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간·소리 공동기획-포토파일] ⑥ 식민지 수탈의 흔적...섬사람에게 ‘항구’와 ‘배’란?

지난해 독립언론 <제주의소리>는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기록연구소 '하간'과 공동기획으로 <하간+소리: 포토파일>을 선보였다. 2020년 올해도 이 공동기획을 이어간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계기로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보다 앞장서서 서구의 제도와 학문을 도입하며, 세계를 향한 정복의 야욕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에게 향한다. 그 세력들 중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 및 지역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학문이론(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 민속학, 언어학 등) 정립과 유포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분야에 뛰어든 일본인 학자들은 군사력까지 동원하며 현지 조사를 단행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탈맥락적·탈역사적인 연출·분장을 요구하며 해당 민족의 지리, 관습, 민속, 제도, 일상생활 등을 조사·촬영했다. 이처럼 20세기 전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수탈 정책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 현지 학술조사를 토대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조사 대상지에는 제주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대표 고영자) + 제주의소리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사·촬영된 당시 제주도 사진들 중 시사성이 짙고, 기록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 당대 제주도를 다각적으로 접근, 재조명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필자·편집자 공동 주]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섬엔 크건 작건 반드시 ‘배(船)를 붙일만한 곳’이 있다. 제주사람들은 이러한 곳을 전통적으로 ‘개, 개창, 개맛, 돈지, 성창’ 이라 불렀다. 이를 유식하게(?) 표현하면 ‘천연포구’다. 거기다 바다로 뾰족하게 뻗어 나온 육지, 즉 ‘코지(곶·串)’는 지난 날 천연포구의 자연방파제다. 코지가 없으면 어촌사람들은 주위에 돌을 쌓아서 어선들의 안식처를 마련했다. 

반면, 내(川)가 있어 바다와 만나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마을인 경우는 하천 하구(河口)가 그 자체로 방파제이자 천연포구가 되는 곳도 있었다. <사진1>은 1890년대 촬영된 제주시 옛 건입포 풍경이다.

사진1. 1890년대 산지천 하구와 옛 건입포. (가톨릭출판사, 1986. 《사진으로 본 100년 전의 한국》)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1. 1890년대 산지천 하구와 옛 건입포. (가톨릭출판사, 1986. 《사진으로 본 100년 전의 한국》)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당시 만해도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바다로 흘러가버리지 않고, 하천 하구에서 ‘ㄱ’자로 깊숙이 꺾여 흐르면서 바다와 만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천 양안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고, 하천 하구는 그 자체로 수척의 작은 돛단배들이 정박할 수 있었던 천연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좌측으로는 사라봉에서 서쪽으로 길고 완만하게 형성된 금산언덕이 마치 병풍처럼 산지천 하구까지 펼쳐져서 포구와 민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대 풍경은 1926년부터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제 행정당국은 제주도 관문에 버금가는 산지항(서축항·동축항이라 불렀음) 수축공사 착수를 발표했다. 산지항은 1926년 1차 공사를 착수, 2차(1928년), 3차(1935년)에 걸쳐 완공되는 대사업이었다. 1차에서는 3000만원의 예산으로 1만7000여 평을 매립하고 160間(간) 길이의 방파제를 쌓는다는 계획이다(동아일보, 1926년4월28일자).

이렇게 하여 현재 서부두 제주시수협어시장 자리에 ‘서축항’이 탄생하게 되었다. 해방 후 우리에게 익숙한 서부두 자리다. 1927년 4월 22일 서축항 현장에서 성대한 축항기공식이 열렸다. 도내·외 인사가 참석하였고, 시민들은 연이틀 축하행렬과 소인극을 펼쳐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볼 수 없었던 성황을 이루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동아일보, 1927년4월28일자). 

축항 공사는 제주성담을 헐어서 나온 돌로 바다를 매립하면서 이루어졌다. 1928년 제2차 산지항 확장공사 때부터는 금산언덕 단애를 이루는 다량의 암반과 흙을 깎아 내서  바다 매립하는데 사용하였다. 

