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그 어떤 ‘업적 쌓기’도 진지한 사유를 거쳐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그 자체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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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게 뻗은 도로는 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한 속도'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빨리 가려는 조급함이 사고를 부릅니다. 개발전략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언가 이루려는 성급함'이 항상 화(禍)를 초래합니다. 좀 더디더라도 정해진 단계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 사진 출처 = pixabay.com ⓒ 제주의소리

그 원인을 찾자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자본’문제가 불거진 것도, ‘예래휴양지’문제가 발생한 것도, 그리고 우리 고장이 지금 ‘난개발’로 신음하고 있는 것도 모두가 그동안 도정책임자들의 ‘천박한 업적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결과일 뿐, 양자 간에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역시 유효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한걸음 비켜서서 우리 지역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내부적 결함이나 틈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던 행위와 궤적을 도외시 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공연히 은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제점은 자각되는 것이지, 다른 사안에 의해 조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공적을 ‘천박한 업적주의’로 비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비하되지도 않습니다. 업적을 쌓으려는 욕망도 잘 조절하면, 지역사회의 발전 동력이 됩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제넘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발전전략과, 그것을 수행하는 도정책임자들의 행태와의 ‘바람직한 상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정책임자의 리더십의 가치는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닙니다. 어쩌면 한 지역의 운명이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업적 쌓기’도 그에 알맞은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진지한 사유를 거쳐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도정책임자의 역할의식은 ‘관계의 자각’입니다. 그 ‘책임’은 주민의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아무리 선거에서 당선됐다고 하더라도,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백지위임’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책임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한, 그것은 결국 공직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항상 어깃장을 놓는 것이 ‘치적을 뽐내려는 그 성급함’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지독히 천박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경박한 성취의식과 저급한 권력의지입니다. 업적을 쌓으려는 욕망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욕망이 지배의지가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소유의 욕심’으로 미끄러질 때, 드디어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장되고 위선적이고…. 그렇게 불건전한 편견과 정념들에 의해 추동되는 그 어떤 행동도 부작용 없는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발전전략도 입체적 과정입니다. 그 자체가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원 이용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현재의 욕구뿐만 아니라, 미래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만큼 역동적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면, 그 자체 독(毒)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새로운 편견의 독입니다.

그런 편견이 신념으로 굳어지면, ‘자기만 옳다’는 폐쇄회로에 갇혀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만 고수하려 듭니다. ‘욕먹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대놓고 욕먹는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눈앞의 다양한 현실을 가로막는 ‘굳어진 신념’은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듯, 참으로 위험합니다. 지역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정치적 설계’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는 미래의 실효성은 상실되고, 별개의 기능과 별개의 의미로 전락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만의 독단을 ‘주민을 위한 것’이라고 자부하며,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장밋빛 환상을 거는…. 그런 마음 아래서는 합리적이고 공익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은 원칙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칙은 ‘지역주민의 합의’입니다. 합의를 보는 것이 바로 ‘일하는 방법’의 정화입니다. 여기서 ‘일하는 방법’은 주민들의 합의하에 공동으로 행위를 하는 상황에서의 방법입니다. 이른바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다고 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몇몇 사람의 의견으로 그걸 대신하고, 여론을 듣는답시고 어쩌고…. 그것 역시 아닙니다. 합의는 ‘주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떤 발전전략이든, 목표달성은 그 자체 관념적으로 구성될 때가 많습니다. 그때 남는 건 과정뿐입니다. 과정이 나쁘면 결과도 안 좋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이 바쁜 시대에 어찌 그 과정을 다 밟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발전전략은 주민들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고, 도정책임자가 결단할 문제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일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보리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하여 줄기를 뽑아 올릴 순 없는 일입니다. 그건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빨리 가기 위해 발 딛는 땅만 남기고 나머지 땅을 다 파버리면, 그 사람은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모두 옛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좀 더디더라도,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편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내세우는 ‘주민의 뜻’도 함부로 이야기할 게 아닙니다. 단언컨대 그건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것이 과하면, ‘또 다른 속셈’을 위장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으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특정한 발전전략의 가설적 성격을 제거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기피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민의 의견을 따르는 양’ 스스로 미화하고, 나중에 결과에 대한 책임회피의 음모마저 있다는…. 결코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참으로 불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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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지나친 ‘업적 추구’에 도사리고 있는 자유롭지 못한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지역사회에 깃든 헛된 기대와 유혹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 이게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너무 거창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주제넘습니다. 그러나 저의 간절한 물음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업적인가”  / 강정홍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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