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17) 고충석 제주대 명예교수, 前 총장

국제자유도시 출범 이후 제주는 세계화라는 파도에 떠밀려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막대한 외부자본이 투입되었고 관광객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제주에 둥지를 트는 이주민들도 늘어났다. 이로 인해 개발을 둘러싼 논쟁이 가속화되면서 혼돈의 그림자가 제주인의 정신 속에 드리우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제주인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제주인의 정신구조를 탐색하고 성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정신은 집단의 운명을 결정짓는 변수이다. 시대에 따라 올바른 지역 정신을 찾아내어 발전을 꾀해야 지역의 건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러면 제주의 지역 정신은 무엇일까? 그간 많은 학인(學人)이 제주 정신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무(三無) 정신이다. 그러나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는 삼무 정신이 제주 정신이 될 수 있을까?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는 삼무 정신은 농·어업 위주의 소규모 마을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운영되었던 제주지역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삶의 대응 방식이었다. 그 현상이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규범이 될 수는 있으나 제주를 이끌만한 역동적이고 주도적인 지역 정신이 될 수는 없다.

제주를 이끌 제주 정신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개방화 시대에 오늘날의 제주를 견인할 지역 정신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제주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故 송성대 교수의 글은 주목할만하다. 그는 동서양 고전을 횡단하면서 제주 정신에 관한 방대한 연구 저술을 남겼다. 말년에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제주문화의 원류>에는 제주의 지역 정신으로 ‘해민정신(海民精神)’을 내세우고 있다. 10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에서 그가 제주인을 이끌어온 지역 정신으로 해민정신을 내세우게 된 지난한 연구의 여정이 담겨 있다. 연구자로서 고향 사랑이 무엇인가 고뇌했던 지식인의 모습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송 교수가 말하는 해민정신은 삼무 정신을 뛰어넘어 과거 제주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정신이다. 삼무 정신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자연환경에 국한하여 나타내고 있지만, 해민정신은 자연환경에서 기인한 삼무 정신에 제주인의 정신세계를 입힌 이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송성대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궤적을 한번 추적해보고자 한다. 송 교수는 지역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 그 지역사회를 리드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과거 제주경제를 주도했던 혁신 세력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해민들이었다. 송 교수는 이런 해민들의 정신구조 속에서 제주 정신을 찾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71년 8월~10월 사이에 제주 비양도에서 촬영한 사진. 해녀들이 고된 물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연구센터
1971년 8월~10월 사이에 제주 비양도에서 촬영한 사진. 해녀들이 고된 물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연구센터

그 지역을 살아낸 사람들의 지역 정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제주도는 토질 구조상 논농사는 불가능했고 밭농사가 주종을 이뤘다. 제주 땅은 화산재로 된 뜬 땅이라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제주의 농토는 가용면적이 매우 적어서 자본주의적인 농업경영방식이 불가능했다. 이런 연유로 막대한 잉여가치를 창출하기가 어려웠다. 땅을 좀 가진 사람들도 손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육지와는 달리 글 하는 유생들도 농사를 직접 짓고 살았다. 육지처럼 대지주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불가능했다. 제주 농민들은 기껏해야 소규모 자작농이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소작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지처럼 지주, 자작농, 소작농으로 위계화되지 않았다. 대신에 ‘벵작(竝作)’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벵작이 소작과 다른 점은 갑과 을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갑과 을이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경지를 빌려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양자 간에 소출의 나눔을 2:1로 할 것이냐, 1:1로 할 것이냐를 선택해 서로 계약하는 것이다. 이 벵작문화는 제주사회가 비교적 평등사회로 가게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주자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다. 이 사람들의 정신을 선비정신이라고 했다. 제주의 해민은 평생을 손에 흙 묻히지 않고 공리공론만 일삼았던 육지의 선비들과 확연히 다른 기층민중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해민은 누구인가? 송성대 교수의 말에 의하면 바다 생활자들이다. 바다 생활자는 바다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삶의 터전이 곧 바다였던 선부, 선원, 포작인, 해상무역자(상인), 해녀, 이들이 바다 생활자들이다. 이들은 제주경제를 주도하고 지역의 부를 창출하는 집단이다. 이들을 ‘저승 돈 주워다 이승에서 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바다 생활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참치처럼 먼바다를 돌아다닌 제주인의 삶에서 참된 제주 정신을 찾아야 한다. 바다를 무대로 살아온 강인한 제주 해인(海人)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이 해민정신이다. 제주는 역사 이전 시대에는 거대한 해상왕국이었다. 제주는 절해고도라서 생활필수품이 절대 부족했다. 제주인들은 부족한 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일찍부터 일엽편주로 중국, 일본, 한반도와 교역을 해야만 했다. 제주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매우 발전했다. 제주인들은 저 무서운 바다를 제집 드나들듯 동아시아 바다를 헤집고 다녔다. 고려 고종 때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되면서 제주의 해양력은 서서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여말 선초에 들어와서는 바닷길을 완전히 폐쇄하는 해금(海禁) 정책과 공도(空島)정책, 출륙금지로 인해 제주는 완전히 갇힌 섬이 되었다. 그러나 왕성했던 해양력의 불씨는 계승되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 바닷길과 화포 제조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들도 소위 제주의 해민, 뱃사람들이었다. 제주의 무역선인 덕판배가 그 후 판옥선, 거북선으로 진화했다. 거북선의 원조가 제주의 덕판배인 셈이다. 

