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제주인(18 )] 밴쿠버의 제주인, 한우용 회장
| 이번 글이 일단계로 미국에서 송고하는 마지막 '지구촌 제주인' 연재가 될 듯 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북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구촌 제주인들에 대해 충분한 취재와 소개를 하지 못한 것을 정말 아쉽게 생각한다. 특히 미국 아틀랜타와 미시간, 캐나다 토론토지역은 연락도 취해보지 못한채 훗날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어 안타깝게 생각하며, 추후 반드시 후속 취재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동안 취재를 도와주신 각 지역 도민회 회장단과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제주인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연재가 북미지역에 거주하는 제주인들의 네트워크 복원과 세계제주인네트워크를 고민하는 단초가 되었으면 더할 바람이 없겠다. |
지난 4월말 캐나다 밴쿠버 UBC(브리티시 콜럼비아대)에서 컨퍼런스가 있어 참석했다가, 밴쿠버에도 제주도민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 제주도민회 한우용 회장과 사전에 연락을 취해 만났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재외제주도민회 서브페이지(http://people.jeju.go.kr) 에는, 밴쿠버제주도민회는 1999년 창립됐으며 도민수 5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회장을 만난 곳은 밴쿠버 다운타운 중에서도 중심인 랍슨 거리(Robson Street)에 있는 한 한국음식점. 랍슨(Robson)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동부에 있는 산 이름으로. 캐나다 로키 산맥의 최고봉(3,954m)이다. 다운타운 중심거리 명칭답다.

약속 시간은 4월 26일 저녁 6시. 조금 일찍 랍슨 스트리트에 도착하여 거리 분위기를 살펴보는데, 느낌이 서울 외곽 학원가에 온 듯한 느낌이다. 한국인 유학생(어학)들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 입구에도 유학생활과 관련된 잡지가 눈에 띤다. 캐나다는 6개월 노비자 체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 곳에 한국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란다. 어쩌면 이 거리 상권도 한국인들이 먹여 살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우용 회장은 또 다른 제주인과 함께 예고없이 왔다. 마침 밴쿠버영사관에 파견 나와 있는 강정식 영사다(사적인 얘기는 금기지만, 필자와는 고교동창인데 고교 졸업 후 첫 만남을 이역만리 밴쿠버에서 갖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굳이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달변이신 한회장이다. 이하의 글은 한회장의 얘기로 생각하면 된다. 중간 중간에 던진 필자의 짧은 질문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이민의 목적으로 크게 2가지 ‘교육’과 ‘비즈니스’를 얘기하는데, 전자의 경우 밴쿠버는 만족하나, 여기에서 후자는 미국 같은 꿈을 꾸기 힘들다. 그래서 “여기 와서 뭐하며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 가장 곤혹스럽다는 이곳 교민들이다. 여기는 ‘돈 벌러’ 오는 곳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들이 말년을 보내러 오는 곳이라는 것.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는 소비도시인 밴쿠버가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만,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토론토’가 낫다고 한다.

- 어떻게 이곳 밴쿠버에 오게 되었나?
초등학교 6학년 마치고(서귀포초교 44회 출신) 서울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60년대 당시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유학가는 것 이상이었다. 서울에 와 보니 비행기 를 타 보았거나 아니 직접 본 사람들도 별로 없더라. 그런 시절이었다.
부친 친구분 들 댁을 찾아다니면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신세를 졌다. 대략 6~7번 집을 옮겨 다닌 것 같다. 방학이 되어 제주에 올 때는 잠이 안 올 정도로 마음이 설렜다. 특히 제주에 귀향할 때는 절대 제주말을 안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어쨌든 남들보다 일찍 넓은 세상을 보게 된 셈이다. 나중에는 동생들도 상경해 함께 생활했다.
73년도에 고대 전자공학과를 입학하고 이후 동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계속 거주하며 맨 처음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그런데 연수 딱지 끊자마자 사표내고, ‘한국IBM’에 입사했다. 입사지원서를 IBM에 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솔직히 일요일은 물론 토요일에도 논다고 해서 지원했다. 면접시 회장이 직접 면접 했는데, 이러한 내용을 당당하게 밝혔다. 나중에 회장이 악수하면서 잘해보자고 하더라. 이후 회장이 “지난번 신입사원 면접 때, 어느 사원이 ‘IBM은 토·일요일 근무 안해서 좋아 지원했다’며 당당하게 밝히더라”고 공개하여, 회사 내부 뉴스거리로 회자되기도 했다.
회사 생활하면서 1년에 8번도 넘게 해외출장을 다닌 적도 있다. 해외를 많이 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만큼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조금씩 이런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 왜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를 선택했나?
서울 출신인 아내(한소영 씨)는 카이스트의 전신인 키스트(KIST) 출신이다. 한우용 씨는 IBM에서 키스트 담당 직원이어서 자연스럽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 처가는 원래 워싱턴D.C 인근의 버지니아 쪽에 살고 있었다. 아내만 아직 미국으로 가지 않은 상태여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미국 영주권도 받았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가족들과 미국과 캐나다로 어학훈련 겸 견문도 넓힐 겸 여행 다녔었다. 그런데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우리 아이가 "캐나다로 가면 따라가고 미국으로 가면 안 간다"고 얘기했다.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미국 동부지역(워싱턴, 뉴욕 등)에서 늘상 부딪치던 흑인들이 어린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 주었나 보다.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흑인이 별로 안 보인다. 당시 워싱턴에는 우리 가족만 빼고 처갓집 식구 모두 다 와 있었다. 캐나다로 수속을 시작한 1992년 영주권을 포기하고 캐나다로 선회한 것.

