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 서북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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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의 4·3칼럼> (62) 서북청년단에 이어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문봉제 

문봉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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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봉제.

‘서북청년단 준비위원회를 자처한 세력이 28일 광화문에 등장하면서 과거 ‘서북청년단’에 대한 누리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더 이상 국론분열의 중심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외면해서는 아니 되겠기에, 구국을 위해 재건을 준비하고 있는 ‘서북청년단’이 단원고 일부 유가족과 불순한 반정부 선동세력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서울시와 정부를 대신해서 이 일을 결행하고자 한다”며 노란 리본을 철거하겠다고 주장했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고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30일 서울에서 결성한 우익단체다. 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북선청년회·황해도회청년부·양호단·평안청년회 등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창단했다. 지부는 서울 종로지부가 결성된 후 1947년 1월 서울중구지부·서부지부·청단지부·인천지부 등이 결성됐고 1947년 6월10일에는 대전에 남선 파견대본부가 설치됐다. 이들은 좌익 소탕을 전개한다는 구실로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살인을 거침없이 행사했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을 비롯해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사무실점령사건, 정수복검사암살사건 등 백색테러를 전개했다.

제주도 4·3 사태 당시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해 미군정의 명령에 대항하는 지역에 이 세력을 파견해 양민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1947년 4월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기존 우익단체들을 통합하자, 대동청년단 합류를 둘러싸고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 대파로 분열됐고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됐다. 합동반대파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초기의 서북청년회가 김구 노선을 지지한 것과 달리 이승만 노선을 따랐으나 1949년 12월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됐다. 이들은 활동자금을 각 지방단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기도 했으나 봉급 없이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자행했다.’-경향신문 2014년 9월 29일 

‘제6대 교통부 장관을 지낸 문봉제(文鳳濟) 사단법인 실향민중앙협의회 회장이 20일 오후 5시반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주당 군당 서기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 내무부 치안국장(현 경찰청장), 국무원 사무국장,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56년 황조근정훈장,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각각 수여했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안암병원, 발인 24일 오전 10시’-동아일보 2004년 10월 21일

문봉제(文鳳濟, 1915~2004)는 1915년 평안남도 개천 출생으로, 일본 니혼대학교[日本大學敎] 경제학과를 중퇴하였다. 1946년 월남하였으며, 동년 민족통일총본부 정경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평남동지회'가 결성되고, 그것이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자, 여러 월남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North 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 西北靑年團)가 출범하였고, 위원장에 평북출신의 선우기성(鮮于基聖)이 선출되었다.  

해방 직후 1947년까지 북한 인구의 10%에 이르는 100여 만 명이 월남했다. 상당수가 함흥과 신의주 학생사건 관계자 및 반공 우익인사, 친일파, 대지주, 종교인 등 북한체제에서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이념적 성향은 반공·반북적이었다. 

문봉제는 서청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서청에 대해 “우리의 배후엔 이미 당시의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李承晩) 박사로부터 나오고 있다”거나, “경찰을 행동의 배후라고 한다면, 돈암장은 정신적인 배후”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는 “돈암장과 군정경찰은 평안청년회를 굴리는 2개의 수레바퀴”라고 주장했다. 문봉제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돈암장을 찾았고 이승만으로부터 격려금과 거사자금을 수시로 받았다.

서청이 창립 당시에 내건 강령은 ‘조국의 완전자주독립 전취, 균등사회의 실현, 세계평화에 공헌’이었다. 이러한 강령과 행동은 달랐다. 월남 청년들의 숙식 및 취업 알선, 성분 조사, 경향의 좌익세력 타도, 특수공작, 6.25 참전 등으로 결산된다.

