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7)행불인 재심 청구 5차 40명 심문절차...진희석-김춘보 할아버지 생생한 증언

제주4.3사건으로 형을 잃은 진희석(86)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인 수형인인 친형의 재심 청구 사건 심문이 끝나고 제주지방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제주4.3사건으로 형을 잃은 진희석(86)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인 수형인인 친형의 재심 청구 사건 심문이 끝나고 제주지방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한림국민학교 옆 밭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총을 쏘아댔어. 군경이 떠나고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시신 하나가 꿈틀꿈틀.... 총에 맞아 코가 없더라고. 명월에 오씨 형님. 그 사람을 살리려고 정말...”

숨겨져 왔던 잔인한 70년 전 이야기가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자, 법정 방청석에서는 탄식이 이어졌다. 코 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해진 방청객들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실행 등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행방불명인 40명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절차를 16일 진행했다.

재심청구인인 진희석(86) 할아버지는 4.3 당시 14살이었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서 10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여느 이웃처럼 농사를 지내며 부족하지만 오붓한 생활이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시끄럽던 1948년 어느 날. 느닷없이 사복 차림의 성인 2명이 집 앞에서 큰형(진군석. 1930년생)을 끌고 갔다. 당시 형은 결혼도 하지 않은 19세 청년이었다.

“우리 삼남매가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형을 데리고 갔어. 이유도 모르지. 형이 한림지서로 간다고 했던 기억이 나. 한림읍사무소에 다니던 고모부가 알아보니, 모슬포경찰서로 다시 끌려갔다는 거야. 그 일 이후 사람들도 마을을 떠났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 한림중학교로 끌려가 집단생활을 했다. 낮에는 마을로 몰래 돌아가 일하고 밤에는 중학교에서 잠을 자는 생활은 해를 넘겨 8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교실에서 먹고 잤지. 어느 날 군경이 주민들을 한림초등학교 동쪽 언덕으로 끌고 가는거야.  큰 소리가 여러 발. 소리가 멈추고 가봤는데. 다 죽은 줄만 알았지. 그때 한 명이 꿈틀꿈틀. 가족들이 가서 얼굴을 보니 코가 없었어. 총에 맞은 거지. 명월에 사는 오씨 형님이었어. 지금은 돌아가셨지”

진 할아버지에 따르면 오씨의 가족들은 토벌대의 눈을 피해 코 잃은 자식을 마을로 몰래 옮겼다. 적발이 두려워 초가집 마루 밑에 밀어 넣었다. 해가 떨어지면 가족들이 학교에서 몰래 마을에 돌아가 먹을거리를 건넸다. 그렇게 오씨 형님은 생존자가 됐다.

학교에서의 수용생활이 끝나고 진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이듬해야 마을로 돌아갔다. 명월의 오씨 형님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형의 행방은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진 할아버지는 1999년 수형인명부가 세상에 공개된 뒤에야 형이 1949년 7월6일 불법적인 군법재판을 받아 목포형무소로 수감된 사실을 알게 됐다. 명부에 적힌 형량은 징역 7년이었다.

제주4.3사건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김춘호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인 수형인인 재심 청구 사건 심문이 끝나고 제주지방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제주4.3사건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김춘보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인 수형인인 재심 청구 사건 심문이 끝나고 제주지방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김춘보(74) 할아버지는 4.3당시 두 살배기였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조부모와 부모, 삼촌과 고모까지 3대에 걸쳐 대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48년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타면서 하루아침에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할아버지는 군경을 피해 산으로 향했다.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등에 업혀 마을을 서둘러 떠났다.

차디찬 겨울을 산 속에서 보내고 봄이 찾아오자,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얘기에 김 할아버지의 가족도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은 모두 불에 타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약속과 달리 군경은 가족들을 주정공장으로 끌고 갔다. 몇 달 후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할아버지(김영호)와 아버지(김병윤)는 예외였다.

1949년 7월5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징역 7년을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연락은 끊겼다. 가족들은 6.25전쟁 이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행방불명 된 후 어머니가 나를 홀로키웠지. 집이 불에 타니 어머니 고향인 표선면 세화리로 갔어. 형편이 어려워 엄마와 다른 집 밭에서 검질(잡초)를 메며 살았지”

어머니는 그날의 충격으로 4.3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 했다. 살아 남은 가족들의 피해를 우려해서다. 김 할아버지도 96세의 노모에게 지금까지도 4.3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다.

“내가 커서 동네에서 여러 활동을 하는데 절대 마을 밖 행사에는 가지 말라는 거야. 항상 잘 다녀오라고 하시는데 4.3관련 일이라고 하면 대답 자체가 없어. 그러다 제발 가지 않으면 안되겠냐고. 오늘도 재판을 받는데 거짓말을 하고 나왔어. 4.3을 떠올릴까봐. 차마 얘기를 못하겠어.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재판에서 이 억울함 좀 풀어 주기를...”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019년 6월3일 법원에 행불인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2월18일에는 행불인수형자 393명이 추가로 청구에 나섰다.

서류미비 등을 이유로 제외된 인원을 적용하면 실제 재심 대상자는 349명이다. 재심청구인은 342명이다. 6월8일을 시작으로 5차례 심문절차를 거쳐 170여명 대한 심문 절차가 이뤄졌다.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하면 70여년만에 4.3행방불명인 수형자에 대한 첫 재심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다. 검찰이 최근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11월 중 개시 여부가 가려질 전망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