청년단이 발족하고 반공 활동이 한창 격렬했던 1946년과 1947년 사이, 그는 교인들이 반공 활동에 나서도록 적극 부추기는 듯한 설교를 했다. 그는 올바른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정치 운동, 사회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경직은 1947년 4월 20일 설교에서 "공산주의 이야말로 일대 괴물이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인가?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인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월남 기독인들에게 반공은 마치 신앙과 같다. 월남 기독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좌익 단체 적위대(赤衛隊)와 싸우면서 남으로 내려온 이들이다. 전통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했던 이들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려 했다. 

한경직과 영락교회, 서북청년단의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과 한국교회에 남긴 불행한 유산들! 빨갱이란 말은 한경직과 서북청년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행한 언어가 아닌가! 서북청년단회원증을 소지한 사람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법적으로 처벌을 면하는 사면증처럼 활용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제주4.3에 불어 닥친 반공청년들의 광기

1946년 8월 1일부터 제주도는 도제(道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끝나고 행진하는 과정에서 기마경관의 말이 어린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민들은 항의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이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였다. 이 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는 '3.1절 발포' 사건 이후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열흘 뒤인 3월 10일,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관공서뿐 아니라, 공장·회사·학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이에 맞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대거 내려 보냈다. 

3.1절 발포 사건은 4.3사건으로 가는 도화선이 됐다. 1947년 3.10 민·관 총파업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한다. 한 달 후 4월 10일, 유해진(柳海辰) 신임 제주도지사가 제주항에 발을 내렸다. 초대 박경훈(朴景勳) 도지사는 3.1 발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상태였다. 유해진이 서북청년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서북청년단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되어 남로당이 봉기를 결심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미군 보고서에는 유해진이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로 표현되어 있다. 미군 감찰관은 그에 대해 "반대파를 다루는데 무자비하고 독단적"이라고 보고했지만, 윌리엄 딘(William Frishe Dean)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군정장관은 계속 그를 신임했다.

1947년 9월부터 우파청년단체들이 조직을 강화하는데 유해진 도지사와 미CIC의 역할이 컸다. 미CIC 요원들이 제주도에 상주한 것은 3.1사건과 3.10총파업 직후인 1947년 3월 중순께였다. 그 해 3월 21일 제출된 ‘제주 우익정당이 허약하다’는 내용부터 시작됐다. 제주CIC는 1948년 말에도 계속 운영된다. 미CIC는 1947년 12월에 의미심장한 첩보 보고를 한다. 그것은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것.” 

그해 11월 2일 서북청년단 제주도단부가 결성됐다.  제주극장에서 서청단원들이 모여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 부위원장에 박병준(朴炳俊) 등을 선출, 결속을 다졌다. 4.3 발발 직전까지 제주도에서 활동한 서북청년단 규모는 500~700명으로 추산된다. 1948년 4월 3일 직후, 서북청년단은 조병옥 경무부장 요청을 받고 단원 500명을 급파한다. 이후에도 11월과 12월 사이 단원 최소 1000명 이상을 경찰 혹은 경비대 자격으로 제주도에 파견했다.

서북청년단의 위세는 날로 커졌고 만행은 갈수록 심해졌다. 서북청년단은 지리멸렬했던 이승만과 우익 세력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이승만과 신성모(申性模) 내무부장관은 1948년,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한국군에 6500명, 국립 경찰에 1700명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경비대 9개와 각 경찰청에 배정됐다.

‘작년 3․1학살사건에 뒤이어 3․22총파업이 있은 뒤 이에 경악 전율한 매국 반동세력은 경찰 사법 등 일체의 권력기관에서 양심적인 사람을 모조리 내쫓고 흡혈귀와 같은 악질도배 서북인들로써 그들의 진용을 정비하여 도민폭압의 토대를 쌓았다. 그놈들은 전 도민 27만 중 8만은 남로당원이라고 말하며 제주도의 청장년은 닥치는 대로 무단히 검거 구타하면서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내놓으라고 족쳤다. (중략) 그러나 매국 반동세력은 서청원(서북청년단원)을 매 부락에 10명 내지 20명씩 배치하고 기금을 내라, 담요를 내라, 밥을 내라 하여 인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죽도록 두들기고 부수고 하여 실로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인민들은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 노력인민(남조선로동당 기관지) 1948년 6월 3일 기사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塞)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허락 없이,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는가? 군은 서북청년단 단원들로 특별 중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제9연대 송요찬은 단원 88명을 특별 중대로 꾸려 9연대에 편제했다. 송요찬이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켜 '이들에 대해 터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했다.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4.3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극우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공산주의에 먹힌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극우 개신교가 생존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북에서 이런 경험을 가진 그들은 정치·생존적 입장으로 5.10 선거를 만났다. 

