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柑山里). 인구 800명 남짓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초등학교도, 공공기관도 없고, 주민 대부분이 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도지사나 국회의원 선거철이 아니면 외지인이 좀처럼 찾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제주도민들에게 감산리를 떠올리게 하는 건 천연기념물 제377호, 안덕계곡 덕분일 것이다.

계곡이 음악 무대가 된 오후

지난 10월 18일 오후, 이 한적한 마을에 수백 대의 차량이 몰려들었다. 주차장을 찾느라 난리였고, 계곡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덕계곡예술제’를 보기 위해 6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것이다. 그림과 사진 전시, 시 백일장과 낭송 행사도 있었지만, 이날 행사의 중심은 단연 음악공연이었다.

 2025 안덕계곡예술제가 지난 10월 18일 제주 안덕계곡 일원에서 열렸다.&nbsp;가을을 맞은 안덕계곡의 상록수림과 맑은 물소리를 배경으로 계곡 곳곳에 자연스럽게 둘러 앉은 2025 안덕계곡예술제 청중들 모습<br>
2025 안덕계곡예술제가 지난 10월 18일 제주 안덕계곡 일원에서 열렸다. 가을을 맞은 안덕계곡의 상록수림과 맑은 물소리를 배경으로 계곡 곳곳에 자연스럽게 둘러 앉은 2025 안덕계곡예술제 청중들 모습

리플릿에 적힌 프로그램에는 소프라노 류진교의 「그리운 금강산」, 테너 최덕술과 소프라노가 함께 부르는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 그리고 판소리 소리꾼 이은비의 「수궁가」가 실려 있었다. 공연의 품격을 암시하는 레퍼터리다. 플루트와 색소폰 독주, 보컬 밴드, 지역 아동의 난타 공연까지 — 클래식에서 팝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크로스오버 무대였다. 이런 구성이라면 음향이 완비된 음악당이 제격일 텐데, 이날 공연은 계곡의 돌바닥에 관객을 앉히고 냇가에 널판자를 깔아 만든 간이무대에서 가수를 세워 펼쳐졌다. 발상 자체가 대담했다.

행사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공연의 완성도를 따지기보다, 무대와 청중이 함께 만들어낸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가 계곡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림이 노래를 부르다

공연의 문을 연 것은 음악이 아니라 서예가 이화선의 행위미술, 즉 라이브 아트 퍼포먼스였다. 경쾌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흰 상의에 남색 치마를 맵시 있게 입은 작가가 대형 붓과 물감판을 들고 무대 위 하얀 대규모 캔버스 앞에 섰다. 암벽과 그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계곡을 덮은 푸른 숲이 붓끝에서 살아났다. 잠시 사이 캔버스는 안덕계곡의 풍경으로 채워졌고, 작가는 그림 옆에 시구를 써 내려갔다. 

지난 10월 18일 열린 2025 안덕계곡예술제는 지난 2023년부터 매년 가을 제주 안덕계곡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음악제와 시 낭송회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어우러져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 사진은 이화선 작가의 아트퍼포먼스<br>
지난 10월 18일 열린 2025 안덕계곡예술제는 지난 2023년부터 매년 가을 제주 안덕계곡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음악제와 시 낭송회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어우러져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 사진은 이화선 작가의 아트퍼포먼스

물소리 노래되고
빛이 되어 다시
깨어나라 
안덕계곡

그녀는 마지막 글자 '곡' 뒤에 점을 생략한 커다란 느낌표를 그렸다. 이때 작가가 불러낸 것은 5미터가 넘는 대형 붓. 제주특별자치도 김애숙 부지사, 감산리 김형순 이장 등 내빈들이 함께 붓을 잡고 그 느낌표에 점을 쿡 찍었다. 화룡점정의 순간,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많은 이들이 ‘행위미술’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본 듯했다. 약 10분의 리드미컬한 이화선 작가의 몸동작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이화선 작가의 아트퍼포먼스<br>
이화선 작가의 아트퍼포먼스

축배의 노래, 품격의 순간

이 퍼포먼스의 여운을 타고 소프라노 류진교의 「그리운 금강산」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이어 테너 최덕술과의 듀엣 「축배의 노래」가 흐르자, 익숙한 멜로디에 관객은 박수로 박자를 맞췄다. 기암절벽은 훌륭한 울림통이 되어 오페라, 판소리, 팝을 모두 품었다. 특히 테너의 고음이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며 퍼질 때, 계곡은 하나의 거대한 콘서트홀이 되었다.

