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올레길 편지] 7. 사람이 그리워 올레길을 원했던 그 섬, 가파도

이 글은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라는 타이틀로 제주올레 공식 블로그에 연재 중인 올레길 단상입니다. [제주의소리]가 ‘서명숙 올레길 편지’라는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면서 누구나 길과 하나가 되어 가슴에 맺힌 상처나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와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 편집자 주

제주올레 10-1 코스(가파도)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 코스(가파도) / 사진=서명숙

자식도 ‘아롱이다롱이(저마다 개성이 다르다는 뜻)’이듯 같은 제주 섬 안의 올레길도 풍광과 기후, 식생과 지질 심지어는 제주어조차도 조금씩 혹은 확연히 다르다. 그뿐만 아니다. 자기 체험과 감수성에 따라 유난히 정이 가는 곳도, 애틋한 곳도, 사무치는 곳도 따로 있다.

내겐 10ㅡ1 가파도 올레가 아픈 손가락 같은, 떠올리노라면 마음이 사무치는 그런 곳이다. 출발부터가 그러했으니!

여러 차례 털어놓은 이야기지만, 2007년 처음 제주도 전체를 잇는 걷는 길을 내어보겠다는 당돌한 ‘미친 꿈’을 꿀 당시만 해도 가파도를 비롯한 부속 섬은 내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이므로! 

헌데 그런 내 확고한 생각을 여지없이 깨부순 것은 김대환 가사모(가파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장의 집요한 설득과 당시 김동욱 가파리장의 간절한 한마디였다.

(사)제주올레 이사이기도 한 김대환 회장은 카본 프리 아일랜드 프로젝트 때문에 가파도를 방문했다가 그 섬과 사랑에 빠져서 자신이 운영하는 기업 직원들을 이끌고 해마다 분기별로 가파도를 방문하는 가파도 사랑꾼이었다. 그는 어업과 청보리밖에는 없는 이 섬이 개발의 광풍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찾는 섬이 되려면 환경친화적인 올레길이 이곳에 조성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만날 때마다 귀가 따가우리만큼 가파도 타령을 해댔다.

그 끈질김에 두 손 든 나는 현장을 둘러보고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할 심산으로 2009년 겨울 어느 날 가파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아! 정원 25명의 작은 배는 그 좌석마저 절반 넘게 빈 채로 모슬포항을 출발했다. 승객들은 도시의 병원을 다녀오거나 생필품을 구입해서 돌아가는 가파도 아주망, 아저씨, 노인들이고 낚시꾼이 두엇 눈에 띌 뿐이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은 전무했다. 불과 5.5㎞ 떨어진 마라도는 관광객들로 꽉 찬 큰 배가 수시로 오가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긴 나조차 가파도는 처음 밟는 것이니!

배에서 내리니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같은 선 굵고 태양빛으로 얼굴이 잔뜩 그을린 한 남자가 뛸 듯이 반갑게 다가와 김대환 이사를 얼싸안았다. 마을 이장이란다.

그가 가파도 곳곳을 ㅡ고인돌 선사유적지, 가파초등학교, 절간, 당, 일몰 명당, 청보리밭ㅡ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침을 튀겨가면서 설명했다. 

작고, 낮고, 평평한 섬이지만 많은 사연과 인상적인 장소를 품은 곳이었다. 특히 해발고도 20.5m인 그 섬에서 바라보이는 한라산의 그 웅장한 자태와 산방산, 군산, 단산, 모슬봉이 주르르 펼쳐지는 풍광에는 그저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제주올레 10-1코스 (가파도)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가파도) / 사진=서명숙

허나, ‘그래서 어쩌라고! 이 풍광 보자고 두어 시간이면 다 걸을 이 작은 섬에 올레길을 내자고?’ 일출 후부터 일몰 전까지 온종일 걸을 만큼의 구간을 한 코스로 한다는 원칙을 세운 데다, 배로 오가는 건 애초 계획에 없던 일인지라, 풍광만으로 내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걸까? 김 이장은 우리를 떠나보내기 직전에 입술을 앙다물고 묵직하게 내뱉었다. 

“우린 관광 소득이 아쉬워서 길 내달라는 게 아니우다. 바당일만으로도 충분히 먹고는 살아져마씸! 사람이 너무 그리워서 올레길 내젠 허는 거우다.” 

아! 사람이 그립다니! 바닷바람에 그을린 사내의 그 말이 화살처럼 마음에 와 박혔다. 

알고 보니 이 가파도가 문전성시로 절정을 이루던 시기엔 인구가 1000명을 넘고 다방도 두어 군데나 있었는데, 자녀 교육, 병원 등의 문제로 다들 제주시나 모슬포로, 육지로 빠져나가 지금은 상주인구가 100명도 안 된단다. 그것도 대부분 거동이 부자유스러운 노인 인구이고!

그러니 사람이 그립다는 말이 절로 비명처럼 터져 나올 수밖에!

그날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나와 김 이사는 가파도 올레길을 내기로, 그래서 이 섬에 올레꾼들을 들여보내기로 결심했다.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그 섬에 반해서, 자발적 유배를 택한 내 동생 동철이 

그렇게 시작된 가파도 올레길 조성 작업은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섬으로 떠난 탐사팀도 처음엔 시큰둥한 표정으로 출발했지만, 돌아올 즈음엔 올레꾼들의 명소로 떠오를 것 같다고 좋아라, 했다.