서북청년단을 사주한 이승만과 조병옥은 모두 개신교 교인이었다. 서청 단원들 역시 대다수는 공산당 탄압을 피해 내려온 서북 개신교인들이다.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반공은 단순히 사상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과 ‘사탄’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북청년회 집회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4월 20일 서울 경무부경찰공보실이 발행한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이라는 책자를 통해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영불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 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 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 좌우 맥락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 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 자제들이었다.

백범 김구(金九)를 암살한 안두희(安斗熙)가 남한으로 월남한 후 처음 접한 것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에 가입해 김구 암살을 계획하던 이승만의 측근들을 알게 된다. 김성주(金聖柱)는 이승만을 추종하다가 돌아선 인물이다. 그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재판이 열리자 서북청년단을 이끌고 안두희가 애국충정의 의사라고 외치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지금도 활개 치는 극우개신교

“‘미국’은 우리와 동등한 ‘동맹’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 고난 받는 대한민국을 구원하기 위해 온 ‘구원자’다. 미국을 ‘구원자’로 믿는 신앙은 개신교가 이승만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우고, 반공의 기치를 들고 독재정권과 함께하며 성장해오면서 계속된 믿음이었다.”

-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극우개신교… 미국은 ‘동맹’ 아닌 ‘구원자’, 권종술 기자, 민중의소리, 2019.4.18.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이고, 우리나라를 구원한 나라임을 강조하는 설교는 극우 개신교 목사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현재의 극우 개신교는 집회에서는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등장한다. 그들이 들고 나온 태극기는, 대한민국은 친미를 선택할 때만 제대로 된 국가일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극우화된 종교 세력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음을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서북청년단’이다. 

북의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을 중심으로 있었던 개신교 신자와 목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토지개혁 등 조치에 반발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남으로 내려와 남한 보수 개신교의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영락교회와 해방촌교회 청년 등이 중심이 돼 서북청년단이 만들어졌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가 탄생했고, 대통령은 극우 인사인 이승만이었다. 한데 미군 자료에서 테러 집단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집단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서북청년단은 대중의 학살에 가담한 가장 잔혹한 테러리스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한 전체는 모두가 서로를 증오하는 적개심의 화신이 돼 갔다. 이른바 증오의 프레임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서북청년단의 쌍둥이 같은 단체가 서북학생총연맹이다. 월남한 청년들 다수가 북한 지역의 학력을 인정받아 대대적으로 편·입학을 했는데, 이때 학력인정서 발급 단체가 서북청년단이었다. 월남한 이가 남한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면 서북학생총연맹에 속해야 했다. 이 단체 결성의 이유는 남한의 학교가 좌익으로 들끓고 있으니 그들을 소탕하기 위함이었다.

개신교계는 서북 인맥이 극우화를 주도했다. 한경직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계 교회 지도자들은 서북청년단의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다. 그가 한국 개신교의 절대 1인이던 1950년대 남한 개신교는 전반적으로 극우적 장로교의 닮은 꼴로 변신했다. 1989년 창립한 한국기독교총연맹은 민주화 시대에 한국사회의 극우화 담론을 이끌었고 그런 활동 단체들을 후원하는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 단체도 서북계 인사들에 의해 창립됐다. 

김관후.

한국 개신교 내에는 다양한 정치·신앙 성향을 지닌 집단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유독 '극우 성향'을 지닌 이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중도 우파에 가까운 문재인 정부를 주사파·빨갱이로 몰아붙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앞세워 반동성애·반이슬람을 외친다. 뿐만 아니라 여성·성소수자·난민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에도 사사건건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복음주의를 표방한 극우 '반지성적 집단'에 의해,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목사의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더 정확히는 겁에 질리거나 귀찮은 것이 싫어 스스로 입에 자물쇠를 달았다.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의 이웃 사랑을 가슴에 담고 실천한다고 해도, 이 자물쇠를 풀지 못하면 극우적 병폐라는 싹은 한국교회에 계속 돋아날 것이다. / 김관후 시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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