해녀들도 제주도에서만 물질한 것이 아니었다. 구룡포, 속초, 독도, 심지어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 제주를 떠나 먼 이국땅에서도 물질했다. 이들이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거친 파도와 싸우며 생활한 해민이다. 그들은 대단히 도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일엽편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상대로 삶을 살아낼 수 없었다. 송성대 교수는 제주경제를 주도했던 해민들에게서 제주 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민정신은 개척정신이요, 도전정신이요, 개방 정신이다. 과거 바다로 진출했던 제주 선인들의 얼을 받아,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정신(Creative Response)이 요구된다. 그것이 곧 해민정신의 개방성과 도전성이다. 

제주인의 해민정신은 개체적 대동주의라는 독특한 문화를 생성해냈다고 송성대 교수는 말한다. 개체적 대동 주의에는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사상적 가치가 내재해있다. ‘자유주의적인 공동체주의’는 개인에 대한 관념(Conceptions of Oneself)의 보장에 기반한 공동체의 공동선(The Common Good)을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과거 제주 사회에서는 개인과 공동체 간의 사회-정치적 우선순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인간으로서 독립 지향과 자기가 소속한 공동체에 대한 결속지향이 다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 이러한 사례는 제주의 주거문화인 밖거리–안거리 모델, 목장계 등 다양한 형태의 수눌음 문화, 학교 바당 등 그 실증적 사례는 부지기수다. 과거 제주 사람들은 아들이 결혼하면 부자간도 8촌이라고 생각하며 관계를 조율했다. 부자 간에 범벅(빈대떡 같은 것)도 금(경계)을 그어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제주의 노인들은 가난해도 저승 갈 때 입고 갈 수의만큼은 손수 마련해 놓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제주의 조상들은 누구에게든, 설사 그가 자식이라 해도 폐 끼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이러한 과거 제주인의 생활양식 등에서 개인주의(indvidualism)에 기반한 근대적 자아 개념이 이미 싹텄다고 생각했다.

제주해민의 대표적 집단인 해녀들의 문화를 좀 더 들여다보자. 먼저 제주 해녀문화의 자유주의적인 측면은 제주 사투리 ‘질 루지 만씩 살아산다’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 능력과 책임에 따라 자기가 알아서 각자 살아가며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사회적 격률이 존재한다. ‘질 루지 만씩’ 문화는 해녀 조직에 있어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구분되는 위계 문화와 연결되면서 그 위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제주 해녀들의 상·중·하군 위계질서는 나이가 아니라 철저하게 해녀의 ‘물질 경험과 물질 기량’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물질 경험과 물질 기량이 뛰어나면 그가 바로 상군 해녀이다. 나이가 많더라도 물질 경험과 물질 기량이 모자란다면 자연스레 하군 해녀가 되었다. 이러한 제주 해녀의 위계 문화는 해녀들의 탈의장이자 휴식 공간인 ‘불턱’에서도 사회적 준칙으로 작용한다.

불에 몸을 말리는 이곳에서는 상군 해녀가 바람을 등지게 되는 상석에 앉았다. 옷을 널 때도 상군 해녀는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은 안쪽에 말리는 특권을 가졌다. 회의를 진행할 때 해녀들 간 이견이 생기면 상군 해녀가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는 연령이 권력이 될 수 없고 오직 실력만이 권력이 된다. 그야말로 싱가포르에서 볼 수 있는 업적 민주주의(technocracy)의 전법이다. 

한편 상·중·하군 위계 문화의 본질인, 철저하게 ‘자기 능력과 책임’ 중심적인 자유주의적 가치는 역설적으로 공동체주의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이른바 개인주의 기반의 자유주의적 가치 추구 속에서 공동체 전체이익이 증진된다는 것이다. 상·중·하군의 위계 문화는 ‘노력 없는 무능력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주 해녀들의 공동체적 노력의 사회적 증거이다. 

