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사람이 생겨먹은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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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13) 《벤야멘타 하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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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나를 찾은 10년!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는 《데미안》의 문장을 기억하나요? 우리 한 명 한 명은 자연이 세상을 향해 신중하게 던진 돌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 닮은꼴이 됩니다. 공장으로 잘못 던진 거 아닐까요? 수학 올림피아드나 각종 대회에서 세계를 휩쓸었던 아이들은 왜 정규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지극히 평범해지고 똑같아질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사람이나 물건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성질을 우리는 ‘본성(本性)’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본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을 잘 지켜야 하고, 본성이 가리킨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우리들의 본성은 끊임없이 공격당합니다. ‘아직도 어린애냐?’, ‘철 좀 들어라’ 같은 말을 들으면 철들지 않은 나의 모습이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죠. 저 역시 어릴 적부터 타고난 여러 가지 모습들을 버리고 어른들이 바라는 ‘건전한 모습’으로 변신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 말대로 하지 않았던 나의 선택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저는 공부 하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제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저는 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와서는 ‘엄마,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건지 처음 알았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책 읽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그때는 집집마다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이원수 세계소년소녀 동화집’이 있었는데 인도동화집, 독일동화집, 러시아동화집을 특히 좋아했죠. 그러던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을 거치면서 책도 공부도 완전히 덮어버립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들과 휩쓸리며 전자오락실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문구점을 털고,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대면서 비뚤어지던 시간은 정확히 10년이었어요.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신 차리고 학교 공부라도 하지 않았다면 4년제 대학에도 못 갔을 것입니다. 저는 그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죠. 

잃어버린 10년이 준 여파는 대단했어요. 저는 책을 한 줄도 안 읽었기 때문에 대학 시절 친구들이 중학교 때 읽었다는 책을 한 권도 안 읽었고, 책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어요. 대학 시절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보니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독서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게 참 부끄러웠어요. 부끄러움은 나에게 책을 하나 둘 잡고 꾸준히 읽게 만들었죠. 이것은 잃어버린 10년과 부끄러움이 준 선물입니다. 저는 비교적 최근에야 이 시간에 대해서 재평가를 했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나를 찾은 10년’이라고. 이 긴 시간 덕분에 나는 한 명의 온전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생겨먹은 대로 살려면 ‘작전’을 잘 짜야 한다

난 정말 화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화날 때 해결방법 중 내가 시도한 것들은 다 각각의 단점이 있다. 
첫째는 바로 화내는 것이다. 바로 화내면 대상에 따라 결과가 나뉜다. 그 사람이 약간 머뭇거리면 몰아붙이면서 나의 승리(?)가 되지만 그 사람이 바로 자신도 화내면서 받아치면 패배한다. 엄마는 바로 받아치는 경우여서 "아, 엄마는!" 이러면서 화내면 "너는 어딜 사람 면전에 대고 소릴 질러!"라면서 매우 하이 톤에 성대의 안전 여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크게 받아친다. 
둘째는 가만히 있는 것인데, 이 역시 엄마랑 싸울 때, “……” 침묵을 지키면 "넌 왜 아무 대답도 없고 말도 없어!"라며 다그친다. 
셋째는 우는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 울면서 동정 받는 게 싫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랑 싸우다가 어이없어서 울었는데 애들이 동정했다. 동정 받는 건 싫었는데 친구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고소했다. 
답은, 혼날 때 적당히 대꾸하면서 참아야 한다. 
 - 어느 중학교 1학년이 쓴 글
만약 어떤 학생이 생겨먹은 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견제’를 받습니다. 어른들에게 생겨먹은 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발각되면 몹시 위험해지죠. ‘작전’이 필요합니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쓴 위의 글을 보면서 참 재밌었고, 학창 시절 생각도 났습니다. 부모님께 혼날 때 대꾸하면 대꾸한다고 혼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다가 혼나고. 답답했던 적 있으시죠? 

저는 어른에게 혼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평생 참회할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면 혼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이 누그러지기 마련입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는 말은 혼나는 시간이 곧 끝나간다는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혼나고 나면 또 ‘다른 죄’를 지었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작전이 발각돼 ‘너는 혼날 때만 반성하는 표정 짓고 그때뿐이더라’하고 혼났죠. 

