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간·소리 공동기획-포토파일] ② 일본인 연구자도 주목한 기원신화 삼성혈
일제강점기 칼날 피하고 지금껏 유지...고대 동아시아 안에서 장소성 발굴해야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올해 2019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공동기획 <하간·소리-포토파일>을 마련했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계기로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보다 앞장서서 서구의 제도와 학문을 도입하며, 세계를 향한 정복의 야욕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에게 향한다. 그 세력들 중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 및 지역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학문이론(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 민속학, 언어학 등) 정립과 유포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분야에 뛰어든 일본인 학자들은 군사력까지 동원하며 현지 조사를 단행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탈맥락적·탈역사적인 연출·분장을 요구하며 해당 민족의 지리, 관습, 민속, 제도, 일상생활 등을 조사·촬영했다. 이처럼 20세기 전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수탈 정책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 현지 학술조사를 토대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조사 대상지에는 제주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대표 고영자) + 제주의소리 공동기획 <하간·소리-포토파일>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사·촬영된 당시 제주도 사진들 중 시사성이 짙고, 기록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 당대 제주도를 다각적으로 접근, 재조명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필자·편집자 공동 주] |
글로벌 21세기, ‘문화교류’가 화두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화와의 끊임없는 접촉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 상호 작용이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일수록 토착문화는 타 문화와 융합하여 빠르게 발전한다. 이는 문화 전파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그러나 문화 전파의 이면엔 의도적인 속성도 당연히 존재한다. 문화제국주의론(H. 실러)에 의하면 문화 교류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문화 교류는 정치, 경제적 동기에 의해서 성립된다. 즉 문화 교류의 주된 원인은 국가 간의 정복 관계,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익 획득 등을 수월하게하기 위해 자국의 문화나 가치관을 다른 국가에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가령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조사 사업을 펼쳐 정치적·경제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고,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의 신앙(신화), 관습, 전통을 자신들의 시선에서 해석·홍보하고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던 예에서도 나타난다.
(1) 1914년 제주도 삼성혈
지난주에 이어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의 또 한 장의 사진, [사진1]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진1]도 사진집 《제주100년》(제주도 발행, 1996년)에 수록된 것이다. 같은 사진집에 <三姓穴의 조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촬영자, 촬영연대, 촬영배경 등 언급은 없다. 대신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따르고 있다.
“일제 제복의 사내들이 당시로서는 시내 외곽에 위치한 삼성혈을 조사하고 있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세 순사가 각기 세 혈의 입구를 밟고 서 있다. 구멍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함으로도 보이지만 그 보다 이렇듯 숨구멍을 틀어막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진집에는 [사진1]과 관련해서 또 한 장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광경에 대해 요약하면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조선의 토지 면적 파악과 세부측량을 위해 일제의 관헌들에 의해 찍힌 것 같다”는 설명이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큰 틀에서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진 촬영의 배경을 알면 이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한층 의미심장하다. 도리이 류조는 제주도에 1914년 5월 17일 도착한다. 다음 날 5월 18일 동경대학 인류학교실 이시다(石田収蔵) 선생 앞으로 ‘濟州’ 소인이 찍힌 엽서를 보낸다. 이에 따르면, “오늘 오전중에 근처의 유적(신화에 나오는 三穴跡 등)을 보고 오후에 조선 남녀 신체 측정을 할 것입니다. (중략) 내일은 이곳을 출발하여 섬을 일주할 생각입니다. 십여일을 보내고 성내로 돌아와서 목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다시 다도해 섬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5월 18일 제주도에서 鳥居.”
이와 같은 일정으로 도리이는 1914년 5월 18일 오전 삼성혈을 방문, 촬영하게 된다. 예정대로 그날 방문해서 나온 것이 바로 [사진1]이며, [사진1] 왼쪽 상단 세로로 기입한 “大正三, 五, 一八, 濟州島 三姓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大正三은 1914년.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삼성혈에 대한 관심은 매우 지대했다. 당시 보통학교 <国語読本(巻五) 교과서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 중 하나로 소개(일본어)될 정도였다. 도리이 류조 또한 삼성혈과 삼성신화에 큰 관심을 보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국 남해안과 제주도 조사를 마치고 귀국한 도리이는 1914년 하반기 일본학회 회원 상대로 '민속학상으로 본 제주도'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이 강연에서 탐라에 대한 최초 일본기록, 구로시오(黑潮)의 영향을 받은 제주도 동·식물·어류의 유입, 촌락, 가옥, 풍습, 생업, 해녀, 토속의례, 목축, 재래종 감귤, 신화 등 다방면의 제주도 사정을 두루 다룬다. 강연 내용은 《東亞之光》이라는 잡지 9권 12호(1914.12)와 10권 2호(1915.2)에 나뉘어 전문 수록되어 발행되기도 했다.
