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닭백숙에 녹아든 한반도의 그늘…제주4.3, 국민을 위한 정부는 없었다

13일 오후 2시, 제주CGV에서는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한 4.3희생자 유가족 초청 '수프와 이데올로기' 특별상영회가 열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재일교포의 가족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직시하는 영화다. ⓒ제주의소리
13일 오후 2시, 제주CGV에서는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한 4.3희생자 유가족 초청 '수프와 이데올로기' 특별상영회가 열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재일교포의 가족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직시하는 영화다. ⓒ제주의소리

무차별적이고 잔혹하게 숨통을 죄여오는 국가폭력의 총검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뒤 일본으로 향한 제주인들. 국민을 지켜야 하는 정부의 실체는 사라졌고 이데올로기만 남아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저 길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이 수상하다거나 해안선으로부터 3km 위쪽에 살고 있다거나 죽음을 피해 몸을 숨겼거나 하는 ‘학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어이없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간 제주4.3의 일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불어닥치는 피의 광풍에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라도 써야 했다. 故 강정희 어르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여덟의 나이로 남동생의 손을 잡고 여동생을 등에 업은 뒤 일본으로 향한 어르신은 그렇게 재일조선인이 됐다. 

4.3당시 일본 오사카로 넘어간 뒤 정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 활동하며 아들 3명을 북으로 보낸 강 어르신의 막내딸,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배급 ㈜엣나인필름)’ 제주4.3평화재단 4.3희생자 유가족 초청 특별상영회가 13일 제주CGV에서 열렸다.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제주 관덕정 마당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는 어르신의 장면에서 시작된다. 

병원에 입원해 대동맥류 치료를 받고 있던 어르신은 그날의 끔찍한 기억의 조각 일부를 겨우 꺼낸다. “절대 누구한테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는 가슴 아픈 함구령과 함께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한 장면. 강정희 어르신이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의소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한 장면. 강정희 어르신이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의소리
강정희 어르신이 딸인 양영희 감독과 사위 아라이 카오루와 제주를 찾은 모습. 강 어르신은 재일조선인으로 여행허가서를 받아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제주의소리
강정희 어르신이 딸인 양영희 감독과 사위 아라이 카오루와 제주를 찾은 모습. 강 어르신은 재일조선인으로 여행허가서를 받아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제주의소리

강 어르신은 4.3 당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밀항, 재일교포가 많은 이쿠노쿠에서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어르신은 당시 조총련 활동을 하고 있던 남편과 함께 재일조선인이 돼 아들 셋과 막내딸을 낳았다. 

당시 오사카에 넘어간 사람들 대부분은 ‘남한’ 측 사람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조총련 활동을 많이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국가가 국민을 향해 생명을 앗는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 

국민을 지켜야 할 정부가 없었고 있더라도 믿을 수 없었으니 당연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 오랜 군사독재의 암흑 속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현실을 멀리서 봐온 이들은 당시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였던 북한에 몸을 의지했다. 

정치와 일상을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어르신도 조총련 활동에 참여하며 살아왔다. 세 명의 아들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북으로 넘어갔다. 이후 어르신은 가족을 위해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면서도 “가족이니까”라는 말과 함께 돈을 송금한다. 많은 빚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남편이 미국인과 일본인 사위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어르신은 딸이 일본인 사위를 데리고 도쿄에서 오사카를 찾은 날 인삼과 마늘을 듬뿍 넣은 닭백숙을 푹 고아내며 반갑게 맞이한다. 

어르신의 딸, 양 감독은 이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4.3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제주를 찾은 날,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평생을 북한에 보낸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4.3을 알고 더 이상 탓할 수 없게 됐다. 

북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모두 보냈던 엄마, 강정희는 그렇게 닭백숙이라는 ‘수프’를 끓이고 끓여 이데올로기가 뭉개져 사라지도록 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밥은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과 함께. 

양 감독이 앞서 제작 발표한 영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세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영화는 4.3생존희생자이자 재일교포 1세인 어르신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영화는 조총련 생활을 해온 재일조선인 부모님을 둔 딸이 일본인 사위를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아픔을 한 개인 가족의 인생사를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흰기러기상) △제17회 야카카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 경쟁 초청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초청 & 집행위원회 특별상 △제4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평양 시네마 초청 △제24회 서울국제영화제 지금 여기 풍경: 수프에 바치는 오마주 초청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양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4.3희생자 유가족. ⓒ제주의소리
양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4.3희생자 유가족. ⓒ제주의소리
영화 상영회가 끝난 뒤 관객과 대화하고 있는 양 감독. ⓒ제주의소리
영화 상영회가 끝난 뒤 관객과 대화하고 있는 양 감독. ⓒ제주의소리

특히 지난 6월 일본 전역에서 상영된 이후 일본인들의 호평이 잇따르고 있으며 4.3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야 했던 수많은 제주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다. 

영화 상영회가 끝난 뒤 양영희 감독은 직접 무대에 올라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과 함께 관객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 소장은 강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사카 어르신 집을 찾으며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다. 

양 감독은 지난 2018년 진행된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당시 어머니와 함께 제주를 찾아 그 아픔에 공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런 양 감독은 유가족들 앞에서 영화를 계기로 사람들이 ‘제주4.3’에 제대로 알기를 바란다고 했다. 

영화 제목을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어머니는 항상 국물 없이 밥 먹지 말라고 하셨다. 한반도는 국물의 민족이라며 늘 국물을 해주셨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온 주변 분들은 모두 국물을 끓이셨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의 인생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에 ‘국물’은 꼭 들어가는 단어여야만 했고, 다른 나라에서 아무렇게 번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통적인 제목인 ‘수프’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어머니는 4.3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게 무서운 것이니 묻지 말라고,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다”며 “그렇게 70년을 기다리다 겨우 말씀을 시작하셨고, 오사카에 찾아온 4.3연구소 연구자들에게 말하며 속 안에 담아둔 한을 털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3을 우리 다음 세대가 물려받고 있으니 모두 편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다. 어머니와 4.3평화공원을 찾아 이제는 잊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기도 했다”며 “이는 나의 결심이기도 하고 후세대가 기억하고 전승하겠다는 다짐”이라고 강조했다. 

양 감독은 “사실 이런 처참한 일이 없었더라면 영화는 없었어도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영화를 통해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이고 역사는 계속 되새겨야 잊지 않는다”며 “한림 작은영화관에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상영하고 있으니 계속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관객과의 대화 중인 양 감독과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제주의소리
관객과의 대화 중인 양 감독과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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