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워싱턴지구 제주도민회 이호석 회장. 1948년 서귀포생. 서귀초교-서귀중-서귀농고를 졸업한 오리지널 서귀포 토박이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에 근무하는 이중석 원예실증과장이 그의 동생.

86년도에 이곳에 왔으니 미국 이민생활 20년이 넘는 셈이다. 어떻게 하여 미국으로 건너오게 됐냐는 물음에 잠깐 망설이다가 ‘한국이 싫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이 싫어서 이민간다는 사람들은 “돈은 많은데 한국 정쟁이 불안해서” 간다는 경우가 일반적인데...이회장 얘기의 뉘앙스는 조금 틀리다. 뭐가 싫어서 였을까?

▲ 이호석 회장(자택에서)
그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출신이다. 미8군에서도 근무했고 한미연합사에서도 근무하기도 했다. 71~2년도에는 중위 계급을 달고 월남에 가서 1년 정도 근무하기도 했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9연대장 시절 그 전두환 부대를 지원하는 52포병 대대 소속이었다고. 주목할 것은 군 재직 시절 주경야독으로 대학 학부(중앙대 무역학과) 및 대학원(동대학 국제경영학과)까지 마쳤다는 것. 

그의 얘기를 더 들어 보자. “군대 생활 시절, 한국의(군 내부의) 부정을 너무 많이 보았다. 전방 근무자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각종 행사 때 마다 ‘봉투’가 상납됐다. 청와대, 기자 등에게.. 아마도 나에게는 이러한 군 생활과 사회생활 사이에 융화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구수한 제주 사투리를 원단으로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이회장의 첫 인상은 ‘교장선생님’ 이다. 그러나 한편에서 원칙을 강조하는 엄격한 이미지 또한 풍긴다. 그 이유가 바로 이런 그의 (군)경험 때문은 아닌지...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그가 ‘삼사’가 아닌 ‘육사’를 나왔어도, 이렇게 직업 군인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었을까? 사람의 인연이란 모르는 것이니...

처음 미국 온다니 아내는 반대했다. 그래서 우선 혼자 미국에 들어왔다.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은 후에야 학생비자를 받아 가족들을 데려 왔다. 이후 졸업학위를 따기 위해 엄청 고생했다. 일하면서 등록금 벌어야 하고 레포트 써야 하느라고... 당시 영주권 신청 기준이 석사학위여서 죽어라고 노력하여 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영주권 나왔다.

"대한민국 육군 중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 없는 줄 알았다"

미국에 자리잡기까지 안한 일이 없다. 리쿼스토어(Liquor Store:주류 판매점) 점원, 식당 점원, 목수, 세탁소 일 등... 이중 목수 일은 30대 후반에 했었는데 주로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들이 많아서 힘들어 오래 못했단다.

“(미8군, 한미연합사 근무 당시에는) 대한민국 육군 중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미국 본토에 와서 생활해 보니 정말 못 알아 듣겠더라.”

이후 무역회사인 리브라더스 매니저 일을 3~4년 했고, 처음으로 개인사업인 ‘캔디바(초콜릿 가게)’ 스토어를 개장했는데 1년 반 만에 실패하여 문 닫게 된다. 이때가 이회장의 미국 이민 생활 시기 중 가장 어려운 때였다. 특히 장남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어서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때였다고.

이 어려운 시기를 누나와 처가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고 재기하게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편의점인 ‘Lee's mart’를 인수하여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다. 문만 열면 손님이 들어오더라는 것. 특히 눈이 많이 올 때는 더 장사가 잘됐다. 가게에 있는 물건이 거의 동날 정도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이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그들이 이회장 편을 들어 주기도 했다. 이 장사를 6년 동안 하다가, 8년 전에 팔고 현재의 '하퍼스 초이스 리쿼스토어’를 매입하게 된다. 

▲ 이호석 회장이 운영하는 리쿼스토어 외벽
▲ 이호석 회장 리쿼스토어 가게 내부
여기서 잠깐 ‘리쿼스토어’에 대한 설명을 해야할 듯 싶다. 미국에 이민 온 한인들이 '야채가게'를 하거나 이 '리쿼스토어'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주(State) 마다 제도가 틀리다. 필자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술을 사려고 하면 ‘리쿼스토어’를 굳이 가지 않더라도 ‘SAFE WAY’나 ‘Longs Drugs’라는 이른바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맥주, 와인, 양주 가릴 것 없이... 버지니아 주는 양주 판매를 주정부가 직접 관리한다. 즉 양주 판매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라는 셈이다.

그런데 이회장이 영업을 하는 메릴랜드주 하워드 카운티에서는 맥주나 와인조차도 이 리쿼 스토어에서만 팔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실제 이회장이 운영하는 리쿼스토어 옆에 있는 세이프웨이를 갔더니 주류 판매 코너가 아예 없다. 그만큼 독점적인 상권을 부여 받고 있는 셈이다. 대형마트 사업자들은 틈만 나면 이 제도를 없애고 자신들의 매장에서도 팔수 있도록 끈질기게 로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 이 카운티에서는 이 제도를 사수하고 있다고.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유통회사의 진출로 인한 지역상권의 피해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이 카운티의 리쿼스토어 정책은 이른바 지역 소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다. 자유경쟁 사회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미국 사회에서 조차 자치단체 차원의 소상인 보호 정책(최소한의 품목 제한을 통한)이 시행되고 있다. '특별자치'란 이런 때 필요한 게 아닐까?

반면 리쿼스토어 허가는 매우 까다롭다. 그 라이센스를 따려면 미국 시민권자여야 하고, 범죄 사실이 없어야 하며, 해당 카운티 지역에서 2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히어링)를 한 달 정도 거쳐 반대의견이 없을시 주어진다고.

이회장,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장남인 이승주(31세)씨는 매릴랜드대 경제학과를 나와 연방정부에서 위탁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미국 항공 관제업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이 회사의 주요한 고객이 대한항공이란다.

▲ 이회장의 두 아들. 좌측이 장남 우측이 차남.
차남인 이승학(29세) 씨는 현재 공군대위로 작년 아프가니스탄에 1년 파견갔다 왔다. 헬기 고급과정이다. 고교시절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육사, 해사, 공사 모두 합격했는데 공사로 지원해 갔단다.   

모든 이들이 미국으로 이민와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성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다시 역이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에 비해 이회장은 중간에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미국이민 생활에 연착륙한 것 같다. 이 회장은 얘기한다.

“저는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웃으며) 너무 작게 꾸어서 그런가? 군에 있을 때도 어느 보직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다 갔어요. 따로 빽을 쓰지 않아도... 미국에서의 생활도 그 소망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장사든 취직이든..그 소망이 작았을 뿐이지...”

아마 꿈을 크게 꾸었다면, 지금 그는 또 다른 큰 꿈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얘기하는 대로 오히려 큰 욕심없이 소박한 작은 꿈을 꾸었기 때문에 지금 같이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모님이 한마디 거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나요?”

▲ 이호석 회장 부부
▲ 워싱턴 외곽에 있는 이호석 회장의 전원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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