사진 2. 1928년 산지항 확장공사를 위해 금산언덕 단애 암반 제거 광경. (조선총독부, 1929, 《생활상태조사》)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 2. 1928년 산지항 확장공사를 위해 금산언덕 단애 암반 제거 광경. (조선총독부, 1929, 《생활상태조사》)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2>는 사람들이 금산언덕 단애 암반과 흙을 캐고 파내고 있는 장면이다. 지면엔 그것들을 운반할 수단인 ‘도라쿠’ 선로(광차궤도)가 깔려있다. 1928년 5월 토목기사 가지야마 아사지로가 내도하여 서부두 쪽 방파제 건설 현장을 시찰할 당시, 그의 기록에는 이 일대 동쪽 해안 단애가 깎이고 거기서 캐낸 암반과 흙이 광차궤도로 한창 운반되고 있었다(‘濟州島紀行’, 《조선》160호, 1928년9월호)고 적고 있다.

한때 이 언덕 아래 용암바위는 돔, 볼락, 키사미 등을 잡는 낚시터였는데……. 이제 옛 포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금산 언덕 위 밭과 황무지를 깎아 무너뜨려 평평히 만들고, 위의 바위지대 부근에도 그 흙을 운반해서 평지로 만들어 각각 전분공장과 주정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1920~1930년대 근대식 항구 ‘산지항’의 등장은 자연경관의 변화뿐만 아니라 제주사회에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애초 행정당국은 산지항 축조 이유를 ‘암초가 많고,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바람을 피할 곳이 없어 풍랑이 심하면 선박의 출입이 불가하여 지방발전에 막대한 지장’(동아일보, 1926년4월28일자)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신항만이 정비됨에 따라 당연히 선박의 출입이 용이하고 빈번해졌다. 그들이 공언한대로 ‘지방발전에 막대한 지장’ 하나를 크게 극복한 셈이다. 산지항은 근대화·산업화 물결에 노출되며 사람·물류의 집산지로 부상한다. 항구 주변에 어시장을 비롯한 세관, 선박회사, 제재소, 통조림공장, 전분공장, 단추공장, 조선소, 자동차정비소, 잡화점, 여관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산지항에 이웃한 칠성통과 북신작로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민촌도 형성되었다. 측후소 옆에는 공신정을 헐고 일본인들을 위한 기도처 신사도 건립되었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한반도 일대에 부상한 항구들은 사람·물류의 집산지라는 이면에 일제에 의한 자원수탈의 전진기지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시기 새롭게 부상한 제주도내 5개 포구(산지항, 한림항, 모슬포항, 서귀포항, 성산포항) 모두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굳이 이 섬에 집단을 형성하면서까지 살았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제주도민들에게 있어 항구는 희망이자 두려움이고, 기회이자 좌절이며, 만남이자 이별, 용기이자 주저함 등이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연결하는 정기항로 ‘판제선(阪濟線)’이 개설되면서 아마사기기선(尼崎汽船) 회사 소유의 객선 ‘제1군대환(669톤, 1891년 네덜란드 건조)’이 출항했다. 그런데 이 낡은 배는 1925년 9월 제주도 동남부를 항해 하던 중 태풍을 만나 좌초되었다. 1926년부터는 ‘제2군대환(919톤, 1886년 건조 러시아 군함 개조)’이 출항했다. 1945년 4월 중순 오사카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격침될 때까지, 20여 년간을 제주도 사람들을 오사카로 또는 제주도로 실어 날랐다. 오사카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를 들려 제일 먼저 기항하는 곳은 산지항이었다. 

<사진3은> 1934년 8월 2일 일본인 지리학자 마스다이치지(桝田一二, 1895~1974)가 오사카항에서 제주인들과 같은 배에 승선해서 제주 산지항 먼바다에 도착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한시라도 빨리 고향 땅 밟고 싶어 애타게 종선을 기다리는 풍경이다. 오사카에서 8월1일 승선해서 오늘은 8월 2일. 제주 상륙 바로 직전 순간이다. 그러나 제2군대환은 너무 커서 산지항에 직접 접안을 못하여 먼바다에 배를 정선 시키고 있으면, 종선(從船)인 나룻배가 와서 사람들을 태워가고 태워 왔다. 

사진 3. 종선(從船)이 오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제주도 출향 귀환자들. 종선이 거의 다가오고 있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34년 8월 2일 마스다 촬영) 제공=고영자&nbsp;ⓒ제주의소리
사진 3. 종선(從船)이 오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제주도 출향 귀환자들. 종선이 거의 다가오고 있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34년 8월 2일 마스다 촬영) 제공=고영자&nbsp;ⓒ제주의소리

이날 마스다가 탄 배에는 승객 565명이 승선했다. 그 중 일본인은 그를 포함 총 5명뿐이었다. 승객정원이 365명이었다고 알려졌는데, 늘 이 배는 600명 남짓 승선해서 현해탄을 수천 번 드나들었던 것이다.

