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나만의 특종] '탈제주'를 꿈꿨던 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나이 마흔 넷, 가당찮게 사는 것에 욕심을 부린대도 이젠 살아온 날이 남은 날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생의 전반기는 끝났습니다(그러고 보니 작년에 생의 전반기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아들 원재가 5학년, 딸 지운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이제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말이 딱 맞는 그런 시기입니다. 정말 열심히 말이지요.

그런데 전 이제 직장을 그만둡니다. 15년 다닌 곳입니다. 지금부터 제 얘기를 자근자근 할 까 합니다. 어쩌면 지난 시간 돌아보고 앞으로 계획에 대한 다짐도 잡을 겸 말이지요. 조언이라도 해주신다면 그야말로 감사하고요.

이십대 끝자락엔 미치도록 제주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명함 15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은 명함입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젠 이 명함도 며칠 있으면 필요없습니다. 새로 할일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많이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네요. ⓒ 강충민

15년 다닌 직장 그만 두는 얘기를 하려니, 제 이십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의 첫 직장은 특급호텔이었습니다. 호텔리어였죠. 국문과 나왔다고 나름 존재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 적성에도 맞았습니다. 그렇게 직장생활은 순탄하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맘 깊숙이엔 '빨리 제주도를 도망쳐야지'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제주도란 섬이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지금도 윤흥길의 소설 <꿈꾸는 자의 나성>으로 그때의 제 심리를 자주 표현합니다. 매일 다방에서 LA행 비행기표를 구하는 사내가 꼭 제 모습을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저녁 아홉시가 넘으면 '아 오늘도 갇혔구나'하고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제주에서 육지로 나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저녁 아홉시였지요. 저는 나고 자란 고향 제주도를 너무도 지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아 고백하건대, 그때 저의 나성은 '서울'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면서 그 강도는 더 세졌고 제빵기술을 배운다는 구실을 달고 드디어 제주도를 도망쳤습니다. 소설 속 사내와 달리 저는 나성 가는 비행기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 후 6개월은 극단적인 경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중랑구에서의 첫 서울 생활은 빵집 주방막내로 시작해 채 두 달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통째로 건물이 팔리며 주방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연히 설거지 담당이던 저까지 감당하기엔 벅찼겠지요. 그런데 전 어쩌면 그 상황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가게나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 그것입니다.

지금에야 평생 하지 못할 경험이었다고 얘기하곤 하지만 솔직히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를 거의 매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심야영업하는 술집을 찾아 밤새도록 마셔댔고(그때는 영업시간제한이 있었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룸살롱 웨이터를 하기도 했습니다. 계룡산의 작은 암자에서 2주일 동안 출가를 고민했습니다. 제주도 내려오기 직전엔 구로동 점집에 들렀다가 신아들 삼겠다는 제의에 실제로 내림굿 날짜를 잡아놓고 점사도 봐주며 굿당을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정해진 운명 때문이다 생각하며 말이지요.

우연히 연락이 닿은 친구와 신촌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고 있었고 곧이어 열차가 진입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고 엉겁결에 저도 같이 뛰었습니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 틈에 섞여 전철을 향해 뛰기 시작하다 순간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 난 바삐 갈 데가 없구나. 서울에 집이 없구나....'

전 혼자 비켜서 벽에 기대었고 스르르 주저앉았습니다. 서러운 눈물 한 방울 흘렀습니다. 저는 서울특별시민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서울은 제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습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그 길로 바로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 시간 후 전 제주도에 내렸습니다. 저의 이십대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직장, 한 사장 밑에서 15년...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지겨워하던, 도망치고 싶었던 제주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달리 보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비로소 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오히려 어쩌다 한 번 가는 서울은 더 이상 저에겐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지하철은 더 더욱... (결코 서울 탈락자의 변명은 아닙니다.) 시민단체에 가입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심한 열병을 앓고 제자리로 돌아온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다시 내려온 후 지금의 사장님과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학원사업을 하다 2년 후 여행사로 업종전환을 하고 지금까지입니다. 햇수로 15년이 되었습니다. 한 직장 한 사장 밑에서 말이지요. 바람 같은 제가 말입니다.

이직, 퇴직이 심한 여행업계에서 아주 바람직한 경우였고, 저희 회사하면 저를 같이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주 좋은 이미지로 말이지요(물론 저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과 저는 아주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 15년 동안 각시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들 원재, 딸 지운이가 생겼습니다. 집도 장만했고요. 제주도 여행업계에서 웬만한 사람은 다 저를 아는, 그야말로 베테랑이 되었습니다. 맞벌이 하는 각시와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한 판 붙을 때도 있지만 마흔넷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안정까지는 아니라도 작은 것에 행복하고 감사하면서요.

▲ 수리중인 가게 제가 일하기 편하게 주방구조를 바꾸고 있습니다. 우선 저희 집하고 가까운 것이 가장 좋은 점입니다. 애들도 자주 들릴 수 있고요. 각시도 점심시간에 밥먹으러 오기 편합니다. ⓒ 강충민

따뜻한 밥상 차려내는 소박한 소망

그런데 이제 또 다시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고향 제주를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이십 대처럼, 다시 그때처럼 회사를 그만둡니다. 이십 대와는 달리 이젠 제주에 더 굳건히 두발 내딛으려 그만 두는 셈이지요. 그만두고 뭐 하냐고요? 식당 개업합니다. 제가 주방에서 직접 음식을 만듭니다.

사실 전 음식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것은 더 좋아합니다. 전을 부치고 산적을 굽고 나물 무치는 명절음식 준비가 제겐 오히려 기다려지는 즐거운 일입니다. 싫증내지 않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제가 식당을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고 배불리 먹여 돈까지 받는다면, 참으로 행복할 거란 생각을 한다면 저는 너무나 세상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 동안 <오마이뉴스> 등 언론매체에 음식에 대한 기사를 자주 썼습니다. 어쩌면 그런 기사를 통해 음식은 미리 선보였던 것이고, 저는 그 반응에 식당 개업할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머릿속엔 이미 후에 개업할 식당의 메뉴로 다 생각하고 있었고요. 실제로 제 식당에서는 제가 기사로 썼던 음식들을 차곡차곡 선보일 예정입니다. 제주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고등어죽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지요. 이십대엔 그토록 싫어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 제주도였는데 이제 마흔넷 나이가 되어 가장 제주다운 음식으로 식당을 하려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텃밭'을 말하는 제주말 '우연네'에 제주밥상을 붙여 '우연네제주밥상'이라는 상호도 그렇고요.

개업계획표 탁상달력에 할일을 정리했습니다. 차질없이 진행되곤 있는데 몇번이나 재확인을 합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 강충민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 이제 15년 다닌 회사를 그만둡니다. 2011년이 밝으면 바로 식당영업을 시작합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손님이 없으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 설렘이 더 강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겠지요. 그럴 땐 다시 차분하게 아들 원재가 식당 안에 붙이라고 했던 문구를 생각하렵니다. 앞으로 저의 다짐이기도 하고요.

"우리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식당대표사진 식당 대표사진을 정했습니다. 봄날 유채꽃과 보리가 어우러진 제주의 정경입니다. 이런 포근한 분위기를 느꼈으면 하고 정했습니다. 15년 같이 근무했던 저의 사장님이 직접 찍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 강충민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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