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人터뷰] 명절-연말마다 익명 기부해 온 ‘노고록아저씨’

“참 힘들고 어렵게 살았어요. 너무 힘드니까 부모님이 ‘혼번이라도 노고록허게 살아봐시민’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편안하고 행복하게, 여유있게 살고 싶은 소망이었던 겁니다. 개인적 소원이기도 하고 모두의 소원이기도 한 ‘노고록’한 삶을 모두가 살았으면 해요.”

노고록-ᄒᆞ다 : (형) 사람의 성질이나 물건 따위가 여유롭다.

제주어사전에 나온 ‘노고록 하다’의 정의다. 갈등 없이 평온하게, 조금이라도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과거 거친 땅을 일구며 힘들게 살아온 제주인의 소망이 서린 단어다. 

24년째 익명으로 기부를 이어온 일명 ‘노고록아저씨’는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노고록한 인생’을 바라는 우리네 이웃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노고록’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은 기부 때마다 ‘노고록허게 보내라’는 글귀를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 소녀가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익명으로 후원한 ‘키다리아저씨’ 이야기처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주변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제주 ‘노고록아저씨’ 이야기는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사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서귀포시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알려지지 않은 ‘노고록아저씨’를 [제주의소리]가 수소문 끝에 만났다. 익명으로 기부를 이어온 고귀한 그의 뜻에 따라 단서가 될만한 사실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24년째 익명으로 기부를 이어오고 있는 '노고록아저씨'는 가까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작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주의소리
24년째 익명으로 기부를 이어오고 있는 '노고록아저씨'는 가까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작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주의소리

노고록아저씨의 기부는 가족조차 모르게 진행 중이다. 2000년부터 기부를 시작한 그는 설과 추석, 연말마다 주민센터에 쌀을 기부해오고 있다. 어르신들의 경로잔치와 교육발전기금으로도 돈을 내놓았다. 

24년째를 맞은 올해까지 그가 기부해 온 양을 단순히 금액으로만 계산하면 대략 2억5000만원 정도 된다. 돈으로는 매길 수 없는 따뜻한 마음과 24년을 이어온 기부 정신을 더 한다면 그 고귀한 값어치는 가늠할 수도 없다. 

돈이 많아서 기부한 것도 아니었다. 사치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그는 국가로부터 받은 연금과 자녀들에게 받은 용돈, 소일거리로 조금씩 번 돈을 아꼈다. 그리고는 지역사회를 위해 그렇게 아낀 돈을 ‘펑펑’ 썼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대로 쓴 돈”이다.

그가 기부하기 시작한 건 2000년이지만, 그 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 ‘기부’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살았다.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청년 시절 그는 큰 병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투병 생활 중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시련도 닥쳤다.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 했다는 자책에 하루 하루가 고통이었다. 

애써 고통을 누르며 악착같이 살아온 그는 수년 뒤 또다시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상실감에 빠져 인생을 돌아보게 된 그는 억울하고 슬픈 인생의 한을 남을 도와주는 일로 풀겠다며 기부를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노고록아저씨는 부모님께 다하지 못했던 효도를 해야겠다며 가까운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기부부터 시작했다. 쌀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각종 어르신 잔치에 돈을 보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돈이 많아 기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고록아저씨는 돈을 빌리면서도 기부를 이어나갔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빚내면서도 (기부를)이어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했다.

익명으로 기부를 해온 이유를 물으니 “조용히 살다가 죽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기부라며 이름을 내걸 정도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성품 자체가 조용히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 그렇다고도 했다.

이어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기부해온 건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부는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할 있다며 돈이 없어도 돈 많은 사람 못지않게 ‘돈을 잘 쓰고 있다’는 긍지가 생긴다고 부연했다.

노고록아저씨가 쌀을 기부하며 보낸 메시지. ⓒ제주의소리
노고록아저씨가 쌀을 기부하며 보낸 메시지. ⓒ제주의소리
노고록아저씨는 올해 설 명절에도 이웃을 위해 10kg 쌀 100포를 선뜻 내놨다. 사진=서홍동주민센터. 
노고록아저씨는 올해 설 명절에도 이웃을 위해 10kg 쌀 100포를 선뜻 내놨다. 사진=서홍동주민센터. 

그는 최근 영국 자선지원재단(CAF)가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기부지수’에서 한국이 119개 나라 중 88위에 머물렀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나라 기부지수가 너무 떨어져 안타깝다. 그나마 최근 젊은 세대의 기부가 조금씩 늘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며 “서로 도와가는 사회를 만들려는 마음을 모두가 가졌으면 한다. 좁게는 서귀포시만이라도 기부문화 확산 노력에 열을 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고 싶은 걸 다 사면 남을 도와줄 돈이 생기진 않는다. 남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조금만 절약하면 기부는 누구나 가능하다”며 “가까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작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각종 선거에 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평소에는 이웃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선거철만 되면 생색내는 사람들이 있다며, 평소 남을 도우면서 곱게 살고 실력을 쌓는다면 당선될 확률이 훨 높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생활화된 기부, 봉사가 중요하단 의미다.

노고록아저씨는 ‘강토이주(江吐二珠)’ 이야기를 꺼냈다. 한 형제가 길을 가다 주운 구슬을 서로 양보하다 도랑에 빠뜨려 잃어버렸지만, 되레 그 도랑에서 두 개의 구슬을 주워 부자가 돼 잘 살았다는 설화다.

그는 “강토이주의 이야기처럼 이웃이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도와 화목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며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나도 힘닿는 데까지 기부하고 또다른 봉사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고 했다.

어렵게 살아보니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노고록아저씨. 주위의 이웃을 보살피며 조금이라도 ‘노고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다. 기부문화가 제주 전역에 퍼졌으면 한다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겨울 추위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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