600여 명의 청중은 90분 남짓 공연 내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리아, 판소리, 칸초네, 가곡, 플루트와 색소폰 연주, 난타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즐겼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와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날 행사는 노래자랑처럼 떠들썩하지도, 전문 공연장처럼 격식에 매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이 예술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분명한 변화가 느껴졌다. 안덕계곡예술제는 제주도 공모사업으로 선정되어 예산 지원을 받은 ‘지역축제형 행사’이지만, 그 안에는 한 화가의 창조적 열정과 마을의 협력이 녹아 있었다.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축배의 노래 듀엣 공연을 펼친&nbsp;소프라노 류진교(사진 오른쪽)와 테너 최덕술&nbsp;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축배의 노래 듀엣 공연을 펼친 소프라노 류진교(사진 오른쪽)와 테너 최덕술 

'몬딱'에서 싹튼 예술의 꿈  

이 행사를 기획한 김민수 ‘몬딱갤러리’ 대표는 수년 전 제주를 여행하다가 안덕계곡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는 제주 흑우(黑牛)를 오브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계곡 근처의 빈 감귤 선과장을 개조해 갤러리를 열었다. 이름은 제주어로 ‘모두’라는 뜻의 몬딱. 사진 교육을 하며 주민들과 교류했고, 그 소통이 예술제로 이어졌다.

그의 꿈은 단순했다. 안덕계곡이 음악과 미술, 사진이 어우러진 예술공간이 되는 것. 3년 전 어렵게 첫 음악제를 열고, 올해로 세 번째를 맞았다. 공연비를 마련하려고 서귀포시청과 제주도청을 뛰어다녔다. 창작의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난타공연을 펼치는 안덕지역 청소년들로 구성된 붐스틱스<br>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난타공연을 펼치는 안덕지역 청소년들로 구성된 붐스틱스

그를 낯선 이방인으로 보던 주민들도 이제는 지지자와 동반자가 되었다. 특히 감산리 출신으로 서울제주도민회 회장을 지낸 강한일 씨, 목원대 부총장을 역임한 몬딱갤러리 건물주 강용찬 박사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강한일 회장은 색소폰 애호가답게 공연 날 수원에서 비행기로 날아와 단팥빵 500개를 사 들고 관객들에게 나눠주고 식전 연주를 펼쳤다.

제주에는 자연과 음악이 조화를 이룰 만한 무대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안덕계곡은 공연예술의 가능성을 품은 특별한 장소다. 김민수 대표가 테너와 소프라노를 무대에 세운 것도 그 울림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부르는 이은비 국악인
2025 안덕계곡예술제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부르는 이은비 국악인

계곡 예술제, 제주의 미래를 비추다

이제 물어야 한다. 안덕계곡예술제는 지속 가능할까.

김수종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주필
김수종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주필

제주는 이미 관광의 섬이다. 하지만 관광의 질을 높이려면, 판에 박힌 코스와 포토존을 넘어선 ‘경험의 문화’가 필요하다. 올레길을 걷다 우연히 마을 음악제를 만나 한두 시간 머물며 박수를 치고, 인근 가게에서 시원한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신다면, 그것이 곧 제주의 추억이 된다.

예술이 자연을 만나고, 주민이 손님을 맞이하여 어울리는 자리. 

안덕계곡예술제가 그런 지속 가능한 문화공간으로 자라나길 기대해본다. / 김수종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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