제주 해녀공동체에서는 ‘노력 없는 무능력자’를 경계한다. 그러나 능력은 부족하지만, 공동체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결속지향의 해녀에 대해서는 사회적 포용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제주 해녀의 ‘게석 문화’이다. 게석 문화는 생산량이 많은 해녀가 자신이 채취한 해산물을 생산량이 적은 해녀의 망사리(그물)에 집어넣어 주는 문화이다. 얼핏 보면 제주 해녀의 게석 문화는 하군 해녀에 대한 상·중군 해녀의 시혜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제주 해녀들은 혼자서 물질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벗이 없으면 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다. 상 중군 해녀와 하군 해녀는 서로 한 조가 되어 물질을 한다. 이들 사이에는 역할분화가 형성된다. 하군 해녀는 수면에서 상·중군 해녀의 물질 기술을 학습하고 동시에 그들이 안전하게 채취 활동을 하는지 살핀다.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확인함으로써 하군 해녀는 상·중군 해녀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여기서 상·중군 해녀와 하군 해녀 간의 분업을 통한 호혜적 권리와 의무가 발생한다. 이러한 하군 해녀의 역할에 대한 응분의 댓가로 상·중군 해녀는 자신의 수확물 중 일부를 하군 해녀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하고, 하군 해녀는 그것을 받을 당당한 권리가 발생한다. 제주 해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게석은 상·중군 해녀와 하군 해녀 각자가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시킨 집단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해녀 조직에서 보는 바처럼 게으른 사람들에게 제주 땅은 비정의 땅이었다. 농토 면적은 작고 가뭄, 홍수 등 천재(天災)가 많았다. 그러니 제주인은 근면·성실하지 않으면 식량 확보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기회와 도전의 땅이었다. 제주는 육지와는 다르게 지주계급도 없었고 각설이를 비롯한 유랑인과 같은 불한당도 없었다. 제주에서는 일할 의지가 있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졌다. 나의 부친은 늘 교훈 삼아 말했다. 제주도에서는 신용만 잘 유지하면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없다고. 제주에는 흥부전에서 사지 멀쩡한 흥부를 동정하는 값싼 정서는 발붙일 이유가 없다. 한반도의 논농사 지대와 달리 제주 사람들에 있어서 흥부는 기피해야 할 파렴치한에 불과한 존재였다. 

끝으로 제주 해녀문화에서 읽을 수 있는 해민정신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고 그 함의는 무엇인가?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상기하고 싶다.

제주의 해민정신은 개방의 정신이고 개척과 도전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 제주가 지향하는 국제자유도시와 딱 맞아떨어지는 정신이다. 개방과 도전. 개척정신이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정신적 토대로 부활해야 한다. 그 정신을 등대 삼아 제주의 미래를 열어 가야 한다.

제주의 해민정신은 소위 게르만의 바이킹 정신이나 일본의 해양 사무라이 정신(왜구)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역사적으로 제주인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절해고도였다. 칭기즈칸 군대의 어느 장군 묘비명에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다리를 놓는 자는 흥한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제주 미래의 이념적 지향으로 삼아야 할 경구다. 과거 동양의 농경문화 권에서는 대부분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번도 타향에 가보지 않고 태어난 곳에서 죽어간, 즉자적 삶을 살다 갔다. 그에 반해 제주인들은 바다 건너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외지와 교역 활동을 하고 어로 활동을 해온 수많은 해상과 해인 등의 해민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대해의 참치’처럼 , ‘천하의 대붕(大鵬)’처럼 돌아다닌 열린 기층민중이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특히 청년들에 대한 정책적 함의다. 제주의 해민정신의 정수인 ‘질로 지만씩’ 문화는 ‘자기의 능력과 책임에 따라 자기가 알아서 각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독립·자립 지향으로 살아야 한다는 정언 명령이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욱 유효한 삶의 철학이다. 질로 지만씩 살아내기 위해서는 비교적 경쟁력이 있는 기술 몇 개는 가져야 한다. 자연과학적인 기술만 아니고 영어나 글쓰기 능력 등도 다 기술의 범주 속에 포함된다. 몇 년 전 이야기다. 뉴욕시장을 지낸 변호사 출신 줄리아니는 젊은이들에게 입학하기도 어렵고 학자금도 많이 드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서 변호사 하는 것보다 배관공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두 직종의 수입이 거의 맞먹는데 구태여 어려운 로스쿨 공부를 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갈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기술(一人一技)만 가져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복잡해진 오늘날에는 다르다. 노동자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기술(一人多技)을 갖고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독립 지향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나 지방정부가 그러한 유능한 노동자를 육성하는데 집중 투자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주도하는 21세기는 독학의 시대다. 학교 교육의 의미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는 학습능력을 단단히 갖추는 일이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것이 교육복지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 차원에서 차별화된 미래지향적인 평생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여기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고 평생 교육복지 확충을 위한 제주 공무원들의 역량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