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32) 여러 가능성 성찰하고 대응 준비해야

최근 호사가들의 화두는 중국의 대만 침공론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교적 수사나 가정법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미·중 간 전략 경쟁은 이미 국제질서의 한복판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정세는 지정학적으로 예민한 위치에 놓인 우리에게도 결코 먼 일이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자 한다. 대만 해협에서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특정 지역의 군사적 충돌을 넘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견실한 외교·안보 철학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전략적 태세로 국가의 존립을 설계하고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1994년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 영국 등으로부터 안보 보장을 약속받는 대신 핵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2022년 전면 침공이라는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사례는 우리가 신중히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조약이나 공허한 수사가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과거의 약소국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감은 탄탄한 전략과 실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자강(自强)의 철학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관된 정책과 현실 감각, 국민적 공감대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작동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을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성찰하고, 그에 대응할 준비를 차분히 갖추는 일일 것이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우리 민족은 국제질서의 흐름이 요동칠 때마다 중요한 교차로에 서 있곤 했다. 특히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이 아시아를 재편하던 시기,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외교적 고립과 함께, 스스로를 지킬 내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07년, 고종 황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일본의 무도함을 세계에 고발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위험한 여정을 감행했으나, 일본의 외교적 방해로 회의장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 사건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자강 없는 외교가 얼마나 무력한 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같은 시기 일본과 영국이 체결한 영일동맹(1902), 그 차원에서 맺은 일본과 미국 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은 우리 민족이 배제된 채 진행된 대표적인 외교 문서들이다. 조선은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조약의 당사국들로부터 한국의 운명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외교 무대에서 목소리를 잃었고, 국운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유효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정의롭고 정당한 주장이라도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제 환경은 사뭇 다르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와 경제력, 기술력 등 다양한 기반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하거나 주변 강대국의 움직임에만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힘의 축적이 아니라, 그 힘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일관성과 전략적 사고의 지속성이다. 자강은 어느 한 부문만의 과제가 아니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 전 영역에서 통합적 사고와 실천이 함께 가야 가능한 일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이 되었고, 당시 자국 영토에 있던 수많은 핵탄두를 보유한 상태였다. 미국, 러시아, 영국 등과의 협의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에 서명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그들의 영토 보전과 주권에 대한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했고 2022년에는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하였다. 국제사회는 이를 규탄했으나, 실질적 억제력은 발휘되지 못했다. 결국, 부다페스트 각서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한 대가로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상실한 채,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이 사례는 한반도에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핵무장 여부를 떠나, 국가 안보는 외부의 보장만으로, 더욱이 미국의 자비심만으로는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우리 스스로의 대비와 억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을 비롯한 안보 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그러한 기반 역시 언제까지나 절대적인 안전장치로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유사시 미국이 주한미군 일부를 대만 지역에 투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한반도 내 안보 공백 문제는 결코 가벼운 우려가 아니다. 이 틈을 노린 북한의 군사적 도발, 또는 북·중·러 간의 전략적 공조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시나리오다.
안보는 현실이며, 냉정한 이익과 힘의 논리 위에 작동한다. 이를 망각한 채 낭만적 기대나 이상주의적 해석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다.
우리는 단순한 군사력의 양적 축적을 넘어서, 질적으로 강한 국방력, 유연하면서도 일관된 외교 전략,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국민적 공감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핵무장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한미원자력 협정을 개정해 일본처럼 상업적 우라늄 농축과 풀루토늄 재처리 능력을 보유함으로서 유사시 즉각 핵무기 제조에 나설 기술적 산업적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이러한 축적된 준비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강의 실질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은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단순한 양자 구도를 넘어서, 아시아 전체의 안보 구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와 북한의 결속이 점차 공고해지고 있으며, 일본 역시 독자적인 군사력 증강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순한 동맹 의존이나 중립 선언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통적 동맹의 틀을 유지하되, 자율적 역량을 강화하는 균형 전략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외교적 유연성과 국방적 실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다층적 접근이 요구된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대륙 중심의 영향력을 강화해왔고, 최근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내세우며 주변 질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중국몽으로 발현되고 있다. 중국몽은 “세계의 중심은 중국에 있다”라는 과거버전인 중화주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여전히 제국주의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냉전 이후에도 자신들의 영향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는 대슬라브주의 표방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두 나라와 인접하거나 지정학적 충돌지대에 놓인 한국으로서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중하고도 단호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 조선이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소외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의사결정 구조가 일관성을 갖고, 중장기적 국가전략이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특히 외교와 안보 분야는 정권에 따라 기조가 급변하는 일이 없도록, 초당적 합의와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자강이란 단어는 단순히 ‘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성실히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를 뜻한다. 물리적 군사력만이 아니라, 정치의 안정성, 사회의 통합력, 산업과 기술의 자립성, 교육의 장기 전략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내실 있는 체력을 갖추는 일, 그것이 곧 자강이다.
자강의 기반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국방력이나 외교 전략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내의 통합과 신뢰, 그리고 공동체적 철학의 공유가 부족하다면 자강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위기는 외부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내부의 분열, 정치의 극단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상실은 외부 위기보다 더 빠르게 국가를 무너뜨렸다. 조선 말기의 혼란이 그러했고,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겪었던 제국주의 시대의 혼돈도 그랬다. 이처럼 자강의 실현은 군사적 능력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통합 역량과 직결되어 있는 과제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치적 의견의 다양성이 민주주의의 한 표현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 다양성이 때때로 공공성을 해치는 분열로 이어지는 양상도 없지 않다. 안보와 외교 같은 중대 사안에 있어서는 정파를 넘는 합의와 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교와 국방은 한 정권의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전략이어야 하며, 국민 모두가 그 방향성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자강의 철학이 특정한 정권의 구호가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국가적 신념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교육의 역할이며,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이며, 궁극적으로는 정치 지도자의 통합적 리더십이다. 통합은 단지 “모두 함께 가자”는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다른 의견과 이해를 존중하면서도 국가적 방향에 대해 공동의 책임감을 나누는 실천이다.
이러한 통합의 리더십은 불확실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고 나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대외 전략은 유연하되, 대내 기반은 단단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 때, 자강은 명분을 넘는 실력이 되고, 현실 속에서 유효한 국가 생존전략으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흔들리던 과거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전략과 철학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국가로 거듭날 것인가. 국민이 내린 판단은 그 자체로 무게가 있으며,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미래의 리더십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요청받고 있다. 최근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씨가 정치적 탄핵이라는 중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일은 단지 정권 교체를 넘어,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집단적 물음이었다고 본다.
이제는 더욱 성숙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정파를 넘고, 지역과 세대를 넘어, 국민적 신뢰와 통합의 기반 위에서 국가를 안정적이고 책임 있게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특히 감성과 신념, 가짜뉴스가 진실을 덮어버리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국가리더십은 역사를 보는 높은 수준의 안목과 혜안을 갖춰야 한다. 이런 시기에 글을 쓰는 사람, 시대의 흐름을 해석하려는 사람에게는그 나름의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던 경술년, 매천 황현 선생은 자결 직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년의 역사를 되새기니,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구나.”
한 세기를 지나 다시 이 말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의 우리도 그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이시여, 이 나라 대한민국에 은혜를 내려주소서.
특히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대통령 감을 보는 맑은 눈을 잘 키워주소서.
국민이 주인 된 나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