참고로, 마스다이치지는 시코쿠(四国) 도쿠시마(德島) 출신 지리학자로 일제강점기 1930년대 제주를 오가며 현지조사를 하며 제주의 인구, 지리, 취락, 해녀, 축산, 용천수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남긴 인물이다. 후에 마스다이치지는 릿쇼대학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34년 8월 1일 그는 제주도 조사차 제2군대환을 타는 순간부터 오사카항 잔교에서부터 제주해역에 접어들었을 때까지 제주도민들의 모습과 표정을 찍었다. 그는 해방 후에도 1971년도 제주도지역개발 고문으로 초청될 만큼 제주도 통이었고, 제주도뿐만 아니라 이민의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았다.

<사진4> 또한 같은 날 그가 찍은 것이다. 지금 ‘제주시수협어시장’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종선 두 대가 우선 당도해서 상륙하고 지인들끼리 상봉하는 장면이다.

사진 4. 종선으로 산지항에 내려 제주도 땅 밟는 도민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34년 8월 2일 마스다 촬영)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 4. 종선으로 산지항에 내려 제주도 땅 밟는 도민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34년 8월 2일 마스다 촬영)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2020년 1월 8일, 산지항의 모습. ⓒ제주의소리
2020년 1월 8일, 산지항의 모습. ⓒ제주의소리

그 사이 산지항 해역 먼바다에 있는 제2군대환은 산지항 멀찌감치서 손님들을 내려주고 제주도를 서쪽으로 일주하며 면 소재지 10여 곳에 기항했다. (산지·한림·고산·모슬포·서귀포·표선·성산포·김녕·조천·다시 산지항으로). 월 3회 운항했는데, 일본행 때도 각 마을 항구를 돌며 손님들을 싣고 오사카를 향했다.

마스다이치지에 의하면 1930년대 당시 일을 위해 오사카를 오고가는 제주도민 수가 1933년 도항 2만9208명, 귀환 1만8062명, 1934년에는 도항자만 약 5만명, 전도민의 25%에 해당할 정도로 증가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 원인으로는 오사카~제주 간 직통항로의 정기개항이 가장 결정적이다. 또 경쟁 선박회사의 출현하여 경쟁에 따른 파격적인 운임제가 도민들로 하여금 오사카로 도항을 조장, 1932년에는 제주~오사카 운임이 부산~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운임 보다 쌌다는 점, 당시 오사카~제주도 사이 단 3엔(円) 균일제를 채택했다. 제주도 전역 200km에 달하는 그 어떤 포구에서도 요금이 동일하여 부담이 없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이지만 일단 승선만하면 오사카 축항에 도착하고, 오사카 잔교(棧橋)에 편안히 접안할 수 있었다(桝田一二 지리학 논문집[1976년, 東京: 弘訽社, 113쪽])고 적고 있다.

당시 도일이 개인의 생계를 위해 내린 결정이라 개인사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집을 떠나 ‘출가물질’, ‘출가노동’ 이라는 식민지 경제시스템의 작동은 공동체의 와해,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힘, 생활터전 빼앗김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 면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섬사람으로서 ‘항구’와 ‘배’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고영자(미학자·번역가)

“게 잡고 수영하며...추억 가득한 산지 마을”
[인터뷰] 김익수 향토사학자

김윤식의 ‘속음청사’, 이익태의 ‘지영록’, 김정의 ‘노봉문집’ 같은 많은 역서를 편찬했고 제주도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사료조사 위원 등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제주의 가치를 발굴해온 김익수(83) 향토사학자. 

고령의 나이지만 제주시 산지천 일대를 거닐면 지금도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5세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을 잡고 제주로 왔다. 그리고 유년, 청소년기 시절을 산지천과 일대 앞 바다를 뛰어놀며 자랐다. 그래서일까. 산지천 확장, 해안 매립 등 산지천 일대 크고 작은 역사와 변화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든 친구들과의 모험(?), 여전히 생생한 할머니표 ‘게죽’의 맛을 떠올리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찬 바람이 세차게 몰아친 8일, ‘제주의소리’는 김익수 사학자를 만났다. 그는 옛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모습이 바뀌어버린 산지천 일대가 원도심의 오명에서 벗어나, 다시 도민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자리 잡길 기원했다.