문봉제는 1947년 서북청년회 총본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해 9월 21일 청년운동권의 통합체로서 대동청년단이 결성되고, 통합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분열되었다. 서북청년단에서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했으며,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 대동청년단은 김구(金九)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1948년 2월 5일 구국청년총연맹을 결성하였다.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은 통합청년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한다. 문봉제는 평화일보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대한청년단 부단장직을 맡았다. 대동청년단도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흡수되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차관 자리를 아무거나 하나 고르라”고 하며 서청의 공에 보답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한 상황이었으며, 이승만은 1951년 재선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자신의 심복 장택상(張澤相)을 1952년 4월 20일에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이범석(李範奭)과 홍범희(洪範憙)를 내무 장관·차관에, 그리고 대한청년단 부단장 문봉제를 치안국장에 기용하였다. 이승만은 부산 정치 파동을 주도하면서 결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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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단.
문봉제는 승승장구하였다.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당 청년부장, 1954년 자유당 선전위원회 위원, 정책위원, 훈련부장직을 수행하였다. 1955년 2월 초대 국무원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1957년 6월까지 재임하였고, 바로 이어 제6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장관직을 수행하다가 1958년 9월 사임하였다. 1959년 2월 대한반공단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동년 5월 대한반공청년단 지도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조선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김구 암살사건의 재수사 과정에서 ‘김성주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구속되었다가, 최종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67년 자유당 중앙당 선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6월에는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1998년 4월에는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2004년 10월 20일 향년 90세로 사망하였으며, 상훈으로는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황조근정훈장 등이 있다.

문봉제, 김구 살해를 모의했는가?

“‘살인및시체유기혐의’로 구속된 원용덕(元容德) 중장은 ‘김성주씨를 살해한 것은 문봉제(文鳳濟)· 손원일(孫元一)씨가 사전 모의한 후 이승만으로부터 지령문을 받아낸 후 취해진 것이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6일 상오 군· 검 합동수사반에 의하면 원 중장은 전기와 같이 김성주씨의 살해는 사실상 문· 손씨의 책임이라고 발뺌을 하고 “지령문을 받고 부하(金鎭浩· 睦榮喆)에게 지시한 것뿐이며 그 후 부하가 고문치사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하면서 문· 손 양씨가 살해를 사전 모의했다는 사실은 “이승만이 이러한 지시를 할 때는 평상시에 말로만 하였는데 이 때에는 쪽지를 써어 주었으며 그 쪽지를 손씨가 전해준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고 진술했다 한다.

한편 합동수사반에 의하면 원 중장은 지령문을 4287년 4월 10일에서 15일 사이에 받았으며 김성주씨가 살해된 뒤에 이승만의 소환으로 경무대에 들어가 “김성주씨 사건은 잘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합동수사반은 김성주씨와 함께 살인예비 혐의로 당시 헌병사령부에서 고문을 받은 강태학(姜泰鶴)씨를 증인으로 환문했는데 강씨는 살인예비의 고발을 조서상 김지웅이 한 것 같이 되었으나 사실은 백범 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가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라고 증언했다.”-경향신문 1960년 8월 6일      

“김구(金九)씨 암살사건을 재수사중인 제주지검 황공렬(黃公烈) 검사는 김성주(金聖柱) 사건으로 구속중인 문봉제씨를 1일 상오 심문하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날 문씨는 안두희(安斗熙)를 포함한 서북청년회원 1,300여명을 포병대에 입대시킨 것은 사실이나 안두희등이 김구씨 암살사건을 모의한 것은 모른다고 진술했다한다. 문씨의 말에 의하면 그의 주선으로 포병대에 입대한 서청단원은 하사관이 1300여명 간부후보생이 20여명이라 한다.”-동아일보 1960년 8월 11일

서북청년회의 반공테러는 좌익단체·언론기관·집회·개인 등에 가해졌다.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 이러한 서청의 반공테러로 인해 1949년 6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서청이 지목되기도 한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 들어가 김구(金九)를 살해했다. 또한 1973년 그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 한 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 했다.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안두희는 1947년 북한에서 지주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월남하고 서북청년회에 가입, 서청 총무부장으로 있는 등 우익 단체 활동을 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으로 찾아가 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 그는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최근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가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건국을 방해했다.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라는 또 다른 주장을 하면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두둔하는 극우세력 조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월남 후 안두희가 처음 접촉한 단체는 서북청년회였다. 안두희는 이범석(李範奭)의 민족청년단 등 여러 청년단체를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서북청년회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인 김성주와 문봉제 등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안두희는 서울에 온 지 석 달만에 서청에 가입하여,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김성주. 제주4·3항쟁에서 맹활약(?)하며 이승만의 수족 역할을 하다 돌연 죽산 조봉암(曺奉巖)의 선거를 도왔던 김성주. 이승만 살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던 그는 재판 도중에 사형장이 아닌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의 집 뒤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총살당했다. 그를 죽였던 한 방 탄알의 제조원은 안두희의 백범 김구 암살, 최초의 사법살인 죽산 조봉암을 관통하는 '오욕의 역사공장'이었다.

