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23)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분발해야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기적이다.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공들여 쌓은 나라의 틀을 무너뜨리는 데는 순식간이다. / 사진=픽사베이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기적이다.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공들여 쌓은 나라의 틀을 무너뜨리는 데는 순식간이다. / 사진=픽사베이

가을이 깊었다. 아침저녁으로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젊었을 때는 가을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허름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밤새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서울의 가을은 더욱 아름다웠다. 늦가을 밤 선배나 친구들과 같이 돌아다니며 폭음했던 광화문의 선술집이 그립다. 같이했던 그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은 가을밤이다. 아, 그때는 가을이 왜 그렇게 좋았던가. 나이가 들어서 맞는 가을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애잔함이랄까, 애상이 안개처럼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살처럼 흐른 세월에 그리움과 씁쓸함만 남아 있다. 

코로나를 전후해서 삶의 울타리가 되어 줬던 선배, 은사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들이 가고 난 후 나만 혼자 황량한 가을 들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충신은 몰락하고 간신들만 판치는 풍전등화 앞에서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라고 탄식했다. 그 심정을 잘 알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가을,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나 세속적 가치에서 초탈해보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구 ‘사랑과 욕됨에 놀라지 마라. 그저 저 뜰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를 음미해본다. 지나온 세월, 세속에 파묻혀 사느라 아등바등 살다 보니 세속의 때를 벗겨내기가 쉽지 않다. 술만이 진리라고 떠들던 젊은 날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나에게 노스탈지아가 되었다. 이제 나는 복잡한 생각이나 세속의 가치지향을 털어내고 축소 지향적으로 단순하게 살고 싶다. 요즘 널리 회자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통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늙어 가고 싶다. 

나는 괴테의 묘비명을 좋아한다. ‘사랑했노라, 괴로워했노라, 그리고 배웠노라.’라는 묘비명은 괴테의 살아온 날에 대한 솔직한 고백 같다. 나의 삶과 겹치면서 공감을 유발한다. 괴테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인생은 보잘것없는 삶일지라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사랑했고 인생의 고통의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학생처럼 호기심이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직도 몽상이 멈추지 않은 칠십이 넘은 학생이다. 배우는 학생으로 사는 것, 이 나이에도 다함 없는 바람이고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젊은 날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그 책의 주인공처럼 ‘두려움과 충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 생각해보니 이 나이가 돼서 ‘충동으로부터 자유’는 이뤘다. 충동의 원천인 성, 돈, 권력에 집착하는 있는 리비도(Libido)가 고갈된 결과이다. 모순으로 점철된 언어의 유희라고나 할까, 일본에서는 성적 능력이 소진될 때 공평무사한 정치가 가능하다며 노인 정치를 예찬하는 무리도 있다고 한다. 매우 일리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성적인 문제로 만신창이가 된 정치인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는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디에치 로런스는 성은 ‘한 줌의 발랄한 생명력’이라고 했다. 성적인 리비도가 부족하면 발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성적인 리비도가 강한 사람만이 유의미한 정치적 업적을 낼 수 있다면 노인 정치는 거둬야 하는가? 참 복잡한 문제다. 노인이든 청년이든 정치는 지도자의 됨됨이가 중요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옛날 미국 인디언사회에서 추장을 뽑을 때, 권력 동기가 강한 인물은 선발 과정부터 제외했다고 한다. 권력 동기가 강하면 반드시 이를 남용하거나 오용할 소지가 있다는 게 이유라고 했다. 반드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은 든다. 일반화 시킬 수 있는 범주에서 간단하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제2공화국 당시 총리였던 장면(張勉) 박사와 같은 권력 동기가 약하지만 선한 인물이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목도 한 바이다. 최근 책방을 연 전직 대통령도 선한 이미지 때문에 그 자리에 올랐지만, 그 결과는 과연 만족할만했는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반드시 유능한 정치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나이가 되어서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대학생 시절이나 젊은 날에는 당국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게 되면 견딜 수 있을까! 항산(恒産)의 원천인 직장 없이도 가난을 견디며 살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 두 가지에 대한 두려움이 아마도 나를 사회개량주의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젊은 날에는 생업이었던 교수직을 떠나면 굶어 죽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념적 수준에 머문 가난이고 고문에 대한 공포였다. 어떤 심리학자는 주장했다. 관념적으로 느끼는 공포가 사실적 공포보다 더 무섭다고. 두려움을 규정하는 틀림없는 이론인 것 같다.

이제 좋은 세상이 와서 고문하는 세상은 사라졌다. 부자는 아니지만, 중산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연금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다행히 나는 연금 생활자라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연금 생활자가 되어 보니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이 나라가 이룬 성취에 감격하곤 한다. 가끔 악몽처럼 나라가 잘못되면 종이쪽지에 불과한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와도 같은 연금 증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기우에 빠진다.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나라 걱정은 젊었을 때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나라 걱정이 젊었을 때는 구체적이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포괄적이고 역사적이다. 