- 이민초기의 생활과 정착과정
94년 3월 처음 밴쿠버로 왔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들만 밴쿠버에 남겨 두고 엄마는 한국에 왔다갔다 하고, 나는 기러기아빠로 생활하려 했다. 1년 동안은 한국에 있으면서 직장 다니며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애들 보내는 건 좋지만 (아이들이 초등 3~4학년이어서 너무 어려서) 애들 성장기에 부모들이 돌보지 않고 남들에게 맡기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하고 문제제기했다.
그 당시 IBM출신은 영주권 신청하면 6개월도 안돼 100% 오케이됐다. 결국 IBM을 접고 95년 2월에 나도 밴쿠버로 들어 왔다. 이 결정과정에 부모님과도 큰 갈등이 있었다.
3개월 정도 지내다가 좀이 쑤셔서 뭐 일할거리 없나 찾아보다가 ‘가구공장’이 나와서 인수 합작 투자하여 대표로 있었다. 소나무로 만드는 가구인데 배워가면서 했다. 이왕이면 매장까지 갖추는 게 어떤가하여 이후 한인 집단촌이 된 ‘노쓰로드’에 최초로 매장을 열었다. 우리 매장 바로 옆에 밴쿠버 최대의 한인슈퍼인 ‘한남슈퍼’가 나중에 들어왔다. 95년에 시작하여 한 5년 정도 이곳에서 일을 했다. 처음엔 잘 됐는데 나중에 경쟁업체가 생겨 가격이 다운되면서 가게를 접게 됐다.
- 왜 전문성을 살리지 않았나?
나는 IBM출신이고 그 중에서도 하드웨어 분야인데 이 분야는 중국과 경쟁이 안된다.
가구공장과 매장을 병행하게 되니 퇴근 시간도 없었다. 2주일에 하루 놀고 그랬다. 그래도 지친 줄 몰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우리 남편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하며 다른 비즈니스를 탐색하더니, 그 다음 사업으로 ‘호텔비지니스업’을 찾았다.
기존 한국사람이 운영하던 호텔을 매입하여 2000년부터 2007년 작년까지 영업 했었다. 다운타운이긴 하지만 빈민촌에 있던 ‘루빙하우스’란 호텔이다. 지하 1층에 지상 3층의 건물로, 1층에는 200명 수용 가능한 팝이 있고, 2~3층에는 32개의 룸이 있다. 연금을 받는 은퇴자 등이 주된 고객 중 하나인데, 이들의 호텔비는 정부에서 지급하고 100% 현찰 장사이니 수익은 괜찮았다.
이 사업(서민대상의 사업)을 하면서 단지 돈만 번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배웠다. 여기 서민층은 순박하다.
느지막이 IT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2005년부터 모색해 온 사업이다. 컴퓨터 네트웍 장비 도소매업체다. 회사명은 ‘Neo Networks’.