“김성주는 내가 임명한 문봉제를 해치려는 자이며 손원일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으니 극형에 처하라. 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해라” 훗날 원용덕의 집에서 발견된 이승만의 친필 밀서다. 험악했던 1950년대 독재정부의 실체와 역사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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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제주도 파견

‘우리는 서북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아가 나아가 38선 넘어 매국노 쳐버리자/ 진주 같은 우리 서북(西北)이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밝힌 꽃봉이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서청 단가' 노랫말

4·3을 겪은 어르신들에게 서청은 몸서리치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다. 서청이 그만큼 무지막지한 잔혹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된다. 개신교 조직 폭력배로 해방이후 북한에서 쫓겨 온 감리교가 주축이 되었다. 서북지역 월남 청년들의 조직이다. 평안도를 관서(關西), 황해도를 해서(海西)라 한 것에서 西자를 취하고, 함경도를 관북(關北)이라 한 것에서 北자를 취하여 '서북'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서청 단원들이 제주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3·1사건' 발생 직후의 일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남로당의 준해방구(準解放區)였다.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은 유해진이 부임하면서 경호원 격으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온 것이 그 시초였다.  서청 제주도지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7년 11월2일의 일이었다. 조일구락부에서 서청단원들이 모여 제주도지부 결성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 부위원장에 박병준(朴炳俊) 등을 선출, 결속을 다졌다. 

조병옥은 제주도에서 '4·3'이 발발하자 즉각 서청본부에 단원들의 제주급파를 요청한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 "제주도 서청의 지원문제는 몇몇 미군 장교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4·3발발 당시 서청단장이었던 문봉제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단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00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문봉제는 그러면서 "제주에서의 진압은 미군정하의 군인과 경찰이 한 것"이라고 발뺌하면서 "제주에서의 서청의 공과는 공반과반(功半過半)이라 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서청은 4·3발발 이후 서청단원의 몸으로, 때로는 급조된 경찰이나 경비대의 신분으로 '제주전선'에 뛰어들었다. 

1948년 4월 6일 조병옥이 문봉제를 불러 "대부분의 경찰관과 군인이 제주도 출신자이고 친숙한 관계와 혈연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공의식이 약하고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어서 그들로는 치안유지가 어려우니 반공정신이 강하고 북한에서 반공투쟁을 경험한 서청단원 500명을 경찰에 지원 입대시켜 달라. 그런데 사태가 위급하니 24시간 안에 차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부터 2일 후 최치환 경감의 인솔하에 선발대 200명이 훈련도 없이 전투경찰대로 편성되어 제주로 향했다. 1개월 만에 총 500명의 서청전투경찰대가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경찰대였다.

1948년 11월 중순께 제주경찰에 서청 단원 200명이 1차로 배속되었다. 200명의 서청 경찰대는 ‘200명 부대’로 불렸다. 본훈련도 생략하고 전투에 투입되었고 군가 대신 서북행진가를 불렀다. 상당기간 제주도에 주둔했다. 순사건 직후 서청단원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 투입되었다. 군복을 입었지만 계급장도 없었다. 

대전에서 200명의 단원으로 편성된 서청 '특별중대'의 악명은 높다. '특별중대'란 오로지 서북청년단으로만 구성된 군인들이었는데, 소대 단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서청이 '특별중대'라는 이름으로 무장하면서부터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일으켰다.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사상이 건전하고 철저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고 한껏 추켜세우면서 '제주도학살'의 최선봉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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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

‘동족상잔의 총소리와 피비린내 끊일 줄 모르던 동란의 제주도에도 평화의 봄이 찾아왔다. 즉 그간 폭도 출몰로 국회의원 선거가 중지되어 있던 중 군경민의 필사적 노력에 의하여 점차 치안이 회복되고 있어 오는 5월 10일을 기하여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케 되어 지난 4월 9일로서 유권자 등록과 입후보자 등록을 마감하였는데 갑 선거구의 유권자 총수 3만 8,230명중 등록자 수가 3만 6,387명으로 95% 강이라고 한다. 한편 을 선거구 유권자 총수 2만 6,649명중 등록자 수가 2만 5,847명으로 그 등록률이 96.5%라는 바 이는 제주도의 치안 원상회복에 가깝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좋은 성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무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갑을 양구의 입후보자 성명은 다음과 같다. △갑선거구 : 홍순녕(洪淳寧) 문대유 김인선 김시학(金時學) 양귀진(梁貴珍) 함상훈(咸尙勳) 고학수 △을선거구 : 문봉제(文鳳濟) 양제박(梁濟博) 장택상(張澤相) 이응숙(李應숙) 양병직(梁병直) 김도현 김경수 박창희 여영복 홍문중(洪文中)’-경향신문 1949년 4월 28일