실제로 이듬해 3월 개장식 날 올레꾼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다들 처음 보는 가파도 안의 풍광,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 본섬의 파노라마 풍광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헌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올레길 초창기 때 팔을 걷어붙이고 누나가 벌인 일을 초대 탐사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전직 조폭 서동철! 그가 자기 뒤를 이어 탐사대를 맡은 동생 서동성이 이어놓은 길을 구경하러 가파도에 들어갔다가 그만 가파도에 홀딱 빠지고 만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가파도를 드나들더니 아예 그곳에 가서 살겠단다.

동철이의 가파도 이주는 모두를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관광도시 서귀포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밤의 황제 노릇을 하던 그가 인구 100명도 채 안 되는 그 적적한 섬에 들어가서 살겠다니! 게다가 그는 이미 동갑내기 가파도 해녀와 사귀고 있단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지라 한번은 정색하고 동철이에게 물었다. 대체 가파도의 무엇이 그리도 좋은가, 하고. 바다 풍광이나 낚시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아니면 사랑에 빠진 해녀이든가.

허나 동생의 대답은 뜻밖에도 돌이란다. 제주도 본섬의 검은색 현무암과는 달리 이 섬의 돌 색깔은 보랏빛이나 분홍빛을 띠고 모양도 둥글둥글 한데, 그 돌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단다. 미쳤군, 돌멩이랑 사랑에 빠지다니!

하긴, 나도 우리 친정어머니의 눈에는 길에 미쳐서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산티아고 길로 떠나더니 돌아와서 아예 길을 내러 고향으로 내려간 ‘미친’ 딸이었으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렇게 가파도의 아름다운 돌과 파도만큼이나 기질이 센 해녀와 사랑에 빠진 동철이는 가파도에서의 자발적 유배를 택했다. 그는 그 섬에서 시도 쓰멍, 그림도 그리멍, 막걸리도 마시멍, 가끔은 돈내기 윷놀이도 즐기멍 가파도에서 십여 년 살아내다가 환갑이 되던 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사흘 병원에 입원했다가 흰 눈이 한라산을 온통 뒤덮은 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보리밭도 출렁이고, 인파도 출렁이고

가파도에 올레길을 내어놓고서도 정작 나는 그 가파도에 자주 가지 않았다. 동철이가 살아생전에는 평생 크고 작은 사고를 몰고 다녔던터라 그 아이를 지켜보자니 너무 조마조마해 가기가 꺼려졌다. 막걸리를 끼고 사는 게 보기 싫어 술 작작 마시라고 충고하면, 막걸리는 몸에 좋다면서 퍼마시는 게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간암 환자인 주제에. 

그 애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섬에 가면 동철이가 생각날까 봐, 곳곳에 남은 그 애의 흔적이 내 마음을 할퀼까 봐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중, 올해 4월에만 두 번이나 가파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알데곤다 수녀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 & 알데곤다 수녀 / 사진=서명숙

4월 초에는 서울에서 온 알데곤다 수녀님과 함께였다. 지난해에 완주한 그녀는 단 며칠의 휴가인데도 가파도를 꼭 다시 가고 싶단다. 혼자서는 갈 엄두를 못 내던 나는 수녀님 핑계로 못 이기는 척 들어가기로 했다.

아! 가파도 가는 배는 처음 들어갈 때 보다 훨씬 정원이 많은 큰 배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횟수도 더 잦아졌고, 그 많은 횟수에도 늘 승객으로 만원이란다. 25명 작은 배도 절반 넘게 빈자리였던 첫 방문 길이 떠올라 울컥했다.

간만에 들어간 가파도는 변한 부분도, 여전한 부분도 공존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둣빛 청보리와 보랏빛 갯무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바닷가 해안길도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자전거와 걷는 사람들만 허용하는지라 여전히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근처의 빈 집들은 작은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기념품 가게로 변신해 있었다. 그 변신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돌멩이로 담벼락을 붙여놓아 지나가는 올레꾼들의 시선을 붙들었던 동철이가 살던 바닷가 집. 그 집은 이제 간판과 메뉴판으로 뒤덮인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허나 그 변화가 외려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이젠 더 이상 이곳에서 동철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이 섬의 한 풍경으로 지나칠 수 있으니까.

제주올레 10-1코스, 故 서동철 동생이 살았던 가파도 집을 바라보는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故 서동철 동생이 살았던 가파도 집을 바라보는 서명숙 이사장 / 사진=서명숙

한번 길이 트이니 다시 갈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이번에는 사진작가 양종훈 교수가 청보리가 수확되기 전에 가파도에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하잔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 교포 여성 셋도 자기네도 한번 가파도를 가보고 싶다고 동행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녀들은 세월호 11주기 기억식에 참가하려고 한국을 들른 김에 제주를 찾은 터였다. Why not! 

그렇게 다시 찾은 가파도는 열흘 전보다 방문객도 더 많았고, 청보리도 더 자라 더욱 푸르렀다. 길에서는 올레길을 걷고자 보름 일정으로 제주를 찾았고 벼르다가 오늘 10ㅡ1코스를 왔다는 대만 올레꾼 네 여자도 만났다. 그녀들도 나처럼 산티아고 순례길 유경험자들이었다.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과 미국 교포 여성들 / 사진=서명숙
제주올레 10-1코스, 서명숙 이사장과 미국 교포 여성들 / 사진=서명숙

돌아오는 뱃전에서 나는 맘속으로 동생 동철이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했던 이 섬 가파도를 불안해서, 가슴 아파하면서 못 왔던 누나가 다녀간다고! 이 섬을 너처럼 좋아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 사진=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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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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