기록 중에 도리이 류조는 제주도인 기원신화(‘삼성신화’라는 표현 쓰지 않음)에 관심이 지대했던지 여러 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삼성신화에 대한 관심과 접근을 탐라 삼성인(三神人)이 배필로 삼은 ‘벽랑국 삼공주’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는 (제주도) 여러 노인들에게 이 여자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물어보니 일본의 ‘白狼國’에서 왔다고 말하더라며,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다른 조선인과 다르게 매우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선조가 동일한 연유에서인지 애틋한 느낌은 갖고 있었다”라고도 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도리이는 벽랑국 연구에 착수, 여러 문헌 조사를 거쳐 벽랑국을 일본 오도(五島)열도 치카시마(値嘉島)였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게 된다.
도리이는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하나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창하며 일본에 의한 조선 합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인물이다. 그런 배경에서 도리이의 식민지 현지조사는 외형적으로는 엄밀한 관찰과 객관적인 지식의 확립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영토 확장 및 식민지 정당화와 연동한 조사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부 일본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도리이의 현지조사는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침략에 편승한 측면은 부정할 수 없을 것”(西川:1970)이라 지적도 있다. 제주도 삼성혈 촬영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1914년 5월 18일 삼성혈 촬영도 제주도 토착문화와 융합한 일본문화의 전파 가능성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하겠다.
(2) 1930년대 이후 제주도 삼성혈
삼성혈이 성역화 된 배경에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를 유교화(儒敎化)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대부분의 마을 신당들이 훼철되는데 반해, 유독 삼성혈만은 무속에 대항해서 공식화된 성소로 인가받는다.
중종24년(1526) 이수동 제주목사는 혈(穴) 주위에 돌 울타리를 쌓고 홍문과 혈비를 세워 춘·추제와 혈제를 모시게 한 것을 시작으로, 숙종24년(1698) ‘삼성문과 삼성전’ 건립, 이후 수차례 중건과 중수, 재건을 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익히 알려졌듯이 일제강점기 제주성내는 근대화 개발정책에 발맞추어 과거 상징적 공간과 장소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거나 사라져갔다. 반면에 제주성 밖 2km 쯤 송림에 둘러싸인 삼성혈만큼은 약간의 잡음들이 있었으나 거의 훼손되지 않았고, 오히려 [사진2]처럼 더욱 정비된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일본 행정당국에 의한 당시 ‘삼성시조제사재단’에게 성소 보존 허가를 내린 배경이나 의도, 장소 활용, 용도 등은 별개의 문제다.
1936년 제주도 조사차 삼성혈을 방문한 또 한명의 일본인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치(泉靖一)는 이렇게 말한다. “음력 4월10일과 10월10일, 춘추 두 차례 대제와 매달 삭망에 지내는 소제가 있다. 대제 때는 전도 세 성씨 중에서 초헌·아언·종헌의 삼헌 제관을 뽑는다. 주된 제물은 일곱 마리의 소(그 무렵은 비용 절감을 위해 돼지로 대용하고 있었다), 이 성지에서 빚었다는 소주, 그리고 계절에 나는 것(추제 때 내가 본 것은 과일, 표고버섯, 대추, 은행, 말린 고기, 말린 오징어 등이었다)을 올린다. 소 또는 돼지는 내장을 꺼내고 털을 뽑아 날것으로 한 성(聖)에 두 마리씩 올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제사 후 식사를 위해 마련된다. 제는 그날 오전에 지낸다. 그 순서는 문서화돼 있다.”
이러한 전통은 그 세부적인 내용은 변했지만 고양부삼성사재단(1962년부터 본 명칭 사용) 주관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제주도의 여러 신화적·역사적 장소들 중에서 신화적 친화, 역사적 변용, 문화적 윤색을 띠며 그 독자성과 명맥을 오랜 세월 유지해 온 사적(事跡)은 삼성혈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 옛날 당초에는 자생적으로 소박하게 문화가 형성·실천되다가(독자성), 주변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변용(관계성)되고, 나아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새롭게 포장(경쟁력)되기도 하며 그 존재가치와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바로 그런 곳.
바라건대,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제주도 관광명소로, 도민들에게는 삼성시조를 기리고 고·양·부 삼성재단의 전유물이라는 정도의 이미지가 아닌, 도심 속 우주의 기운이 넘치는 성(聖)숲, 제주도 시조탄생신화를 가능하게 한 고대 동아시아 탐라의 무대, 나아가 세계신화연구의 메카로 그 장소성을 더욱 살리고 확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고영자(미학자·번역가)
“고양부 만의 삼성혈 아닌 동아시아 속에서 가치 찾겠다” 1921년 11월 10일 설립해 어느덧 100년 역사를 바라보는 재단법인 고·양·부삼성사재단.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34호 ‘삼성혈’을 관리하면서 건시대제(乾始大祭), 벽랑국삼공주 추원제, 장학사업, 탐라문화상 등 제주 역사의 뿌리를 지키며 도민과 함께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1월 취임한 고정언 고·양·부삼성사재단 이사장은 “전통은 지키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는 삼성혈과 재단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다음은 고 이사장과 1문 1답. Q. 고·양·부삼성사재단에 대해 소개한다면? Q. 임기 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싶은 사업은? Q. 삼성혈과 재단이 도민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