국회 선거위원회 당국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지난 10일 실시된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는 갑을 선거구 모두 개표를 끝마치었는데 갑구에서는 제주도 출신인 홍순녕씨가 최고투표 9,664표로 당선되었으며 민주국민당 함상훈(咸尙勳)씨는 8,790표로 차위로 낙선되었다. 그리고 을 선거구의 투표 결과는 아직 보고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중간보고에 의하면 역시 제주도 출신인 김도현(金道鉉)씨가 우세하다고 한다.(같은 기사 자유신문․조선중앙일보 49. 5. 13)’-경향신문 1949년 5월 13일

‘공보처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일 거행된 북제주군 을구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청년단 양병직(梁秉直)씨가 5,766표로 당선되었고 양제박(梁濟博)씨가 4,764표로 차점이 되었다 한다.(같은 기사 동광신문 49. 5. 15 / 동아일보 49. 5. 16)’-국도신문 1949년 5월 14일

UN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2월 26일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미군정법령인 선거법에 따라 남한의 단독총선거가 시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제주에서는 ‘단선‧단정 반대’가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주요 슬로건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선거인 등록 결과 제주도 등록률은 64.9%로 전국 평균 91.7%에 훨씬 못 미치는 전국 최하위를 기록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거나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경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 동안 제주도에서 모두 2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 무장대는 선거를 보이콧하는 방법으로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주민들이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 가족이나 대동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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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 선거.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를 실시한 결과, 총선거인수 784만871명 가운데 748만7649명이 투표해 95.5%의 투표율을 나타냈다. 제주도 지역은 3개 선거구의 총 유권자 8만5517명 중 5만3698명이 투표해 62.8%의 가장 낮은 투표율을 나타냈다. 이 중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총선거인수 37,040명 중 32,062명 투표)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무소속 오용국(吳龍國)이 당선 확정되었다. 

결국 제주도의 투표 상황은 북제주군 갑구(甲區)는 73개 투표구 중 31개 투표구, 북제주군 을구(乙區)는 61개 투표구 중 32개 투표구만 선거를 실시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갑구의 최고득표자 양귀진(梁貴珍)과 을구의 최고득표자 양병직(梁秉直)의 당선을 무효로 인정하고, 군정장관에게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한 무효 선포를 건의하였다. 

선거 강행의 의지를 보였던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도 부득이 6월 10일 선거를 무기 연기하는 다음과 같은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제주도(濟州島) 재선거의 무기연기/제1조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 제44조에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중앙선거위원회의 추천으로서 본관은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 선거의 투표가 파괴분자의 행동과 폭력으로 인하여 해(該) 양 선거구의 5할에 미급(未及)한 투표구에 한하여 행하여졌기 때문에 1948년 5월 24일 무효를 선언하였음. 동시에 본관은 해(該) 양 선거구에서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시행하도록 명하였음. 제주도에서 파괴분자는 공중치안과 질서의 교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므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의 선거인에 대하여 해(該) 양구(兩區) 인민의 의사를 진실히 대표할 수 있는 평화롭고 혼란없는 선거를 보장하기 위하여 본관은 자(玆)에 해(該) 양 지구의 재선거를 무기연기할 것을 명함. 제2조 본령은 공포일로부터 효력이 발생함.”

국회의원 재선거는 꼭 1년 후인 1949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북제주군 갑‧을구 2개 선거구에 대한 국회의원 재선거에는 도내 인사 외에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도 입후보했다. 심지어 서북청년회 중앙단장 문봉제(文鳳濟)도 북제주군 을선거구에 입후보했다. 재선거는 무사히 진행됐다. 유권자 등록률은 갑구 96%, 을구 97%로 1년 전과 달리 매우 높게 나타났다. 투표율도 갑구 97%, 을구 99%를 기록했다. 개표 결과 북제주군 갑구에서는 홍순녕(洪淳寧)이, 을구에서는 양병직(梁秉直)이 당선되었다. 그 후 문봉제는 치안국장으로 영전하였다.

