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도 기행1] 미당이 심신의 상흔을 말리우던 섬

▲ 지귀도 위미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다. ⓒ 장태욱

지난여름 혈관 깊숙이 싸인 패배와 절망의 노폐물들을 제대로 씻어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가을이 지나고 있다. 얼마 전부터 고향 앞바다에 있는 지귀도(地歸島)에 가고 싶어졌다. 태어나 자라면서 줄곧 보아왔지만 여태 한 발짝 내딛지 못했기에 저 섬은 내겐 그리움의 원초다.

정축년(1937년) 초여름, 식민지 청년 미당 서정주가 지귀도에서 '심신(心身)의 상흔(傷痕)을 말리우며(<화사집>에서 인용)' 시를 썼던 것처럼 필자도 저 섬에서 심신에 남은 상흔을 말리고 싶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저 섬에서  용솟음치는 창생의 기운을 체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귀도는 서귀포 동남쪽 9Km 지점에 위치하고 면적이 8만7934㎡를 달하는 무인도다. 행정구역상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146-164번지 19필지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이 섬에도 남아 있다. 설문대할망은 체구가 얼마나 컸던지, 백록담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다리를 뻗으면 한쪽 다리는 지귀도에 닿았고, 다른 한쪽 다리는 제주시 앞 관탈섬에 닿았다고 전한다. 설문대할망의 큰 체구를 과시하기 위한 표현으로 '한쪽발이 남쪽으로는 지귀도에 닿았다'고 하는 대목은 옛 사람들이 지귀도를 제주의 남쪽 한계로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

▲ 위미호 위미1리 어촌계에 소속된 어선이다. 해녀들을 지귀도로 실어 나를 때 이 배를 이용한다. ⓒ 장태욱

제주목사를 지낸 병와 이형상이 1704년에 지은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지귀도에 관하여  섶섬, 새섬 등과 함께 "모두 홍로 고현의 가까운 해안에 있는데, 자그마하다. …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18세기 무렵 이 섬에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37년 초여름에 이 섬을 다녀간 미당 서정주는 <화사집>에 "지귀(地歸)는 제주남단(濟州南端)의 일소도(一小島), 신인(神人) 고을나(高乙那)의 손일족(孫一族)이 사러 맥작(麥作, 보리농사)에 종사(從事)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지귀도에서 만난 여인을 소재로 '고을나(高乙那)의 딸'이란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미당의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이 섬에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보리를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현승호 어촌계장 손수 배를 몰고 필자를 지귀도로 안내했다. ⓒ 장태욱

제주문화방송이 발간한 '제주무인도학술조사보고서'에도 당시 이 섬에서 보리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있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고 하던 1930년대 초반에 서귀읍 하효리 오두길씨 가족을 포함하여 몇 가구가 합심해서 이 섬을 개척했다는 기록이다.

이들은 태풍 피해를 우려하여 여름 농사는 짓지 않다가, 겨울의 보리농사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 섬의 보리수확이 본도보다 보름 이상 앞섰다고 하니 보릿고개의 기간도 그만큼 단축되었다.

▲ 위미마을 바다에서 바라본 고향 마을의 전경이다. 모든 것이 정겹고 아담하다. ⓒ 장태욱

지금은 지귀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낚시를 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섬을 방문하는 강태공들과 해산물을 채취하러 오는 해녀들이 이 섬에 사람의 채취를 남기고갈 뿐이다.

지귀도가 위미리에 속해있으므로, 지귀도 해변의 해조류와 어패류의 수취권은 위미1리 어촌계에 속해있다.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미1리 어촌계 해녀들을 섬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선에 동승하거나, 낚시점에서 운행하는 보트에 몸을 실어야한다.

지난 9월에 위미1리 어촌계에 계장 이임이 있었다. 새롭게 뽑힌 어촌계장은 오래 전부터 나와 가근한 관계를 유지했던 현승호 선배다. 섬에 한 번만 데리고 가달라고 조르기를 여러 차례 하였더니 현계장이 손수 배를 몰고 나를 지귀도로 안내했다.  

▲ 섬들 지귀도 서쪽에 있는 섬들이다. 가까운 순으로 섶섬, 문섬, 범섬 등이다. ⓒ 장태욱

배가 방파제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방파제를 빠져나오니 너울에 크게 흔들거렸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배 앞쪽에 섰는데, 파도가 선수에 부딪칠 때 생긴 물보라가 온몸을 뒤덮었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져가자 떠나온 마을이 정겨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수문장처럼 듬직하게 마을을 지켜주던 자배봉도 멀리 바다에서 보니 뒷동산처럼 아담했다. 북으로 한라산이 더욱 선명하고, 서쪽에 섶섬, 문섬, 범섬이 일렬로 자태를 드러냈다. 지귀도 가까운 곳에는 고기를 잡는 어선들과 보트들이 너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쉼없이 움직였다.  

"만조기인데 너울이 심해서 배를 바위에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배를 모는 승호형의 말속에 걱정이 스며있다. 지귀도에 부두가 없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배들의 선수를 바위에 잠시 붙인 사이, 승객들이 재빨리 섬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고무보트는 그나마 큰 문제가 없는데, 목선들은 배를 접안하는 과정에 파손될 우려도 있다.  

▲ 등대 지귀도 북쪽에 무인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 장태욱

바람과 파도를 가르며 배는 지귀도의 하얀 등대를 마주보고 시원하게 바다를 가로질러 달렸고 지귀도 하얀 등대는 시야에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섬이 가까워질수록 내 그리움은 더 깊어만 갔다. "그대 곁에 있어도 난 그대가 그립다"고 했던 시의 구절처럼.

<계속>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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