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8) 20대 찬란한 날에 만나 50대가 된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창범아

너를 처음 본 건, 1991년 그랜드호텔(지금 메종글래드호텔)에 입사하고 아마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던 것 같아. 그때 나는 지하 3층 하우스키핑에서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어. 퇴근하면 그 날은 하루 쉬고, 또 다음날 오후 6시 출근하는 스케쥴이라 같은 사무실 직원들 말고는 친해질 일이 없었지. 게다가 사무실이 지하 3층에 떨어져 있던 터라 다른 직원들하고 잘 마주칠 기회도 많지 않았고 말이야. 

그랜드호텔에서 야근하고 있을 때입니다. 1층 로비같습니다. ⓒ강충민
그랜드호텔에서 야근하고 있을 때입니다. 1층 로비같습니다. ⓒ강충민

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었다. 

지하 3층 하우스키핑 사무실 옆에는 아주 큰 세탁소가 있었어. 직원도 거의 열 명이 넘었어.호텔에서 사용하는 타월. 시트, 패드, 직원 유니폼을 직접 세탁하고 말리고 쉴 새 없이 기계들이 돌아가고 있었지. 세탁소 업무를 마감할 땐 열쇠를 하우스키핑에 보관했었어. 세탁소는 자신의 유니폼을 찾아 입으려는 직원들을 위해 저녁 6시까지는 열려있다가, 그 이후에는 하우스키핑 야간근무자가 문을 잠갔어. 세탁실이 잠겨 있으면 다들 하우스키핑 사무실에 와서 세탁실 문을 열어 달라고 했었어. 너도 세탁실을 열어달라고 왔었어. 그때 너를 봤어. 정확히는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 준 거지. 

“너 몇 살이냐?”

크로스라고 부르던 하얀 테이블보를 두 팔에 올려 품에 안듯 가져가면서 대뜸 나에게 물었어. 다짜고짜 반말로 말이야. 나는 얼떨결에 존댓말로 내 나이를 말했고, 너는 내 대답에 화들짝 리액션이 과했어.

“아, 기냐? 우리 동갑인게. 친구허게이! 게민 말 놓기여이~”(아, 그래? 우리 동갑이네. 친구하자! 그러면 말 놓는다~)

너는 크로스를 두 팔로 안고 있어 불편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어. 나는 얼떨결에 너의 악수에 응답했고, 그 순간에 네가 나쁜 놈은 아니라는 경계를 풀었다. 그때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고마움을 전한다. 

고맙다. 그때 먼저 말 걸어줘서.

창범이(사진 가운데) 졸업식날, 창범이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찍었습니다. 잘 지내고 있겠지요. ⓒ강충민
창범이(사진 가운데) 졸업식날, 창범이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찍었습니다. 잘 지내고 있겠지요. ⓒ강충민

20대 그 시절, 그랜드호텔 기숙사가 있던 문화칼라 사거리를 비롯한 신제주는 참 놀기 좋았다. 너 덕분에 식음료 업장 직원들과도 알게 되고 같이 자주 어울렸었다. 넌 참 두루두루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그런 너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돌아보게도 되었다. 이건 정말이다. 난 아직도 참 고치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본받고 싶은, 너의 사람들을 늘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 나도 노력하마. 늘...

서창범(오른쪽) 졸업식날 같이 찍었습니다. 스타일이 지금보다 더 아버지 같습니다. ⓒ강충민
서창범(오른쪽) 졸업식날 같이 찍었습니다. 스타일이 지금보다 더 아버지 같습니다. ⓒ강충민

  도순리 노인회장 취임식, 넌 참 착한 아들이다. 

네가 참 괜찮은 친구란 걸 느낀 건 너와 도순마을을 갔을 때였어. 어느 날 니네 집, 도순리를 같이 가자고 했다. 얼떨결에 부모님 뵈러 간다길래 따라나섰고 도순리에 도착해서는 영문도 모르고 2층 마을회관으로 따라 올라갔지. 얼핏 봐도 60명은 족히 넘게 어른들이 마을회관 바닥에 모여 앉아 있었어. 회관 정중앙에 ‘도순마을 노인회장 이취임식’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 신임회장이 노인회장에 정중앙 마이크가 놓여진 단상에서 인사를 했다. ‘아, 창범이 너의 아버지시구나.’ 

그때였어. 기다렸다는 듯, 네가 차에 싣고 온 종이박스를 열고는 모인 어른들에게 비싸보이는 하얀 수건을 한 장씩 돌렸어. 다른 상자에 예쁘게 포장된 떡도 함께 말이야. 얼떨결에 나도 같이 그것들을 돌리면서 도순리 어른들에게 고마움과 칭찬을 같이 받았어. 

