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박근혜, ‘아버지 박정희’와 동일시한다

박근혜는 ‘나르시시즘 환자’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대통령처럼 자기 이름의 사인을 큰 글자로 하는 사람들을 ‘나르시시즘 환자’라고 정신과 의사들은 말한다. 최순실 사태 이후 ‘박근혜 담화’는 표현이 모호하고 복잡해 해석과 번역이 필요하다는 평가도 있다. 박근혜의 자의식이 보이며, 박근혜의 사과는 거짓말로 포장된  불량제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TV토론에서는 박근혜가 나르시시즘 환자라는 질책까지 받았다.     

나르시시즘은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키소스(Narcissus)에서 유래됐다. 독일의 정신과의사 네케가 1899년에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S.프로이트가 이를 정신분석 용어로 도입한 뒤이다.

옛날 그리스는 신(神)들의 세상이었다. 인간은 신들의 꼭두각시였다. 이들 가운데 아름다운 소년이 있었다. 나르키소스라는 이름의 소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어떤 여자든 그만 보면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 소년은 ‘여성 혐오병’에 걸려 있었다.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신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신들이 나르키소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여성 혐오병’에 걸려 있는 나르키소스는 그 여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의 여신 비너스가 나르키소스에게 미쳐버렸다. 나르키소스는 비너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자살하지만 신의 경우는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는 비너스는 나르키소스 하여금 그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미쳐버린 나르키소스가 그로 인해 죽고 말았다.

박정희와 동일시하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제국(帝國)군인 시절 박정희(朴政熙, 1917~1979)의 이름이다. 박정희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라 개명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 앨범과 일본육사 졸업 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만주국(滿洲國)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신천지’였다. 만주사변이 벌어질 즈음에 만주에는 간도를 중심으로 조선인 상당수가 이주한 상황이었다.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조선에서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이 하달되면서, 식민지 젊은이들에게도 ‘황군(皇軍)’으로 향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의 소위로 임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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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의 부패와 닮은 박근혜 게이트. 출처=오마이뉴스. ⓒ제주의소리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아버지 덕을 봤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정치세력의 리더가 될 수 있었고,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국민 계층의 지지에 힘입어 최고 권좌에까지 올랐다. 그렇지만 ‘정치인 박근혜’는 박정희의 대리인이 될 수 있었지만, ‘대통령 박근혜’는 ‘대통령 박정희’를 대리할 수 없고, 대리해서도 안 된다. 아버지가 통치했던 시대와 그 딸이 통치해야할 시대는 엄연히 구분해야 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후보 시절 ‘복지국가가 아버지의 꿈’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국민들을 설득했다. 박근혜의 또 다른 정치적 자산 중 하나가 그의 ‘어머니 육영수’였다. 대선 과정에서 그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인 숱한 지지자들이 떠올린 건 사실 박정희가 아닌 육영수였다. '따뜻한 보수'에 대한 기대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그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미국의 심리학자 모린 머독(Maureen Murdock)은 그의 저서『여성영웅의 탄생(The Heroine's Journey)』에서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이란 개념을 등장시켰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을 주로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 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해온 여자”를 말한다. 

여성이 기존의 여성 이미지들과 결별하기로 할 때, 그들은 부득이하게 전통적인 ‘남성영웅의 여정’, 즉 성공을 향한 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모습은 딸의 야망에 불을 지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영애(令愛)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 중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구원자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딸’이 됐다. ‘아버지의 딸’ 박근혜는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 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하면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아버지의 딸’은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시 신당동 사저로 돌아간다. 그 10년 후, 1989년 5월 19일 밤, MBC는 <박경재의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 박정희’를 말한다>에 ‘아버지의 딸’을 출연시켰다. 18년간을 대통령의 딸로 지내고, ‘10․26 이후 처음으로’ 토론석에 앉았다. 시청률이 81%까지 올랐다.  

물론 사회자가 ‘몰아세우듯’ 인터뷰를 하였지만, ‘독재자를 위한 그 딸의 변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 5․18광주항쟁 9주기 뒷날, ‘유신독재’자의 딸에게 110분간의 시간을 할애한 것은 광주희생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박정희’에게 불리한 문제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모른다” 등으로 부인하였다. ‘유신(維新)’에 대해서까지도 이를 옹호하는 등 두둔 위주의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제주4․3에 대한 인식도 닮았다 

‘아버지의 딸’, 박근혜는 권위적 통치를 일삼던 ‘아버지 박정희’처럼 민주적 의식과 소통 능력이 부족하고, ‘아버지 박정희’가 구사했던 뛰어난 용인술과 국정 장악력은 갖추지 못했다. 제주도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셈법도 마찬가지다. 특히 제주4․3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셈법은 너무나 빼닮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아버지 박정희’가 중심이 된 쿠데타군은 제주4․3에 재갈을 물렸다. 군사쿠데타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이문교, 박경구가 검거됐다.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6월 15일 경찰은 전년도에 건립된 ‘백조일손위령비(百祖一孫慰靈碑)’를 부숴서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백조(百祖), 아니 132명의 유골은 ‘아버지 박정희’의 쿠데타로 산산이 흩어졌다. 경찰은 모슬포지서 급사에게 술을 먹인 후 해머를 주어 비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군사쿠데타 이후 ‘아버지 박정희’의 군사정권 하에서 제주4․3에 대한 논의는 일체 불허됐다. 서슬이 퍼런 반공법,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제주4․3에 대한 논의는 힘들어졌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횡단도로를 ‘5․16도로’라 명명했다. 

