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31) 모든 것이 과잉인 우도...자연이 밑천인데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시인 이생진은 우도를 이렇게 노래했다.

지난해 연말에 우도 초등교육 100년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우도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직접 만들었다. 대단한 일을 우도의 자생적 힘으로 일궈냈다. 책 속에는 우도 교육 100년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우도의 삶과 생활양식 등에 대한 소중한 자료도 담고 있다.

과거 우도는 매우 가난한 섬이었다. 대부분 농사와 어업을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척박한 토지, 거친 파도, 살을 에는 바람, 혹독한 가뭄 등과 운명처럼 부딪치며 살았다. 화산회토라 농사가 잘 안되어 식량은 늘 부족했다. 그나마 비교적 풍부한 어장이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러한 혹독한 자연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도 사람들은 “마을 단위로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연대의 힘을 일찍 터득했다. 그래서 마을 중심의 공동체가 잘 운영되었다. 그 정신이 공동체주의이며, 그 운영 원리가 ‘수눌음’이다. 그 안에는 사람 간의 신뢰와 협력이라는 삶의 에토스가 자리잡고 있다.

우도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우도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과거 우도에는 영장계, 목장계, 이엉계 등 다양한 형태의 수눌음 문화가 존재했다. 값지고 소중한 무형자산이다. ‘학교 기성회 바당’은 바로 그 공동체 정신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해녀들은 여기서 채취한 전복, 해삼 등을 팔아서 모은 돈으로 학교 건축비를 충당하고, 교사 월급도 일부 부담했다. ‘학교 바당’과 같은 공동체주의 사례들은 오늘날까지 우도 주민들에게 큰 자부심이 되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우도 초등교육이 100년을 이어오게 한 힘이었다. 그 기저에는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교육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우도민들의 확고한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우도 교육의 불꽃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헌종 8년(1842년), 이원조 목사가 조정으로부터 우도에 대한 입경 허가를 받은 후, 이주민들이 우도로 들어왔다. 이주민들은 우도에서 농경과 어로 활동을 하며 삶의 터전을 일궈 나갔다. 이런 가운데서도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컸다. 여기에 우도 개척자인 김석린 진사의 지도력이 더해지면서, 우도에 서당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는 근대화된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문 외에도 일본어와 산술까지 가르치는 ‘양명의숙’이 개설되었다. 우도의 양명의숙은 160여명의 학생이 다닐 정도로, 제주에서는 당시 규모가 가장 큰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제주시나 육지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고 귀향한 지식인들이 훈육을 맡았다. 그야말로 나라는 잃었지만, 아름다운 계몽의 시대였다.

그 후, 우도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토지와 자금을 모아 ‘양명의숙’을 모태로 한 정규학교인 사립 ‘연평 심상소학교’를 세웠다. 우도 주민들의 뜨거운 땀과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었다. 이 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연평초등학교’로 개명되었고, 1954년에는 ‘연평중학교’가 신설되었다. 1981년에는 병설 유치원이 개원되었고, 학생 수 감소로 인해 2000년 3월에는 ‘연평초·중학교’가 ‘우도초·중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오늘의 우도를 만들어 낸 힘은 교육이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수돗물도, 전기도, 교통수단도 전무했던 낙도의 작은 섬 우도였지만, 배움을 향한 열망만큼은 대단했던 섬이었다. 교육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우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쾌척하여 세운 사설 ‘양명의숙’은 지식 함양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몽의 진지가 되었다. 고태주, 강관순, 신재홍, 김성오 등이 교사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모두 우도 출신 지식인이다. 그중 고태주는 일찍 광주농고를 나와 평생을 우도 초등교육에 힘썼고, 해녀 노래의 작사자인 강관순도 제주농고를 졸업했다.
우도는 제주도에서 야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병행했다. 야학에서 제주 해녀들은 단순히 글만 배운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여성으로서, 바다를 일터 삼아 일하는 노동자로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영향으로 1932년에 일어난 제주 해녀항일운동 때, 우도의 해녀들은 주력 부대로서 큰 역할을 했다. 우도의 300명 해녀들은 해녀 투쟁 본거지인 세화리 장에 5일간의 양식을 준비하고, 호미와 빗창을 들고 열 척의 풍선에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넜다. 우도의 그 많은 해녀가 배를 타고 거사 장소로 모였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실패한 투쟁이었지만, 이 운동은 제주의 정신사에 큰 의미로 각인된 거사였다.