- 가족 얘기, 그 중에서 자녀들의 얘기
아들(한승기 83년생)은 토론토대를 졸업하고 현재 회계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딸(한수정 85년생)은 퀸즈대를 졸업하고 현재 UBC의대를 다니고 있다. 딸은 UBC 인근에 아파트를 임대하여 살고 있다. 같은 밴쿠버에 살면서도 한 달에 한번 볼까 말까 한다. 집에 와서도 식사시간 제외하곤 책만 들고 사는 애다. 농담 따먹을 시간도 없이 공부만 한단다. 한인 사회에는 소문난 재원으로 고교때는 지역 사회에 봉사와 기여에 뛰어난 청소년에게 주어지는 상을 주정부로부터 수상하기도 했다. 공부는 물론, 네팔, 볼리비아 등에도 일찍부터 자원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미국도 그렇지만 캐나다는 공부만 잘한다고 대학 들어가지 못한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아이들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이었는데 현재 60세가 넘으셨는데 관계(만남)를 계속하고 있다. 보디 랭기지를 구사하면서까지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주어 1년 만에 ESL과정을 마쳤다. 캐나다는 2년이 기본인데.
캐나다는 학교에서 교과서를 절대 집으로 가져가게 하지 않는다. 숙제 있을 경우만 예외로 한다. 아이들에게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책을 물려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비는 단 1원도 학부모에게 부담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교과서를 모두 복사하여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책을 사는 값보다 더 드는 경우도 있더라. 이렇게 하여 딸은 대졸까지 모두 올 A학점 받았다. 한번도 A 놓친 적 없다. West 밴쿠버 하이스쿨을 여자부에서 1등으로 졸업했고, 2002년도에 학교에 영원히 남는 기념패가 보관돼 있다. 이 곳에서 “당신(한회장) 처럼 ‘교육에 성공한 사람’은 별로 안된다”는 얘기 듣는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캐나디언이 아니라 이민 온 사람이기 때문에 전문직을 가지지 않으면 여기선 살기 힘들다”고. “똑 같은 수준이면 코쟁이를 뽑는다”는 말도 덧붙인다.
딸은 현재 의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아들은 이과를 방황하다 문과로 바꾸었다. ‘의사’에서 역사학과· 영문학과로...“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격려했다. 지금 회계사 공부를 하고 있다.
한회장은 집안의 장남이다. 3남 1녀 중 맡이며, 바로 손아래 동생이 일호종합건설 한주용 사장이다.
매년 동생들이 밴쿠버에 방문, 2주정도 체류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다지고 있으며, 모친께서는 매년 6월에 오셔서 9월 초 추석 전에 한국으로 돌아 가신다고. 반대로 구정 때는 한회장이 제주로 와서 보름 이상 체류하고 돌아간다.
아내는 제주출신도 아닌데 제주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결혼 1년 만에 그러더라. 너무 제주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제주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주에서 “고향 어디꽈” 라고 물어 볼 정도.
여기에 살다보니 자기 자식 유학 생활 맡아주면 안되겠냐고 부탁 많이 들어온다. 현재까지 4명이 다녀갔고 현재도 1명이 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다. 한동안 매년 제주도청에서 연수차 온 사람들도 있었다. 도내 영어교사들도 4주 연수프로그램으로 온 적도 있다. 그럴 때 마다 집에 초청하여 대접하곤 했다.

- 현재 제주도민회 현황은?
솔직히 제주사람들이 여기 있으나 도민회 모임 잘 안된다. 구체적인 조직화까지는 되지 않았다. 추정하기로 약 20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지 않나 싶다. 연로한 세대들은 별로 없고 보통 4~50대 정도 연배들이다. “한번 만납시다”하면 “좋다”고 하다가도 막상 약속한 날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 참석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뭐라 생각하나? 경제적 성공 여부인가?
경제적인 문제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제주라는 정체성을 생각하기 싫은 경우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제주에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제주를 떠나 이곳에 왔다면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나?
현재 한 두명씩 모이기 시작하고 있다. 최근 들어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성당 모임하면서도 제주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을 한명씩 조직하려고 하고 있다(한회장은 현재 웨스트 밴쿠버 성당지역 모임장을 맡고 있다).
- 그럼 구체적인 도민회 조직이 없단 말인가? 도청 홈페이지에는 분명 밴쿠버 도민회 조직이 있고, 한선생께서 회장으로 되어 있는데?
솔직히 그렇다. 우근민 지사 시절부터 ‘감귤사절단’이 이 곳에 매년 오기 시작했다. 도지사, 도의원, 농협관계자는 물론 감귤아가씨까지 동반하여 몇 십명이 왔다. 맨 처음 이 사절단이 왔을 때 그때 밴쿠버에 있는 제주출신들이 몇 명이 되는 지 한번 파악해 보자는 얘기가 나왔었고, 지사 일행이 오니 그 때 만찬장에 열 명 내외가 모였었다. 그 때 도에서 이번 기회에 제주도민회를 조직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얼떨결에 도민회 감투를 쓰게 된 것이다. 그 때가 아마 1999년 경일 것이다.
대화 말미, 지구촌 제주인 네트워크가 화제로 올랐다. 강 영사가 한마디 거든다.

"미국과 호주는 ‘이민국가(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인데 이들 나라로 이민간 사람들과 다른 나라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민 간 사람들과 같이 봐서는 안된다. 밴쿠버도 이민국가이긴 하지만 이민역사는 짧은 편이다.(...) 이민 2세대 이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외국인)으로 봐야 한다. 향토학교 프로그램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 성급하게 제주의 정체성을 심어주려 하지 말고 ‘제주라는 끈’을 어떻게 심어 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제주를 최소한 관심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제주라는 소재가 들어가면 네 인생이 더 풍부해 질 수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네 부모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냐는 식으로 접근,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
향토학교를 운영하는 프로그램 담당자들은 귀기울일만한 내용이 아닌가 한다.
현회장은 솔직하게 현재 밴쿠버 도민회 현황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직다운 조직을 만들 기 전까지는 재외도민회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조만간 밴쿠버제주도민회의 깃발이 공식적으로 오를 것 기대해 본다.<제주의소리>
<이지훈 편집위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