그렇지만 역사(歷史)는 항상 정의(正義)의 강물로 흐르는 법.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제주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시 불처럼 일어났다. 1992년 4월,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132구의 두개골이 수습됐고, 다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백 분이지만 그 손자들은 다 한 손자다. 백조일손지묘 입구에는  위령비 조각들을 전시해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가장 큰 ‘리스크’는 권위주의”  

2012년 미국 주간지 타임은  박근혜를 소개하면서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했다. 기사의 최초 제목은 ‘The Strongman‘s Daughter’였다. 한국 언론과 정치인들이 해석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생기자, 기사의 제목을 'The Dictator's Daughter'로 수정하기도 했다.

미국 LA타임스 역시 박근혜의 당선을 전하는 기사에서 “한국은 비록 튼튼한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있지만, 남북이 모두 독재자의 자식들이 통치하게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게 됐다”라고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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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지 아시아판 최신호 표지. 출처=오마이뉴스.

영국 가디언 역시 박근혜의 당선을 전하며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평했으며, 프랑스 르몽드는 박근혜의 당선소식을 전하며 “아이러니한 것은 박근혜는 아버지의 잔인한 통치를 부정하면서 당선되었는데, 낙선한 문재인은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자유를 위해 활동했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미국 뉴욕타임즈는 박근혜 당선을 알리는 기사에서 박정희를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했던 독재자(South Korea’s longest-ruling dictator)로 평가했다.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사설에서도 박근혜의 역사교과서 개정 시도를 우려한 바 있다. 당시 신문은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A급 전범이라는 점과 박근혜의 아버지가 일제에 협력한 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식민통치와 독재 시기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의 가장 큰 리스크는 박근혜의 권위주의’라는 사설에서는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평판을 좌우하는 가장 큰 리스크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며 “박근혜 정부가 강압적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고 날선 비판을 내놓았다. 
 
한국의 라스푸틴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박근혜에게 눈에 띄는 편지가 도착한다. 최태민이 보낸 편지였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첫 만남은 1975년 3월 6일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최태민은 3시간이 넘는 대화 끝에 박근혜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1872~1916)’으로 불린다는 과거 주한 미국대사관의 보고 사실을 거론했다. 또 AFP통신과 AP통신은 최순실을 ‘한국의 여성 라스푸틴’으로 표현했다. 외국의 유수언론들이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을 라스푸틴이라 칭하면서 라스푸틴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신들은 “최순실의 국정 개입 사건이 ‘샤머니즘적 주술’과 연관돼 있다. 최순실의 아버지이자 사이비종교 교주인 최태민은 수차례 개종하고 이름을 일곱 번 바꿨다. 여섯 번 결혼했다” 등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물론 박근혜와 최순실은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다. 그래서 각별하다는 건 맞는 말인지 모른다. 여기에 바로 ‘주술적인 것, 샤머니즘적인 것’이 도사리고 있다. 박근혜는 최태민이 무슨 말만 하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은 최태민의 후계자가 아닌가?

또 뉴욕타임스는 최순실 게이트를 ‘샤머니즘적 컬트’라고 규정했다. 최태민을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정(帝政)러시아 니콜라이 2세를 허수아비로 만든 파계(破戒) 성직자 라스푸틴을 바로 연상시킨다며, 이들에게 놀아난 박근혜 역시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것이다.

라스푸틴은 누구인가?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으로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 수도원을 전전하는 ‘돌중’이 됐다. 1904년에 페테르부르크로 넘어와 귀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얻었고, 마침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까지도 사로잡았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막강한 권세까지 얻었다. 심약한 니콜라이 2세는 매사를 대가 센 아내의 뜻에 따랐고, 황후는 매사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했다. 라스푸틴은 황후와 황제에게 ‘우리의 친구’가 됐다.

1910년경 라스푸틴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라스푸틴은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라스푸틴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모두들 황후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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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16년 가을, 위기가 깊어지면서 대중들의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졌다. 자본가들 사이에 쿠데타 움직임이 싹트고, 황실과 귀족사회 한구석에서까지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위기를 느낀 황실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고자 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연일 파업과 시위가 계속됐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두 달 남짓 후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온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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