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해설사 동행 ‘2025 성안올레 원도심 투어’ 시작
명승호텔-4·3공적비-해병탑-제이각 등 6km 2시간 코스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원도심의 숨은 명소들이이 따스한 봄 햇살에 기지개를 폈다. 탐라국부터 4.3, 현대에 이르는 제주섬의 역사가 고스란히 성안올레를 따라 배어 있다.
22일 오전 제주시 원도심내 산지천 인근 제주책방에 편한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는 4월 첫 주말부터 본격 시작될 예정인 ‘해설사와 함께 걷는 성안올레 3코스 투어’를 앞두고 사전 리허설 성격의 테스트 투어가 (주)착한여행 주관으로 제주책방을 시작으로 원도심 일원에서 진행됐다. 성안올레는 제주시와 (사)제주올레가 2022년부터 코스를 개발해 현재 3코스까지 완성됐다.
제주책방은 제주 전통 민가 형태와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을 동시에 지닌 장소로 고씨 집안이 살던 집이라는 의미에서 고씨주택으로 불리는 장소로, 현재는 제주책방과 제주사랑방, 성안올레 쉼터로 활용되는 곳이다.
시계가 오전 9시30분을 가리키자, 김아미씨가 사람들 앞에 섰다. 일본어관광통역안내사인 아미씨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날 성안올레 3코스 해설사로 함께했다.
성안올레는 ‘성(城)의 안쪽’이란 의미의 성안과 제주올레길의 올레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원도심을 놀멍 쉬멍 걸으멍 돌아볼 수 있는 성안올레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강소형 잠재 관광지’ 10선에 선정됐으며, 올해 계속 지원 대상지로 뽑혔다.
아미씨는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원도심을 만날 수 있다”며 시작을 알렸고, 참가자들의 기대감은 부풀었다. 거리가 떨어지면 목소리가 잘 안들릴 수 있어 아미씨는 작은 마이크를 사용했고, 참가자들에게는 작은 통신기와 함께 이어폰이 주어졌다.

첫 번째 장소는 갤러리 레미콘. 기와집과 초가가 섞인 동네에 1962년 4층 높이의 현대신 건물이 들어선다. 제주 최초의 호텔인 ‘명승호텔’의 등장이다.
수세식 좌변기가 설치돼 호텔이 됐고, 건물 1층에서는 ‘대한늬우스’가 방영됐다. 2~3층은 객실, 4층은 연회장으로 활용돼 당시 제주를 방문하는 주요 내빈들이 묵던 최고의 시설이다.
전면 철거될 위기에 놓인 건물은 제주에서 레미콘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가가 원형 보존을 위해 사비를 털어 넣었고, 현재는 복합예술공간 갤러리 레미콘으로 활용되고 있다.
갤러리 옆 계단을 오르니 2개의 비석이 나타났다. 1개는 공적비, 1개는 위령비인데, 위령비는 파손돼 3개의 조각으로 나뉘었다.

4.3때 ‘빨갱이’로 몰린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다. 이유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토벌대가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은 도민들은 한라산간으로 피신해 몸을 숨겼다. 이에 토벌대는 해안가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회유책을 썼고, 해안가로 내려온 도민들은 형무소에 끌려가거나 총살됐다. 운이 좋은 몇몇만이 풀려났다.
공적비는 회유책을 생각해 낸 토벌대 덕에 살았다는 의미로 설치됐다. 공적비라 하지만, 당시 도민들이 공적비도 만들테니 제발 살려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을 만큼 컸다.
4.3때 사망한 토벌대를 위해 세워진 위령비는 세 조각으로 파손됐다. 언제, 누가, 어떻게 부쉈는지조차 모르지만, 4.3때 토벌대에 피해를 겪은 도민들의 원통함이 느껴졌다. 원도심 일대 도시재생 과정에서 파손된 위령비를 그대로 보존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지금 자리에 들어섰다.

