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44) 바람의 귀향 

 

갓 트인 바람 길로 촛불행렬이 오고 있다
초반부터 반기를 든 억새 뒤에 소리 낮추며
쓸쓸히 고개 숙이고 
하얀 손들이 
오고 있다

저것 봐, 낙향 길의 가을 하늘은 빈자의 몫
걸레스님 붓장난 같은 구름 몇 조각 떠밀고 와
만취해 벌겋게 누운 
산을 흔들어 
깨우는 이

뜯기다 꼬깃꼬깃 속옷 춤에 감추고 온
실직자 아내들의 맨 마지막 체온은 남아
종점 앞 동국冬菊에 비비며 
우는 얼굴이 
아름답다

낡은 뼈마디가 쟁기처럼 삐걱이는 
범죄 없는 마을 어귀 이삭 줍는 논 등을 쓸며
고랭지 배춧잎 하늘에 
폐비닐을 
거두는 손. 

/1997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1997년 IMF 사태로 많은 실직자 가족들이 고향으로 내려온 풍경을 묘사해서 썼던 작품입니다. 쓸쓸히 고개 숙여있는 늦가을 억새들을 바라보면서 실직자는 물론 그 가족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하얀 손’, ‘걸레스님 붓장난 같은’, ‘종점에 핀 동국冬菊’, ‘고랭지 배춧잎 하늘’, 그리고 ‘폐비닐을 거두는 손’ 등등 사람만이 아닌 우리 한반도의 모든 산천초목이 그 시대상황을 기억하고 묘사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1월 갈대밭이 아픔을 체험했던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갈 데까지 가서도
갈대는 서 있다

저 끈질긴 사람들의 슬픔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이 가을 날

올 데까지 와서도 
갈대는 무리지어 서 있다,
한반도의 
저 끈질긴 슬픔

 -「가을소묘 · 2」(1998) 전문

그리고 가끔씩은, 시조라는 고전적 장르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자유시 형태로도 시를 쓰고 있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낮은 곳’에는 슬픔의 대명사처럼 갈대무리가 서있기 마련입니다. “갈 데까지 가서”도 갈대는 서 있고, “올 데까지 와”서도 갈대처럼 서 있는 우리 한반도에는 그 끈질긴 슬픔의 대명사처럼 갈대의 무리들도 묵상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슬픔을 품고 산다는 시인의 숙명, 그 슬픔의 눈시울 밖으로 물방울이 맺힙니다. 그래서 이쯤 나이 들고서야 저는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야말로 ‘눈물’이라 결론짓고 말았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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