“아이고 이거 무신 일이니게... 아고 이추룩 고마운 일이 어디시니게. 아고게! 아고게!”(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니...아이고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있나. 아이고! 아이고!)

잔잔한 썰물처럼 깜짝 행사가 지나고 그때 네가 한 편에서 조심스럽게 얘기하더라. 정중앙 마이크가 아니고 그 자리에서 말이야. 아주 겸손하게...

“저 오늘 취임한 노인회장 막둥이 마씀... 별거 아니우다. 우리 아버지가 드리는 거우다. 고맙습니다.” 

참 이상도 한 일이지.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나더라. 그때 내 옆에 계셨던 너의 어머니가 나에게 “자이 무신 돈 이성 정 햄시니?”(쟤 무슨 돈이 있어서 저렇게 하나?)하면서도 미소짓고 계시더라. 난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너의 어머니 손을 꼭 잡았어. 어머니도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말이야. 그리고 그때 유달리 환하게 미소짓던 분에게 네가 나의 손을 이끌고 가서 엉겹결에 인사했어. 네가 큰 소리로 나를 소개시켰어. 

“어머니! 야이 나 친구마씀. 야이 효돈사는 아이우다”(어머니, 얘 나 친구입니다. 얘 효돈에 사는 아이입니다)  

네가 얘기했던 너의 큰 어머니, 너의 아버지의 첫 부인이셨지. 나는 인사를 하고 큰어머니를 안아드렸어. 내 마음속에서는 감동과, 따뜻함과, 서글픔 그런 많은 감정들이 뒤엉켰어. 하지만 이 생각은 또렷하게 들었어. ‘창범아 너는 참 착한 아들이다. 나도 닮고 싶다.’

창범이(오른쪽)가 신랑 입장하기 전, 역사적 순간이라며 같이 찍었습니다. ⓒ강충민
창범이(오른쪽)가 신랑 입장하기 전, 역사적 순간이라며 같이 찍었습니다. ⓒ강충민

  너는 롯데호텔 제주 마스터셰프. 나는 논술 선생님,  각자에게 맞는 길은 따로 있었다 

아! 다음 네 삶의 행로를 얘기하자면, 화북에 있던 일식집부터 말해야겠다. 너는 그랜드호텔 식음료를 그만두고 일식을 배워야겠다고 했다. 그랜드호텔을 퇴사하고, 화북에 있는 일식당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다 기억난다. 식당 청소부터 차근차근 밟아 간 너의 궤적을 다 안다. 그랜드호텔 일식조리장 출신이 운영하는 곳에서 밤늦게까지 홀과 주방을 정리하고, 무로, 당근으로 회 뜨는 연습을 수없이 하던, 너의 그 고단했던 노력을 안다. 일본 가정식을 수없이 외우고 반복했었다. 너의 일식조리사 자격시험 과제 중 하나는 계란찜이었다. 진심으로 너의 그 부단한 노력을 존경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때 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준 묵은지 초밥은 진짜 맛이 없었다, 존경은 존경이고 솔직해져야겠다. 

창범이 결혼식때 제가 사회였습니다. “어머님께 드리는 글” 을 제가 써서 읽고 결혼식장이 울음바다였습니다. ⓒ강충민
창범이 결혼식때 제가 사회였습니다. “어머님께 드리는 글” 을 제가 써서 읽고 결혼식장이 울음바다였습니다. ⓒ강충민

일식 조리사로서 다시 그랜드호텔로, 제주칼호텔로 결국 지금의 네가 있는 롯데호텔 제주에서 마스터 셰프에 올랐다. 난 술 마실 때마다 너를 놀리듯, 배 아픈 것처럼 “에이 뭐 그딴 거 나도 하겠다.” 했지만, 아니다. 정말 솔직히 너를 인정하고 대단하다는 걸 안다. 내 친구, 넌 참 올곧게 그래 이 짧은 몇 줄의 글로 너의 과정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딱 한 마디로 정의하면 너는 참 열심히 살았다. 인정한다. 