ⓒ제주의소리
8일 옛 산지항 일대에서 인터뷰 중인 김익수 향토사학자. ⓒ제주의소리

Q. 산지천과 제주항만 일대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나?

A. 물론이다. 일본놈들이 사라봉을 깎아서 확보한 골재로 바다를 메워서 땅이 생겼다. 이 일대를 ‘바당길’이라고 불렀다. 차례로 매립을 하면서 동축항, 서축항을 만들었는데, 제주성을 쌓았던 돌도 가져다가 매립했다. 사라봉을 깎으니 굴이 등장했다. 그때 중국 한나라 시절 유물도 나와서 화제가 됐다. 산지천 쪽 해안가부터 오리엔탈호텔까지 전부 수많은 먹돌이 뒤덮인 해안이었다. 중간에는 모래사장도 있었다.

Q. 환경이 변하면서 주민들의 삶도 달라졌을 것 같다.

A. 김만덕기념관 뒤쪽에 있는 이 금산물은 주민들의 상수원이었다. 목욕탕도 있었다. 예전 주정공장에서 고구마를 푹 찌려고 보일러를 가동했다. 그러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데 원래 공장 노동자들이 목욕하는 용도였지만, 다른 시간에는 동네 사람들도 몸을 씻을 수 있게 했다. 지금으로 치면 공동목욕탕인 셈인데 이게 제주 최초의 목욕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라껍질을 가공해 단추를 만들었던 공장, 측우소와 그곳으로 올라가던 높은 계단, 조선소 모두 이 근방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때 먹을 물을 길러 가다보면 일본군을 자주 봤다. 명칭은 아카사카부대였다. 긴 가죽 장화를 신고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났던 소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Q. 당연히 추억도 많겠다.

A. 난리도 아니었다. 죽을 뻔 했다.(웃음) 항구 일대는 예전 산지 아이들 놀이터였다. 한낮 햇빛을 받아 달궈진 시멘트 바닥에 엎드리면 참 따뜻하다. 등대까지 나가서 다이빙도 많이 했다.

수영을 금방 배운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이어서 어른도 없겠다 싶어 서축항 쪽 코지에서 바다 수영에 나섰다. 얼추 보니 반대쪽까지 금방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수영을 시작했다. 평형으로 가는데 점점 힘이 빠졌다. 조반도 안 먹고 헤엄쳤으니 말이다. 바닷물을 잔뜩 먹고 겨우 조선소 쪽으로 빠져나왔다. 한참을 구토하고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친구 6명이 모여서 선원 모르게 커다란 배에서 보트를 내려 등대 바깥으로 나갔다. 국민학교 졸업 기념으로 모두 6학년이었다. 각자 준비해온 쌀을 일본군이 쓰다 버린 반합에 넣고 먹돌 위에서 끓였다. 그런데 물기 먹은 돌이라 그랬는지 돌이 ‘펑!’ 하고 폭발했다. 당연히 쌀이 다 날아갔고 쫄쫄 굶었다. 배를 움켜쥔 채 다시 돌아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아무리 노를 저어도 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주정공장까지 흘러갔다. 그때 주정공장 근처에는 좌초된 미군 배가 있었다. 미군 배 옆에 붙었다가 밀리면 다시 붙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물때가 바뀌고 나서야 겨우 노를 저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바다 위에서 6시간은 헤멘 것 같다. 부모님께 매 한 대씩 맞았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웃음)

동물 내장을 구해다가 줄에 묶어 바닷물에 넣어놓으면 게가 달라붙었다. 그것들을 잡아서 할머니께 가져가면 ‘게죽’을 만들어줬다. 손자가 잡아왔으니 기특하다며 귀한 쌀을 내어주신 셈이다. 그 게죽이 참 맛있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게를 잡았다. 조선소 해안가 틈에도 참 많이 있었다.

청소년 시기까지 보낸 마을인데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구시가지가 돼서 젊은 사람들이 없다. 탐라문화광장도 만들었는데, 추억을 간직한 산지천 일대가 예전처럼 도민들이 많이 찾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 / 인터뷰 = 한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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