우도 출신 강관순도 해녀 항일운동 배후로 몰려 옥살이를 하는 등 불우한 삶을 살다가 일찍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도의 도항선 선착장에는 강관순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미천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저 물결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른다.

이 노래비를 보면서 거룩한 슬픔이 내 마음속을 격하게 파고든다. 그가 민족의식이 얼마나 강했으며,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우도 초등학교 졸업생은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만약 우도에 초등학교가 없었다면, 우도는 물리적 실체로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공동체로서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초·중등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는 소위 출세한 사람들도 꽤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은 없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도에 초등학교가 없었다면, 정신적·문화적 공동체로서 우도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향은 정신이다. 땅이나 건물 같은 하드웨어는 부차적인 문제다. 우도의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주의이며, 우도 해녀 투쟁이나 야학운동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진보 정신이다. 그리고 애향 정신이다. 이 정신을 고양시켜 준 조직이 바로 우도의 초등교육이다. 우리는 이것을 매개로 고향을 확인하고, 고향에 대한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된다.

“초등교육은 우도 사회를 바꾸는 힘”이었다. 이제 그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에게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우도 교육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교육사 박물관이라도 세워져야 한다. 과거 초등학교 건물을 개보수하는 등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교육사 박물관은 우도 교육의 역사를 넘어, 우도의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우도는 관광자원을 자연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것에 문화의 옷을 입혀야 고급 관광지가 될 수 있다. 우도 교육사박물관 건립은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인동초처럼 교육을 향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우도 역사를 증명해야 한다. 우도는 지금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전환점을 잘 관리해야 우도는 제2의 도약을 담보할 수 있다.

우도의 발전 단계를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원시적 저성장 단계다. 자급자족도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성장의 정체는 더욱 심해졌다. 산업 생산물이라야 어획물이 주를 이뤘고, 농업 생산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수돗물도, 전기도,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도 없었던 시기였다.

나도 이 시기의 흉년을 목격했다. 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자세한 흔적은 기억의 창고에서 소멸되었지만, 파래에 외국에서 배급받은 옥수숫가루 같은 것을 섞어서 만든 음식을 먹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돼지사료 수준도 안 되는 음식이다. 나는 비위가 상해 거의 먹지 못했다. 비교적 잘 살았던 내 집이 이 정도니, 다른 집들은 거의 굶다시피 했을 것이다. 비참한 세월이었다.

두 번째는 성장 단계다. 이 단계를 견인했던 힘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동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물 문제, 전기 문제, 도로 문제 해결이 그 전환점이 되었다. 병행하여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따른 관광 수요가 대내외적으로 폭발하면서, 우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020년 7월 우도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20년 7월 우도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모든 것이 과잉이다. 과잉 관광객 수, 과잉 자동차 대수, 과도한 자연 훼손과 남용, 우도다운 것의 급격한 쇠퇴 등 우도는 지금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발전인가를 성찰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면 우도는 앞으로 어떤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가? 세 번째 단계인 '성숙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아직은 우도가 성장 단계, 그것도 과잉 성장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앞으로는 우도의 성숙한 발전을 견인해 내야 한다. 성장은 물량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숙은 교육, 환경, 사회, 문화, 그리고 경제 모든 면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성숙 단계의 주 테마는 '우도다운 것'을 발굴, 유지, 확장하는 일이다.