롯데호텔제주 마스터셰프 서창범. 제 친구입니다. 제가 다 자랑스럽습니다. ⓒ강충민
롯데호텔제주 마스터셰프 서창범. 제 친구입니다. 제가 다 자랑스럽습니다. ⓒ강충민

네가 일식으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나도 덩달아 제빵을 배운다고 제주를 떴었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때 나는 제빵보다는 제주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싫었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서 재빨리 그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앞이 안 보이는 우리 엄마조차도 싫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부끄럽게도 말이다. 전에 나의 글에서도 밝혔듯 윤흥길의 『꿈꾸는 자의 나성』 의 사내처럼 늘 제주를 떠난 모든 곳이 나의 나성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편지에 제대로 써야겠다. 

반년,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다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창범아, 네가 날 제일 걱정해주고 반겨주었어. 그 덕분에 나는 논술선생님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책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렇게 글을 쓰고, 맞아 다 각자에게 맞는 길이 있었던 거야. 나는 참 그때 하루하루 미래에 대해 조바심내고 그렇게 살았다. 그때 네가 있어 주었다. 

  좋은 친구의 우선 순위는 따뜻함이야

창범아!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랜드호텔에서 만나, 지금껏 전환기에는 늘 같이 있었다. 그 시절 내가 갈팡질팡 흔들릴 때마다 너는 “야, 충민아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하며 한껏 무게 잡으며 얘기하곤 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무시했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친구를 사귈 때 그 사람에게 본받을 점을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도 있던데, 나는 아니다. 네가 그 힘든 과정을 겪고 롯데호텔 제주 마스터 셰프가 된 너의 이력을 존경해서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다. 너는 참 따뜻하다. 나는 그 따뜻함을 좋은 친구의 가장 최우선순위로 생각한다. 

서로의 어머니를 얘기하다 밤새껏 같이 울고, 열받은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그땐 빈말이라도 그 대상을 같이 신랄하게 욕해 주는 그런 따뜻함 말이다. 

내가 결혼할 때, 가문잔칫날 너의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일부러 그 저녁에 일부러 도순리에서 우리 집 신효까지 오셨다. 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고맙다, 고맙다” 하셨다. 

네 아버지 장례식날 너의 어머니는 치매증상 있으셔서 사람들을 제대로 맞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내가 “어머니! 나 누게꽈?” 하고 큰 소리로 묻자 “빵장시, 창범이 친구, 우리 아덜!” 하셨다. 그리고 비로소 내 손을 잡고 의자에 앉아 밥을 드셨다. 

그 후 나는 서귀포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앞두고 계셨던 너의 어머니 손을 꼭 잡아드렸다. 너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왠지 미안하다. 그냥 우리의 어머니다. 

올 2월초에 찍었습니다. 시간이 참 많이 지났습니다. 소년같았던 20대에서 어느덧 50대 중반입니다. ⓒ강충민
올 2월초에 찍었습니다. 시간이 참 많이 지났습니다. 소년같았던 20대에서 어느덧 50대 중반입니다. ⓒ강충민

참 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 네 각시 송반장. 미숙이와 셋이서 어울려 참 재미있었다. 결혼식장에 있던 모든 하객을 울음바다로 만든 너의 결혼식 사회도, 또한 너는 나 없을 때도 우리 집에 불쑥 사탕사고 와서 우리 어머니 드리고, 손 잡아주고 안아드리고 갔던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은 어머니는 내가 집에 오자마자 얘기 늘어놓으며 좋아하셨다. 지금도 자주 너 얘기 하신다. 엄마는 오늘도 물었다. “도순리 따인 잘 이시냐?”(도순리 아이는 잘 있어?) 

창범아. 

어색하게 앞으로도 뭐 어떻게 하자. 저떻게 하자 이런 말은 안 한다. 그런 건 말로 해서 바뀌거나 다짐처럼 되는 것은 아닌 건 서로 잘 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술 먹을 때마다 나를 찾고 전화질을 해대고 문자 보내는 거 그냥 용서한다. 전에도 너의 이야기를 썼었다. 화내지 않기로 말이다. 

너 말처럼 같은 요양원가자. 너의 동서이자 형인, 나의 선배님인 정필이형도 같이 가는 걸로 하자. 그땐 사소한 걸로 서로 싸우는 거 없어질까? 글쎄.... 똑 같지 않을까. 지금처럼. 

익숙한 것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런 마음 잊어버리기 전에 너에게 늘 전하고 싶었다. 창범아 고맙다.

2022년 3월 31일 
친구 강충민이 보낸다. 

* 추신: 내 목 통중 나아지면 “달아놀자” 에서 술 마시자.

# 강충민 시민기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사회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좋아하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라초등학교 인근에서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강충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강충민시민기자 블로그 가기 ⇒ http://blog.naver.com/som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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