‘치안명령 제84호/ 1952년 12월 10일 9시/ 어(於) 대구 치안국...(중략)...  2) 본관은 제주도 재산공비의 완멸을 기하기 위하여 제주도지구 토벌경찰대를 증원 파견코자 여좌(如左) 명령한다.  3) (1) 경기, 충남, 경북 각 경비사령관은 1952년 12월 25일한 경감을 장으로 하는 정규편성 1개 중대(114명)씩을 제주도에 차견(差遣)하고 별명이 유(有)할 시까지 제주도 경비사령관 배속하에 제주지구 공비토벌 임무에 당케하라. (2) 제주도경비사령관은 별도 차견되는 경기 충남 경북 각 경찰대를 통합지휘 구처하여 최단 시일내에 공비 필멸작전에 만전을 기하라. (3) 총사령부 경무과장, 보급과장은 1952년 12월 25일부터 별명 유할 시까지 전기 경기 충남 경북에서 차견되는 병력에 대하여 소요의 주식 및 부식비를 지급하라.   4) (1) 편성은 각 병력차출관이 부책(負責) 정규 1개 중대(114명)로 편성하라. (2) 수송은 제주도 도착까지 각기 병력차출관이 부책 수송하라. (3) 보급은 제주도 도착과 동시 치안국에서 지원함. (4) 장비는 병력차출관이 중화기를 포함하여 중대병력을 완전무장케 하고 우선 실탄 매정당 1기수 이상씩을 휴행케 하라. (5) 설영(設營)에 관하여는 제주도경비사령관이 부책 지원하라.      (6) 병력선발에 있어서는 가급적 독신자로 하고 일상사용품을 필히 간소히 휴행토록 유의하라. (7) 기타 행정사항 여고(如故) (8) 세부 및 필요한 사항은 구달 및 별도 서면 지시함. 5. (1) 각관은 본건 시행상황의 중간 및 결과보고를 수시 시행하라. (2) 본관은 총사령부에 재(在)함. 내무부장관 각하 명에 의하여 총사령관 이사관 문봉제(文鳳濟)’-치안명령 제84호/ 1952년 12월 10일 9시

‘본도 공비소탕 전과를 듣고 27일 하오 1시 문(文)치안국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격려문이 경찰국에 전달되어왔다. 국에서는 즉시 전달하였다. 귀도(貴道) 동계작전에 허다한 난관을 극복하고 공비 완전소탕을 위하여 진두지휘하시는 이(李)경찰국장의 공적을 찬양하여 예하 1,800 경찰관 제위의 영웅적 감투를 충심으로 축하함. 1953년 1월 27일 치안국장 문봉제(文鳳濟)’-제주신보 1953년 1월 28일

‘치안명령 제16호/ 1953년 6월 8일 13시/ 어(於) 대구 치안국/.....(중략)....  2) 본관은 상황에 의거 제주도파견 각도 응원경찰대를 원대복귀케 하고자 철수 명령한다.  3) (1) 제주도 경비사령관은 1952년 12월 10일자 치안명령 제84호에 의거 파견된 경기 충남 경북 각 경찰중대를 1953년 6월 15일 0시부로 배속을 해제코 각각 원소속에 복귀시켜라. (2) 경기 충남 경북 각 경비사령관은 전기 복귀병력을 동일부로 통합지휘하라.  4) (1) 병력 및 장비수송은 제주도경비사령관이 부책(負責) 시행하라. (2) 총사령부 경무과장 및 보급과장은 1952년 12월 10일자 치안명령 제84호 3의 3항의 시행은 응원병력이 원소속국 도착 시일한 유효토록 조치하라 (3) 제주도경비사령관은 본 응원병력의 복귀와 아울러 예하 보유병력으로써 지구내 작전을 단행하고 잔비를 기필 섬멸토록 만반조처하라. 5) 각관은 부대의 출발 및 도착상황을 보고할지며 본건 조치결과를 즉시 보고하라. 내무부장관 명에 의하여 총사령관 이사관 문봉제 /하달법 : 전달(電達) 후 인쇄배포 (후략)’-치안명령 제16호/ 1953년 6월 8일 1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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