우도가 정체성을 잃으면 무엇으로 우도를 말할 것인가? 그러면 우도다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나는 두 가지의 핵심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우도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특성을 잘 살려야 한다. 이런 특성을 잘 활용하여 돈도 벌고 관광객도 불러 모아야 한다. 나는 이를 자연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한 해 우도를 찾는 관광객이 200만명이 넘는다. 이제 그 이유를 잘 천착할 필요성이 있다. 우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고민해야 한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우도에 관광객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제주에서도 떨어진 섬이면서 농·어촌 마을의 원형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우도의 본원적인 가치를 상실하면 누구도 우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비전을 확실히 세우는 작업이 우도 개발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우도의 자연 자원을 밑천(원금)으로 삼고 이를 이용해 관광수입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원금을 까먹는 일(자연환경 훼손 등)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도의 자연 자원은 우리가 후대로부터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우도의 청정 바다, 우도의 바람, 우도의 땅, 우도의 지질학적인 자원, 우도의 독특한 역사문화 자원 등이 모두 원금에 해당하는 자원들이다. 이것이 소위 ‘환경 이자론 ’개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특색있는 환경.문화 보물섬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여기에는 돈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재원을 특별회계로 용도를 정해서 사용해야 한다. 우선 우도 해양도립공원 입장료(가칭 입도세)로 조성된 재원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도세로 거둬들인 수입은 일반회계가 아닌 특별회계로 편성, 전적으로 우도다움(정체성)을 고양하는 사업에 투자되어야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제도가 도입되고 시·군이 없어지자, 故 신철수 군수가 도입 ·실시했던 입도세 예산 원칙을 변경하여 입도세 수입을 일반회계에 편입시켜 버렸다. 입도세 도입 취지에 대해 몰이해, 우도 주민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처사이다. 나는 지금도 울분을 토하고 싶다. 우도 입도세 수입은 故 신철주 군수가 도입 당시처럼 특별회계로 돌려놓으라고! 어쨌든, 우도의 입도세 수입이 2021년을 기준을 참고하면 약 15억원 내외이다. 이 돈을 제주 계정을 통해 매칭 펀드로 삼고, 사업 아젠다를 발굴, ‘도서개발 촉진법’에 근거, 중앙정부를 설득하면 15억원 정도를 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정이긴 하지만, 매년 입도세를 활용해 약 30억원 정도의 투자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제주도 일반회계로 20억원 정도를 보조하면 50억원 정도의 재원이 확보될 수 있다. 일반회계 보조는 우도가 제주도 관광객 증대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원하는 예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공짜로 주는 돈이 아니다.

둘째로 이 돈으로 작지만 ‘우도다움’을 만들어가는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우선, 우도가 표방한 탄소 제로 섬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해야 한다. 주민들의 내연기관차 폐기를 전제로 전기차 매입 보조금을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입도세 재원으로 석면이 가득한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하고, 전선도 지중화하며, 쓰레기 소각장과 하수종말처리장도 제대로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 건축 양식과 도색 등이 우도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일본의 예술 섬 나오시마나 발리의 부속 섬인 길리(GiLi)섬을 모델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산호사 해안경관을 심각하게 해치는 3층짜리 흉측한 건물 등도 제주도가 매입해 철거해야 한다.

최근 우도에 대규모의 훈데르트바서 호텔이 들어섰다. 나는 이 호텔 건축이 구상될 때부터 우도의 자연경관을 훼손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이러한 우려를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1박을 하며 호텔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지어졌다고 생각했다. 같이 묵었던 前 대학 총장들의 평가도 나와 대동소이했다. 현지 주민 고용, 현지 농·축·수산물 매입 등으로 지역주민 소득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호텔이 위치한 땅의 면적(1만 평 정도)이 생각보다 넓어서 우도의 동쪽이 잠식당한 기분이었다. 이러한 대형호텔 건립은 이것으로 끝내야 한다. 호텔에 접한 천연기념물인 톨칸이 도로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점은 앞으로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란 한마디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지방자치의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강조하지만 자연환경만으로는 고급 관광지가 될 수 없다. 우도를 소개하는 제대로 갖춘 역사·문화 자연사 자료실 하나 없는 것이 현재의 현실이다. 성숙한 지역으로서 우도를 만들지 않으면 우도는 그저 삼류 관광지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우도 주민 모두가 역사를 보는 안목을 높이고,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우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지적인 바탕 위에서 우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합의해야 한다. 이럴 때만이 진정한 우도 개발이 가능하고, 그 과실도 우도 주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고 말했다.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도 주민들은 이제 고민하고 뭉쳐야 한다. 참혹했던 일제강점기 때 해녀 투쟁의 선도지역으로서, 과거 공동체주의가 공공문제 해결의 규범이었던 지역으로서 우도의 자존심과 진정한 진보의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 이러한 척도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우도 주민들은 어떠한가? 스스로 생각해 볼 일이다.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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