과거 우리가 봤던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 남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파탄은 경제가 잘못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경제를 뒷받침해주어야 할 정치가 잘못된 결과다. 경제적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경험한 국가부도 사태도 정치가 잘못 돌아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치가 제대로 순항하지 않으면 경제 안정은 있을 수 없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정치가 잘못되어서 일부 학자들이 예언하는 바대로 베트남이나 태국 수준으로 경제 수준이 내려갈 수도 있다. 걱정 반, 두려움 반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런 불안감은 우리 후대의 미래를 생각할 때 더욱 증폭된다. 

대한민국은 그간 많은 성취를 이뤘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많은 나라가 독립되었지만, 그 나라 중에 30-50 클럽에 들어간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30-50 클럽 국가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인구 조건 소득수준을 모두 충족해야만 30-50 클럽에 포함될 수 있는데 OECD 국가 중 이 두 조건을 만족하는 나라는 2019년 기준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한민국 7개국뿐이다. 

나는 젊은 날에 자학 사관에 입각, 우리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자취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려고 애쓴다. 우리나라의 미래 또한 번영과 평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통합력을 상실해가는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배회하곤 한다. 국민이 합심하여 하나로 똘똘 뭉쳐도 힘과 자본이 중심이 되는 국제사회의 격랑을 헤치고 나가기가 쉽지 않은데 작금(昨今)의 한국 정치는 국민의 에너지를 빼고 분산시키고 있으니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정치가 통합력을 견인해낼 수 있어야 연금이니 노동 개혁 같은 어려운 개혁과제도 밀고 나갈 수 있다. 권력의 힘은 통합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통합적인 리더십이다. 마키아벨리의 명제이지만 사자의 용맹함만으로는 안되고 여우 같은 교활함도 있어야 한다. 정치의 요체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성군이었던 정조나 노예해방을 주도했던 링컨 같은 정치지도자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권력 관리에 매우 교활했던 사람들이다. 정치는 김수환 추기경 같은 성직자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당의 중진, 친윤 지도부는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험지나 사지로 나가서 선거를 치를 것을 주문했다. 그 향방에 대해서 국민은 예의주시하고 있다. 로마가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에 있었다. 로마역사에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다 죽은 집정관(최고지도자)이 상당수에 이른다. 이런 지도자의 도덕적인 힘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국민의힘도 지도자들이 솔선해서 험지 출마 등 희생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정당을 지지하겠는가. 정치는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탄핵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를 탄핵한 세력은 민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이다. 당과 국민보다 일신상의 유불리만을 따지는 기회주의자들이 포진하는 한 국민의힘 혁신위의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민주당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는 사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 출신의 국회의원 중에는 개그를 하는 건지 정치를 하는 건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과거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 故 이주일 씨가 국회의원을 하면서 웃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국회에 와보니 자기 같은 직업적인 코미디언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국회의원이 많다고 했다. 코미디언이 하는 연기는 보는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라도 선사하지만, 국회의원이 하는 코미디는 국정에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일찍이 런던 시장을 지낸 리빙스턴이 임기 중에 시장직을 돌연히 사퇴하면서 “정치는 점잖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라고 했다. 그 리빙스턴이 요새 한국의 국회를 관전한다면 어떻게 평할 것인가. 거기에 적합한 말을 찾기가 어렵겠지만 막장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아닐까. 촌철살인의 대가, 버나드 쇼는 “권력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게 아니라 바보들이 권력을 타락시킨다.”라고 했다. 바보들에게 권력이라는 완장이 채워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현대사에서 그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당도 평판을 갉아 먹는 소모적인 정쟁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적 허무주의와 진영정치만을 갖다 주는 한국의 정치, 그 정치를 두고는 국민 간의 통합도 정치적 안정도 이룰 수 없다. 어느 기업인이 살아 계실 때 한국의 정치는 삼류라 했다. 그 평가가 가슴 아팠던지 그분은 YS에게 혼쭐이 났다고 한다. 김영삼도 그 기업인도 저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의 한국 정치가 삼류를 면하고 있는가. 오히려 더 후퇴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대학 교수할 때 학점이 매우 짠 교수로 악명이 높았다. 내가 지금의 한국 정치를 평가한다면 삼류도 아니고 사류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분발해야 한다.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그 이유를 늘 가슴에 새기고 정치를 해야 한다. 사명이 부족한 정치는 감동도 줄 수 없고 어떠한 성과도 낼 수 없다. 정치가의 수준이 한국의 미래를 결정한다. 대한민국호의 키를 잡은 사람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기적이다.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공들여 쌓은 나라의 틀을 무너뜨리는 데는 순식간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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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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