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의 수도원 풍경, 그리고 쓸쓸한 기차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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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혁이 떠난 러시아 여행] (5) 솔로베츠키 군도 2

새벽녘에 일찍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바람이 불지 않는 맑고 쾌청한 날이었다. 본토보다 훨씬 더 자주, 더 거세게 바람이 분다는 이곳에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침 식사 전에 섬의 남쪽으로 반쯤은 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뒤쪽 호수에서 바라본 수도원. ⓒ양기혁

마을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숲길로 접어들었다. 대나무처럼 위로 곧게 자라는 줄로만 알았던 자작나무가 여기서는 구부러지고 뒤틀리면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군데군데 물 웅덩이 같기도 하고 저수지 같기도 한 호수가 계속 이어졌다. 사진을 찍으려고 호수 가까이에 다가섰다가 모기떼 같은 벌레들이 달려들어 질겁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 아침 산책길에 찍은 수도원의 모습. ⓒ양기혁
▲ 솔로호텔 근처 길가에 세워진 오래된 기도소. ⓒ양기혁

얼마 안 있어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바닷물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해변에 밀려온 해초들이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사람들이 버린 음식쓰레기와 포장지들이 널려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지고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근처 민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축산분뇨의 냄새가 진동하는데다 모기떼가 쫓아와서 조용하게 새벽녘 풍경을 구경하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서둘러 발길을 돌려야했다.

7시가 좀 넘은 시간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수도원으로 모여들더니 무리를 지어 한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배가 진행 중이었다. 뒤쪽 구석에 서서 정교회 전례의식을 잠시 지켜봤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와 달리 홀에 그냥 선채로 아주 편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한쪽 벽에는 긴 나무의자가 있어서 몸이 불편하거나 나이든 사람들은 거기 앉아있기도 했다.

▲ 볼쇼이 솔로베츠키 섬의 남쪽 해변. 멀리 수평선에 보이는 섬이 다섯 개의 부속섬중 큰 자야츠키 섬과 작은 자야츠키 섬이다. ⓒ양기혁

 

▲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16세기 중반에 약 10년에 걸쳐 지어졌으며, 수도원 주위를 돌로 쌓은 성채(끄레믈)은 16세기말에 축조되었다. (영어로 크레믈린이라 하는 러시아어의 끄레믈은 보통명사로 성채 혹은 요새를 뜻하며,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궁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양기혁

전례가 진행 중에도 사람들은 홀 가운데 벽에 세워진 십자가 예수상의 피 흘린 발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여인들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의 한 귀퉁이에 입을 맞추고, 어루만지며 수없이 성호를 긋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어젯밤 문을 닫았던 식당이 문을 열고 아침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단체손님이 있는 듯 식탁마다 접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빵이든 바구니를 갖다놓았다. 손님들 틈에 끼여서 커피와 흑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잠시 눈을 붙였다.

▲ 수도원 내의 교회. 커다란 홀에 선채로 전례를 지내는 마을 사람들. ⓒ양기혁
▲ 정교회 전례가 치러지는 화려한 제대의 사진을 찍고, 수도원 팜플렛과 몇가지 기념품도 샀다. 그리고 수도원의 다른 곳들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비어있었고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양기혁

10시 넘어서 배낭을 챙기고 호텔을 나서서 아침에 갔던 수도원의 교회로 다시 들어갔다. 중년의 여인들이 구역을 나누어 청소하고 있었는데,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고 싶어서 한 여인에게 카메라를 보이며 교회 내부를 사진 찍어도 되는지 묻자 여인은 황급히 막아서며 단호하게 안 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돌아 나와 몇 걸음 떼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여인이 나오더니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수도원 입구의 어두컴컴한 계단을 통하여 2층으로 올라가서 외따로 떨어진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이콘(성화)가 전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제대(祭臺)가 마련 된 방인데, 한쪽 편은 수도원의 기념품들을 갖춰놓고 관광객들에게 파는 곳이기도 했다.

▲ 텅 빈 채 방치되어 있는 수도원 내부. ⓒ양기혁

가이드 북에서는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둘러 보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지만, 2~3일 정도 머무르며 내가 새벽녘에 산책한 남쪽이 아니라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북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울창한 숲속의 완전한 정적 속에서 은둔자들이 느끼는 우수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수많은 호수들을 연결하는 운하가 조성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이곳에 정착한 수도사들과 주민들이 만들어낸 운하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였을 테지만, 오전에 수도원을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다시 선착장으로 향했다. 

▲ 수도원 뒤쪽의 호수. ⓒ양기혁

 

▲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성채안 모습. 퇴락한 채 방치되어있고,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조금씩 하고 있었다. ⓒ양기혁

 

▲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성채안 모습. 퇴락한 채 방치되어있고,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조금씩 하고 있었다.  ⓒ양기혁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오후 들어서 바람도 점차로 거세어졌다. 갑자기 날씨는 겨울로 들어서는 듯 추워졌다. 들어올 때 산 배표의 시간은 저녁 6시였으나 배가 있으면 일찍 나가고 싶었다. 호텔 근처 카페에서 생선이 든 빵 한쪽으로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선착장으로 나갔다. 비바람을 피해 카페에서 맥주 몇 잔으로 시간을 때우고 오후 4시 나가는 배를 겨우 탈 수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고, 작은 쾌속선은 요동이 매우 심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속이 거북한 지 몇몇 여인들은 비닐봉지를 들고 파도가 들이치는 갑판으로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점점 속이 거북해져서 목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어야했다.

▲ 한국해운사의 콘테이너는 어쩌다가 백해의 군도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볼쇼이 솔로베츠키 선착장 한쪽편에 놓여있어 창고처럼 쓰이고 있다. ⓒ양기혁

라보체오스트로브스크 선착장에 도착하여, 처음 왔을 때와 반대로 버스종점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케미 기차역으로 갔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다행히 당일 무르만스크로 가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케미-무르만스크 기차표의 내역
   6월 11일 20시33분 케미 출발
   6월 12일 7시 24분 무르만스크 도착 (11시간 소요)
   3번 차량 25번 침대
   1334.4루블(약 50,000원)

나는 20시 30분을 저녁 10시 30분으로 착각하고, 기차를 타기까지 두어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라서 였는 지는 모르겠다. 역앞의 식당을 찾아가서 라면 같은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싶어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다 배낭을 메고 역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돌아다보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조금 전 표를 끊어줬던 여직원이 역 안쪽 플랫폼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속으로 번쩍 생각이 들었다. 20시 30분은 10시30분이 아니라 저녁 8시30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8시 20분이 넘었고 기차는 진작부터 밖의 플랫폼에 대기중이었다. 간절했던 뜨거운 국물 생각은 까맣게 잊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열차 차량을 찾아가야했다.

내가 탄 3번 차량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고, 내 자리엔 앞이나 옆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였다. 사람 없이 텅 빈 열차는 새삼스럽게 쓸쓸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떠나올 때 얘기하지 못한 친구에게 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의 풍경을 짧게 전하고, 가족들에게도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머나먼 러시아의 북쪽 끝으로 가는 열차에서 한국까지 그렇게 빨리 편지가 갈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순식간에 답장까지 받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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