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제주4.3이 국가추념일이 되고, 어느덧 70주기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롭게 4.3을 이야기할 수 있기까지 예술가들의 역할은 실로 컸다. 온갖 탄압과 손가락질, ‘빨갱이’라는 붉은 낙인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 하나로 붓과 펜,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4.3은 양지로 나왔지만, 4.3예술 앞에는 또 다른 과제가 남아있다. 시대의 변화 앞에 아픈 역사인 4.3이 과연 어떻게 기억되고 전승돼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제주의소리>는 4.3 68주기를 맞아 4.3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예술가들과 지난한 4.3예술운동, 4.3예술의 현주소, 그리고 4.3예술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을 네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제주4.3과 예술] 
대형 회화 <오키나와전쟁도> 상설 전시로 세계적 명소된 日 사키마미술관
<동백꽃지다> 등 4.3예술사 집대성할 가칭 ‘제주4.3예술관’ 관광자원 충분

① '강요된 침묵' 깨뜨린 4.3예술
② 70주기 앞둔 4.3예술, 현주소는?
③ 4.3예술, 어디로 가야 하나? (1)
④ 4.3예술, 어디로 가야 하나? (2)


# 4.3을 지켜준 예술, 이제는 예술을 배려할 때

4.3예술은 초창기부터 깊이 묻힌 진실을 꺼내는데 주력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생존자의 기억과 감정을, 예술가들이 각 분야에서 창작활동으로 대신 세상에 알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 특별법 제정, 대통령의 공식 사과, 국가추념일 지정이라는 변화 속에서 어느덧 68년이 흘렀고, 4.3예술 역시 1978년 소설 <순이삼촌>부터 시작하면 38년이란 긴 역사를 이어왔다.

1994년 2월 출범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현 제주민예총)는 그해부터 4.3문화예술제(4.3문화예술축전)를 진행하며 공동의 기억투쟁에 나섰고, 그 외에도 제주의 많은 예술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4.3과 마주했다. 그렇다면 지금 4.3예술은 어떤 위치에 서있을까? 

당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지금의 4.3예술이 있기까지는 진실 앞에 당당하겠다는 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센터장은 자신이 집필에 참여한 <기억 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2002)에서 “4.3의 기억과 재현을 위한 투쟁에 가장 앞장섰던 부문은 문화운동이었다”고 강조했으며, 같은 책에서 김영범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4.3의 문화적 재현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역사적 기억의 구성·창출로 나아가는 길목이 됐다”고 평가했다.

허나 4.3이 지금의 ‘4.3’이 되기까지 예술이 보여줬던 흔적은, 현재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 졌다. 해마다 4월 3일이 되면 많은 문화예술 행사와 작품들이 나오지만, 그런 결과물을 언제라도 접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된 공간이나 시스템은 슬프게도 사실상 전무하다.

비교적 전파가 용이한 인쇄, 영상매체는 시중에서 구할 수라도 있지만 그것도 널리 알려진 소수의 작품에 불과할 뿐, 각 예술 분야의 많은 작품들이 남아있는지 행방조차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는 사례로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지다>를 들 수 있다. 4.3예술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동백꽃지다>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3년 동안 그린 연작 51점을 통칭하는 작품이다. 4.3 전 과정을 시간 순으로 그려낸 서사적인 구조에 섬세한 묘사와 광범위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역사성과 작품성 모두를 높이 인정받는 역작이다. 

그럼에도 원화(原畫)는 어디에도 걸리지 못한 채 작가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많은 초청전시를 가졌지만, 화집이나 영상 자료로만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동백꽃지다>마저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인데,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때문에 40년에 가까운 방대한 4.3예술사를 정리해 소개할 수 있는 전용 공간, 가칭 ‘제주4.3예술관’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예술인들이 바라는 숙원이다.

제주4.3예술관을 떠올릴 만한 곳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http://sakima.jp)이다. 지난 1994년 문을 연 이곳은 현지 주민 사키마 미치오(佐喜眞道夫)씨가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미군기지에 수용되면서 일부 돌려받은 땅에 세운 미술관이다. 그 덕분에 기지와 마주한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키마 미술관이 한해 5만 명 이상이 찾는 국제적인 명소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대형 회화작품 <오키나와전쟁도>(沖縄戦の図)의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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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 전시된 <오키나와전쟁도>. 사진 출처=사키마 미술관 홈페이지. ⓒ제주의소리

일본의 부부 미술작가인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1901~1995), 마루키 토시(丸木俊, 1912~2000)가 1988년에 완성한 <오키나와전쟁도>는 이곳에 영구 소장되면서 상시 전시되고 있다. 가장 큰 그림이 가로길이 8미터, 세로 4미터에 달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의 끔찍한 현장을 압도적인 스케일로 그려낸 작품은 ‘아시아의 <게르니카>’로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 역시 1930년대 발생한 스페인 내전이란 아픈 역사를 소재로 한다. <오키나와전쟁도>와 미술관을 보기 위해 일본과 해외에서 연간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오키나와를 찾는다.

