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특집] 직권재심 무죄 故 고두천씨 유가족 판결문 올려 차례...“하늘나라서 기뻐하실 것”

"무죄랜 햄수다. 무죄우다, 무죄! 아버지, 삼춘! 하늘나라에서 기뻐하고 계시지예?"
차례상에는 과일과 고기, 술 등 정성스럽게 마련한 갖가지 제수와 함께 하얀 서류 뭉치가 올려졌다. '제주지방법원 제4-2형사부 판결문'. 70여년 전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 30인에 대해 제주법원이 직권재심으로 무죄를 결정한 판결 문서였다.
제주4.3 유족 고윤권(68)씨의 임인년 추석 명절은 특별하다. 해마다 억울함에 눈물 짓던 명절이었지만, 4.3수형인에 대한 무죄 결정은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게된 계기가 됐다.
추석 명절 밥상은 모처럼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차례상을 준비하는 손길도 흥이 났고, 그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냉전 역사를 알리 없는 어린 손주들도 그간 터부시해왔던 작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故 고두천. 삼촌이자 아버지였던 희생자는 7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무죄 판결로 해원하게 됐다.
고씨의 가문은 4.3의 광풍으로 인해 아버지 대에 풍비박산이 났다. 우애 좋은 삼형제 중 목숨을 부지한 것은 둘째 뿐이었다. 특히 셋째 동생인 故 고두천씨는 1949년 2차 군법회의 당시 국방경비법 위반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희생됐다. 4.3당시 대전형무소에서 수형됐다가 골령골에서 총살, 암매장당했다는 것을 기록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째인 故 고두규씨는 자신의 아들들을 기꺼이 첫째 형님과 셋째 동생의 집안에 양자로 들여보냈다. 집안의 멸족은 면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같은 시기 4.3으로 인해 희생된 작은 할아버지 집안에도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를 보냈다.

고윤권씨의 형제들은 한 평생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선대의 비극이 자식 세대에도 고스란히 전가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故 고두규씨는 형제들을 허망하게 보내고 한 평생을 원통함 속에 살아가야 했다. 동네 유명하다는 심방들을 찾아다니며 해원굿을 벌였다. 동생인 故 고두천씨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기에 형님의 묘 옆에 추모비를 세워 넋을 기렸다.
억울하게 희생된 것도 모자라 동생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것은 더욱 가슴 한 곳을 응어리지게 했다. 유가족들은 아버지인 故 고두규씨가 20여년 전 세상을 등지면서도 형제 없이 살아간 평생의 외로움을 토로했던 것을 회고했다. 동생(故 고두천)과 함께 제삿밥을 먹게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셋째 형제인 故 고두천씨의 가정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간 고윤부(71)씨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고인을 더욱 극진히 모셨다. 작은아버지가 희생된 대전 골령골 현장도 대여섯번씩 다녀오면서 제주도 술을 주변에 뿌리며 넋을 기려왔다. 건강이 악화된 최근까지도 4.3 군법회의 재심을 위해 힘을 쏟았다.
법원의 이번 무죄 결정은 70년 세월의 결실이 됐다.
고윤권씨는 "우리 집안으로서는 너무 큰 경사"라며 "가족들을 떠나보낸 후 굿을 하고 절에 다니며 어려운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아버지의 평생의 외로움이 풀리게 됐다"고 기뻐했다.
고윤권씨는 "특별법이 통과되고, 무죄 판결까지 받으면서 모든 형제들과 조카들이 무한하게 기뻐했다. 형님과 함께 벌초에 가서도 작은 아버지께 고했다"며 "저희 마음도 그렇지만,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 작은 아버지도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