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북페어 탈락자들이 멋대로 만드는 축제 ‘제주북페일’
4월 5~6일 카페 어므므 “내 판은 내가 짠다. 기죽지 마라!”

“오늘 확정팀에게는 메일로 안내드렸습니다.” 메일을 받지 못했다. 결과는 제주북페어 참가 신청 탈락. 살면서 수차례 겪은 실패였지만 짧고 투박한 문장은 참 야속하다 못해 억울했다.
“니가 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누가 짜놓은 판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을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탈락자들이 멋대로 만드는 축제 ‘제주북페일 JEJU BOOK FAIL’이 탄생했다.
“실패는 실패라고 정의하는 순간 실패죠. 실패의 순간이 오더라도 이겨내고 계속 이어간다면 그건 과정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북페어는 탈락했지만,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독립출판 제작자와 소규모 출판사를 만나볼 수 있는 제주북페어. 이 같은 제주북페어 참가를 신청했다가 떨어진 이들이 독립출판의 진수를 보여 줄 축제를 기획해 주목된다.
탈락하길 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신함과 기발함이 버무려진 새로운 형태의 책 축제다.
제주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독립출판과 소규모 출판 등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은 오는 5일과 6일, 이틀간 카페 어므므(제주시 서광로20길 3, 4층)에서 ‘제주북페일’을 개최한다.
제주북페일은 박람회나 전시회를 뜻하는 ‘페어(Fair)’ 대신 실패라는 뜻의 ‘페일(Fail)’을 붙였다. 제주북페어 참가 신청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멋대로 만드는 탈락자들의 축제이기 때문.
“이게 실Fail리 없어”, “NO FAIL NO GAIN, 너 페일 너 게인”, “니가 뭔데”, “어찌저찌 되겠지”, “탈락도 락이다”, “BOOK=FAIL”. 이번 행사를 준비한 기획자들의 마음가짐은 단단하다.
탈락할 만했다는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열의를 가진 채 새로운 시도에 나선 그들. 행정이 주도하는 제도권에서 벗어난 해방감 속 자신들만의 새판을 짠 창작자들을 만나봤다. 창작자들의 개성을 존중, 이름은 모두 이들이 원하는 대로 필명 또는 팀명으로 기재했다.
제주북페일 참가팀은 △길보트 △왈맹이 △호연지 △로그아웃아일랜드 △작은배 △인쇄술의미발달 △구상중 △김주영 등이다. 소규모 출판과 창작, 디자인, 기획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지난 2월 1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제주북페어 참가팀 모집 안내에 따라 신청했다. 결과 발표일 메일로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메일은 오지 않았고 SNS 게시물에 올라온 “확정팀에게는 메일로 안내했다”는 짤막한 댓글로 탈락 사실을 알게 됐다.
메일을 보냈다거나 탈락했다는 안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기다렸지만, 떨어진 이유도 모른 채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생의 순간 수없이 마주한 탈락에 순응해왔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할 만큼 했다는 이들은 기죽지 않고 주특기인 ‘창작’에 나섰다.
창작 모임을 하던 이들 사이에서는 탈락 이후 떨거지들 북페어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고 “재미있겠다”는 반응과 함께 현실로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려고 탈락했구나. 오히려 탈락하길 잘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호흡이 좋았다.
팀 작은배의 강단 씨는 “탈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북페어에 합격했다면 이 정도로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북페일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갖게 됐고 할 일은 많아졌지만, 창작에 열의를 갖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같은 팀 소신 씨는 “떨어진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탈락에 대한 안내도 받지 못했고 정확한 선정 기준도 공지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며 “고군분투하면서 스스로 탈락한 이유를 알아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탈락을 좋은 기회로 만들었다”고 피력했다.
이번 북페어에 담긴 콘셉트는 ‘급조된 정성’이다. 급하게 준비했지만, 열의를 가지고 정성을 가득 불어넣었다는 의미다. 탈락에 대한 비관을 귀엽게 느껴지도록 바꾸고 제주를 대표하는 색, 감귤색 마스킹테이프를 가지고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축제를 브랜딩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각자 잘 하는 분야를 맡아 축제를 준비했고 서로의 실력을 더하다 보니 한 달여 만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북페어와 최대한 다른 모습을 갖춘 축제를 뚝딱 만들어낸 것.
북페일에는 소규모 출판물과 다양한 굿즈뿐만 아니라 디제잉과 게릴라인터뷰를 포함한 즉석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다. 정해진 규칙이나 제약이 없으니 창작자들만의 개성을 살린 프로그램들이 마련된다.
부스별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찍어주는 도장을 다 모을 경우 경품 추첨권도 지급된다. 탈락자들의 축제인 만큼 ‘럭키드로우’가 아닌 ‘언럭키드로우’다. 심지어 ‘꽝’을 뽑아야 1등 선물이 제공된다.
공간 한쪽에는 ‘기빨림방지존’도 준비된다. 필연적으로 시끌벅적한 축제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쉬고 싶은 내향인을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 대화는 금지된다. 또 반려동물의 출입도 자유롭다. 옥상 공간도 개방, 반려동물과 함께 북페일을 즐길 수 있다.

이번 북페일에는 후원계좌를 통해 힘을 보태는 개인, 북페어에 기부하려던 에코백을 북페일에 기부한 개인 등 한명 한명의 힘이 보태졌다. 응원에 힘입어 이들은 누군가 깔아놓은 판에서 준비하는 축제가 아니라 창작자가 직접 판을 깔고 만드는 축제를 만들었다.
길보트 씨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활동을 좋아했는데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진득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며 “그게 실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경험들이 나중에 구슬 꿰듯 엮여 지금이 만들어졌다. 실패를 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실패를 선택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팀 구상중의 갱지 씨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순간을 진짜 실패라고 정의하는 순간이 실패다.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면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 된다”며 “우리는 북페어에 탈락한 것은 팩트지만, 실패하진 않았다. 모든 것은 밑거름, 과정이 된다”고 강조했다.
강단 씨는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을 위한 행사여야 하니 어렵지 않겠나. 반면 북페일은 도전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더했다. 행사를 나타내는 건 자유로움”이라고 밝혔다.
왈맹이 씨는 “북페일 활동을 지켜보는 모든 분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실패에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나도 그래야겠다 같은 위로”라며 “작고 소소한 활동들이지만,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들은 자유로운 청년 활동을 위해 규제를 없애줄 것과 행사 때마다 얼굴만 비추고 가는 정치인이나 행정 수장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를 요구했다. 또 시대적 변화에 맞는 예술인 증명 기준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실패라는 기준을 남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찾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청년 창작자, 탈락자들의 축제 제주북페일. 탈락을 마주하고 멈춰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실패를 기회로 만든 이들이 만든 듣도 보도 못한 축제에 관심이 모인다.
한편, 제주북페일 관련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 jejubookfail.com )나 인스타그램(@jejubookfail)을 통해 확인하면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메인을 구입한 덕분에 제주북페어( jejubookfair.com ) 주소를 입력해도 연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