걷다보니 ‘해병혼(海兵魂)’ 탑이 등장했다. 해병대는 제주를 제2의 고향처럼 여기는데, 이유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심지어 ‘제주에서 해병대 얘기를 함부로 꺼내면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병 출신도 많다.
4.3과 맞물려 ‘나라를 위해 싸우면 빨갱이라는 오해를 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제주에서 해병대에 입대한 도민들이 많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따라 해병대에 입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특히 6.25 한국전쟁 때 맹활약한 해병대 3~4기에 제주 사람이 많았고, 이들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도솔산 전투 등에 참전했다. 도솔산 전투는 ‘무적해병’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이 점령해 진지를 구축한 도솔산은 보다 우월한 장비를 사용한 미군도 뚫지 못했다. 미군마저 포기한 전장에 투입된 해병대가 도솔산 점령에 성공하면서 찬사받았다. 공로를 인정해 해병혼 탑이 설치됐고, 서귀포시 모슬포에는 ‘해병 3·4기 호국관’도 있다.
해설사 아미씨의 설명이 계속됐고, 성안올레를 걷던 사람들 모두가 뭉클한 마음으로 해병혼 탑을 향해 묵념했다.


이어 복원된 제주성 위에 자리 잡은 제이각에 도착했다.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제이각에서 멀리 제주 앞 바다가 보였다.
높은 건물 등이 들어섰음에도 바다가 보일 정도로 시야가 트였고, 제이각에 잠시 앉아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산지천을 따라 원도심 마을을 거닐 때 부처와 예수를 섬기는 건물이 서로 붙어있었고, 산지천에서 오리가 떠다녔다.
또 마을 벽화, 집앞 텃밭에 심어진 무와 배추, 과거 제주 사람들이 제를 올리던 광양당이 현재의 삼성혈로 바뀌게 된 계기, 보성시장과 민속자연사박물관까지 해설사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제주 사람들도 모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해 ‘옛날’처럼 느껴지던 원도심의 ‘지금’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다.
해설사 아미씨는 “제주 사람들조차 모르는 명소가 원도심에 숨어 있다. 다들 ‘이런 곳도 있었어?’라는 반응으로 도민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성안올레는 ▲1코스 제주여성가족연구원, 동자복, 건입동벽화길, 산지등대, 사라봉, 모충사, 제주국민체육센터, 사라봉오거리, 두멩이골목, 운주당지구역사공원, 제주동문시장, 제주여성가족연구원 ▲2코스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산짓물 광장, 탑동광장, 용화사 서자복, 용연구름다리, 무근성길, 관덕정, 오현단, 제이각, 제주칠성로상점가, 북수구 광장, 제주여성가족연구원 ▲3코스 제주여성가족연구원, 동문시장, 제이각 쉼터, 삼성혈 문화 거리, 삼성혈, 보성시장, 광양성당, 자연사박물관, 신산공원, 문화예술진흥원, 신산공원, 제주성 옛 성곽길, 제주여성가족연구원으로 구성됐다. 6km에 2시간 정도 걸을 수 있는 코스로 개발됐다. 코스 주요 지점마다 스탬프도 준비돼 있다.

오는 4월5일부터는 매주 토요일 오전 9시30분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원하는 ‘해설사와 함께하는 성안올레’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해설이 더해지면 소요 시간이 길어 일부 조정된 코스로 운영된다. 원도심에서 출발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마무리되는 방식이다. 이날은 프로그램 운영에 앞선 테스트 투어로 진행됐다.
성안올레 전담 해설사는 총 5명이며, 해설사 동행 프로그램 참가비는 5000원이다. 투어를 마치면 제주 지역화폐 탐나는전 ‘5000원’을 되돌려 받아 무료인데, 신청만 하고 불참하는 사례를 막기 위한 조치다.
해설사 동행 프로그램은 사전 신청자 최대 15명만 참가할 수 있으며, 신청은 ‘제주착한여행’ 홈페이지 등에서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