일본 오키나와에 <오키나와전쟁도>가 있다면, 제주에는 <동백꽃지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백꽃지다>의 모든 작품이 한 장소에서 전시되는 모습은 분명 <오키나와전쟁도> 이상의 스케일과 힘이 느껴지리라 상상해본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기록은 기록으로 머무는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영감(靈感)의 근원이 된다. 예술가들은 (가칭)제주4.3예술관이 미래 4.3예술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중추적인 허브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미술, 문학,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예술로 4.3을 만나는 전용 공간은 제주지역의 훌륭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명소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4.3예술 전용 공간의 필요성은 어제 오늘 나온 것이 아니다. 

2009년 10월, 4.3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주발전연구원이 진행한 연구용역 ‘제주4·3평화재단 운영활성화 방안’에는 평화공원 3단계 사업으로 문화예술시설이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문화예술시설은 평화기념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2014년 12월에 나온 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리노베이션(개편) 보고서에서는 “기념관 2층에 있는 예술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배치된 공간에서 운용해본 결과, 실제 공간의 기능상 적절하게 부합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고 밝힌다. 평화공원을 구성함에 있어서 문화예술에 대한 배려가 크게 낮았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리노베이션을 위한 정부예산은 현재 목표치 30억원 가운데 12억원 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2층 어린이체험관을 새로 지은 4.3평화교육센터로 옮겨 전시공간을 더 늘리겠다는 구상이지만, 설사 계획대로 완성시켜도 전시 공간 총면적은 504.3㎡에 불과하다. 제주도립미술관 2층 상설전시실(629㎡), 제주문예회관 제1전시실(519㎡)에도 못미친다.

제주도 4.3지원과는 “최근 4.3평화교육센터가 완성된 만큼, 필요하다면 센터 1층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센터 1층은 주목적이 체육·단체 행사용이라 지금 4.3예술에 필요한 ‘상설 전용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원희룡 지사는 지방선거 당시 하대 부지 4.3복합문화시설 조성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도 4.13총선 공약사항으로 평화공원 4단계 사업 추진을 내걸었다. 4.3 70주기도 2년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4.3예술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도민 사회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예술은 자신이 4.3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만큼, 이제는 조금은 배려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예술은 다시 4.3의 기억 전승과 화해, 상생에 더 큰 힘을 보탤 것이다.

현기영 작가는 “지금까지 나온 훌륭한 4.3작품을 모아 상설 전시하는 일은 4.3예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제주에서 예술은 관광과 연계할 때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데, 관광객들에게 제주 자연만 아니라 4.3의 아픈 역사도 예술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상설 전용 공간 필요성을 강조했다.


# 현기영·강요배...그들이 기대하는 4.3예술의 미래는?

4.3예술을 가장 앞서서 이끌고 간 현기영 작가, 강요배 화백은 4.3예술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고 봤다. 비록 4.3이 지닌 역사의 무게가 상당할 지라도 젊은 예술인들의 끈질긴 정신이라면 <순이삼촌>, <동백꽃지다>를 뛰어넘는 작품이 머지않아 탄생하리라고 기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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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기영 작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현 작가는 “집단이 아닌 개인 예술로 4.3을 소개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싸움이다. 한계적인 상황에서의 상상력이 남달라야 한다”며 “그래야 4.3을 거룩히 만들 수 있다. 냉정하지만 좋은 예술 작품만이 4.3을 명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2의 <지슬> 을 기대하며 4.3문학상에서 시나리오 부문도 신설해야 한다고 덧붙인 작가는 “4.3을 후세들에게 재 기억시키고 세계화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뿐이다. 제주도는 민간 차원에서 벌이는 이런 노력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해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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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배 화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 화백은 “4.3의 사실을 드러내고 확산시키는 예술 작업은 꽤 나왔다. 이제는 감성적인 예술로 가야되지 않나 싶다. 영화 <지슬>처럼 대중적으로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너무나 선명한 의식으로 사명감이 앞서서 예술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작가 자신을 중심에 놓고 4.3을 활용하는 자세로 접근하길 추천한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2년, 3년, 5년 계획을 잡아서 파고드는 자세가 병행돼야 한다”며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기초적인 공부가 돼 있어야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긴 기간을 잡고 갈 때 좋은 것이 나온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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