저는 혼나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관찰과 분석도 부지런히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을 혼나지 않는 데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죠. 많이 혼나다 보니 혼내는 사람의 감정을 그래프로 그릴 수도 있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벼락처럼 혼내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윽박지를 수만은 없죠. 조금 누그러진 시점이 되면 아무리 기분 나쁘고 대꾸를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이 작전은 어릴 적 제 작은 누나가 혼나는 모습을 연구하면서 터득한 방법입니다. 누나는 혼나기가 끝나는 시간에 하필이면 복받친 감정을 터뜨리는 바람에 추가로 혼나는 일이 많아서 안타까웠습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부유한 귀족 집안의 둘째 아들 야콥 폰 군텐이 무슨 이유에선지 하인을 양성하는 벤야멘타라는 기숙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작성한 일기 형식의 소설입니다. 걸어 다니는 것을 광적으로 즐기는 스위스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장편 소설이죠.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은 프란츠 카프카가 로베르트 발저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을 정도로 카프카의 작품세계와 닮았습니다. 다만 카프카의 인물들은 어딘가로 계속 나아가려고 하지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반면, 로베르트 발저의 인물들은 나아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뒷걸음질 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매우 도전적인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장편소설 치고는 짤막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며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문장 안에 묵직한 생각이 담겨 있죠. 천천히 산책하듯 읽어나가면 희미하게 작가의 의도가 보이기 시작하고, 나를 꾹 눌러왔던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시원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작품의 주인공 야콥은 왜 가진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하인 학교에 간 걸까요? 부모님처럼 살기 싫었던 걸까요? 이것은 부유한 귀족 집안의 귀한 둘째 아들 야콥이 세운 ‘작전’입니다. 야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형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고, 야콥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기 위한 작전을 짠 것이죠.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쓴 조지 오웰 역시 안정된 경찰 공무원직을 버리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죠. 

점잖은 세계는? 끔찍하다. 그래, 나는 기꺼이, 아주 기꺼이 그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를, 광채와 안락에 파묻혀 있는 그를 만나게 된다면, '여기 형이 있구나' 하는 느낌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는 그저 반가운 얼굴을 가장해야 할 것이고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일부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나아지고 지혜로워진다고 생각하지만 야콥은 나아진다는 관념 자체를 거부합니다. 나아지고 성장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가 본받고 싶은 ‘성장한 어른’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이 조언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보다는, 좀 난해하고 도발적이긴 하지만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안내하는 어지럽고 불편한 길을 경험해보는 것이 나아지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진다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납니다.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대부분 비판되고 부정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바로 ‘공자’였습니다. 공자가 태어난 이래 중국 사람들은 공자에 대해서 한 번도 부정해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공자는 도마 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타도한 것은 ‘공가점(孔家店)’, 즉 공자에 대한 여러 가지 환상과 종교적 맹신 같은 헛된 가치들이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로베르트 발저가 활동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에서도 벌어집니다. 발저의 작품은 1930년대까지 당대의 격찬을 받았고, 1970년대에 다시 회자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가치가 파괴된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는 ‘지식’과 ‘발전’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하나씩 이해해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이, 말하자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겉보기에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물론 이 세상에는 소위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좀 더 뻔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대중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장사꾼들이 퍼뜨리는 무수한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대중, 그것은 현대판 노예다. 그리고 개인은 그 굉장한 집단사고의 노예지.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일부
만약 여러분이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그 때 AI가 모든 의료 서비스를 대체한다면 그 동안 공들인 여러분의 노력은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매일 몇 시간씩 영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공부를 했는데 자동으로 언어를 번역해서 외국인과 듣고 말할 수 있다면? 실제 이런 제품은 이미 개발이 끝났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기에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 그리고 생겨먹은 성질 이런 것들이 가장 신뢰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연재했던 글들을 차분히 읽어 왔던 독자들은 이 글이 청소년의 입장을 옹호하고, 청소년에게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른들이 아니라 10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생각이 낡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절대 다수는 자신의 생각이 낡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0대들은 억눌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10대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피해를 주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10대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도움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어쩌면 어른들의 조언보다 더 도움이 되는 건 《벤야멘타 하인학교》 같은 훌륭한 문학작품일지 몰라요. 잘못된 관념과 가치를 깨주고, 10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지지해주는 문학작품은 산소호흡기와 같습니다. 몸과 마음에 뚫려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어놓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나오는 문장으로 탁한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세요.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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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어림 2018-04-04 14:19:57
멋진 글이네요.맘에 확 와닿는...
세상을 향해 신중하게 던져진 돌인 오늘의 나를 응시하게 하는 글이네요~~
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