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허위자백 진술 강요…불법감금, 전기고문 등 가혹 행위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 ‘징역 3년-집유 5년’,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물고 늘어지는 검찰의 반복적인 항고에도 ‘무죄’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국가로부터 누명을 쓰고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는 54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고(故) 한삼택 씨 이야기다.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로 숨을 거둔지 36년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진실규명’ 결정 이후 2년여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증거 없음’에 따른 무죄를 확정받았다.
그는 김녕중학교를 둘러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관련 이방택 교장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3년형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지난 2023년 2월, 2기 진화위는 고인의 사건인 ‘조총련 관련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불법감금 및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와 사건이 왜곡됐다고 판단된다”며 진실규명 결정했다.
이후 고인 유족들은 같은 해 9월 재심을 청구했고 2023년 5월 재심 개시 결정 이후 1심과 항소심, 대법원까지 거쳐 ‘무죄’를 확정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잇따라 항고했다.
앞서 “불법감금·가혹행위 및 강요는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국가는 고인과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검찰의 항고로 고인과 유족은 또다시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 재일제주인 기부금 학교시설 증축…고문 끝 ‘간첩’ 만들어져
고인은 1967년 5월 북제주군 구좌면 김녕중학교 서무 주임으로 근무하며 교장관사 신축 관련 업무를 보조하던 중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제주 출신 일본 거주인 3명이 조총련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서신을 주고받고 또 교장관사 신축비용 희사금인 63만원을 받은 일이 간첩 행위에 해당한다며 끌려갔다.
진화위 조사 결과와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연구책임 김종민)에 따르면 한삼택은 김녕중학교 교장인 이방택, 한도현, 한여섭 등과 함께 구속 기소됐다.
이방택은 제주를 방문한 재일동포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학교 증축비로 썼으나, 그 재일동포가 조총련 소속이며 증축한 학교시설을 촬영해 북한에 제공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됐다.
한삼택 역시 같은 혐의다. 그는 이방택의 공동피고인으로 제주도에서 서울로 끌려간 뒤 호텔과 모텔, 경찰서 보호실, 취조실, 여관 등 장소를 오가며 불법감금을 당했다. 석방이나 귀가조치 됐다는 내용은 없었다.
진화위는 이방택 항소이유서와 참고인 진술 등을 볼 때 1970년 10월 8일 구속영장 발부 다음 날 중부경찰서 인치 전까지 불법감금, 10월 17일 검찰 송치 전까지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당시 수사관들이 전기기구를 이용한 고문 등을 가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한삼택과 이방택 피의자신문조서나 검찰 사건 송치 기록 등에는 ‘신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수사관들이 가혹행위를 숨기고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근거로 남긴 것으로 봤다.
왜냐하면, 이방택은 항소이유서에서 ‘1970년 9월 28일부터 전기기구를 이용한 가혹행위가 시작돼 10월 6일쯤 새벽에는 정신이 마비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한삼택과 함께 근무한 참고인 역시 “선배(한삼택)는 워낙 고문이 심해서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아 거짓말이라도 해서 나오지 않으면 죽었을 것이라며 견디기 힘든 정도의 고문이었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종합적으로 진화위는 고인을 포함한 이들이 반국가단체인 조총련계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돈(희사금)을 받았다는 허위자백과 진술을 강요받았을 것으로 판단했다.

# 민단 가입, 조총련 단절 미확인…판사 구속 ‘사법파동’ 이어진 사건
당시 경찰은 사건을 검찰로 넘기기 전 기부금을 희사한 재일동포들이 조총련의 반대 격이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인단체로 인정받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 가입된 사실과 조총련과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았다.
이는 경찰이 검찰에 보낸 ‘대일 사실 조사결과 보고’ 문건과 외부부가 서울형사지방법원에 보낸 ‘사실조회회보’에 작성돼 있었다. 그러나 앞선 경찰 수사보고에서는 재일동포 모두 조총련으로 활동 중인 인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경찰이 작성한 압수조서도 일부 허위기재된 것으로 드러났다.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진술과 조악한 증거를 토대로 검찰은 기소했고 이방택은 징역 1년 6개월형, 한삼택은 징역 3년형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1971년 발생한 ‘1차 사법파동’의 계기가 됐다. 서울지검이 증인 심문을 위해 제주도로 출장 간 판사들이 변호인으로부터 항공료와 숙박료, 술값 등 향응을 받았다며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지법판사 37인은 일괄사표를 제출했고 검찰이 구속영장 기각 이후로도 다시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당시 유신정권 공안사건 무죄판결을 많이 내려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이범렬 부장판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검찰은 이 판사가 사건 현장 검증을 위해 제주도를 찾았을 때 변호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변호인이 판사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게 관례였으며, 뇌물로 받았다고 주장한 물품은 해수욕장에서 사용할 슬리퍼와 생선(옥돔) 등이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당시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들은 사법권 독립보장과 검찰관계자의 인책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울지검 검사 50여명은 법관들의 요구가 검찰권에 정면 도전하는 처사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사법파동은 박정희의 수사 중지 명령과 대법원장 수습 지휘 지시 이후 1971년 8월 28일 법관들이 사표를 철회하면서 일단락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