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형벌도 없다는 형법 근본 원칙 ‘죄형법정주의’ 위반 주장이 포고 제2호 위반 등을 다룬 제주4.3 재심에서 나왔다. 증거가 없어 무죄라는 기존과 다른 접근이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25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고(故) 변우중 사건에 대한 일반재판 직권재심을 진행했다. 고인은 1947년 7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무허가 집회 개최, 남로당 제주도당 당비 납무 토론, 미군 비판, 삐라 작성 첩보 등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끌려갔다. 이듬해 6월 25일 제주지방심리
지서에서 경찰서로 이송되던 중 소나무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후 가족들도 몰살당하다시피 피의 광풍에 휩쓸렸다. 살아남은 아들만이 77년의 억울함을 토해낼 뿐이었다.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25일 오후 제주4.3 희생자 고(故) 정창림 아들 정치중 씨가 신청한 재심 사건에 대한 재판을 진행, 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의 무죄 선고 직후 숨죽였던 가족은 두 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고인은 죄 없이 끌려가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또다시 경찰에 붙잡혀 서귀포시 남원지서에서 제주경찰서로 이송되던 중인 194
살아있을 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법원과 검찰 등이 온 힘을 쏟았지만, 결국 재심청구 직전 숨을 거둔 제주4.3 희생자. 고스란히 남겨진 억울함에 법정 안은 숙연해졌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25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김병규 등 38명에 대한 제60차 군사재판 직권재심을 진행했다.재판 결과는 다른 직권재심과 마찬가지로 공소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때에 해당, 각 무죄다.희생자인 피고인 38명 모두 각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망인 중 1명은 올해 4월까지만 해도 생존 희생자 자격으로 일반
죄 없이 경찰서에 붙잡혀 간 남편의 도시락을 챙겨 간 어느 날, 경찰은 남편이 여기 없으니 뒷동산에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오른 동산 너머엔 짓이겨진 얼굴의 시체가 가득했다.제주4.3 당시 서귀포시 안덕지서에 잡혀간 뒤 희생당한 고(故) 오진옥의 아들로부터 들은 당시 증언이다. 고인의 아내가 생전 아들에게 전해 준 내용이다.2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이날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7~28차 일반재판 직권재심에 이어 제29차 직권재심을 진행했다.이날 합동수행단은 무죄를 구형, 변호인은 무죄
아버지는 성당 뒤편으로 끌려가 총살당하고 어머니는 경찰에 끌려가 각종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 사이 동생은 돌봄 받지 못해 죽었고 자신은 각막이 파열, 눈이 멀었다. 좌익, 우익 같은 이데올로기와 거리가 먼 평범한 이들은 국가폭력 아래 비참히 숨을 거뒀다.2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오전에 이어 오후 3시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8차 일반재판 직권재심을 진행했다.이날 재판부는 고(故) 안덕찬 등 피고인인 희생자 20명 전원에게 각 무죄를 선고했다.이들은 1947년부터 1948년 사이
억울하게 잡혀간 첫 번째 일반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애지중지하던 황소를 팔아 겨우 살았다. 하지만 또다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힌 가족들은 목숨을 조여오는 학살의 광풍을 피해 굴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끝내 토벌대에 발각됐고 집단 총살당했다. 두 돌 배기는 바위에 메쳐져 죽었다.국가가 집요하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끝에 결국 행방불명된 제주4.3 희생자 고(故) 강주남. 가족들은 차디찬 굴속에서 죽어갔고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은 따로 산 누이 둘뿐이었다. 제주지방법원
초등학교 교사에서 읍사무소 직원이 됐다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징집된 이후 대한민국 국군으로 복무를 마친 기구한 삶을 살아온 제주4.3 희생자가 뒤늦게 명예를 회복했다. 억울한 사연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뒤 자녀들에 의해 회복한 명예다.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23일 오후 고(故) 김상연의 자녀가 신청한 제주4.3특별법에 따른 재심을 통해 내란 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고인은 1947년 제주지방심리원(현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1000원을 선고받았다. 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도 모자라 행방불명된 아버지. 아픔을 뒤로하고 어떻게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겨진 고통을 오롯이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 제주4.3 희생자 고(故) 강창우의 딸 강순재 씨의 흐느낌에 법정은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23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오전에 이어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6차 일반재판 직권재심을 진행했다.이날 재판부는 故김봉호 등 피고인인 희생자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모두 1947~1948년에 누명을 뒤집
대한민국 국군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훈련을 돕기 위한 숙식을 제공했을 뿐인데 국가권력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쓰고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니 집으로 가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 개방된 형무소를 뒤로한 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 그 순간, 뒤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총탄에 맞고 고꾸라진 뒤 목포 앞바다에 버려졌다.제주4.3 당시인 1949년 4월 내란방조죄와 법령 제19호 위반 등 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끌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목포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고(故) 고한성의 사연이다.잘못된 국가권력
본가에 다녀오던 길에 붙잡혀 끌려간 뒤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학생, 죄 없이 끌려간 뒤 실형을 선고받고 형기를 마친 것도 억울한 데 다시 붙잡혀가 영문도 모른 채 총살당한 청년.억울한 재판을 통해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예비검속에 붙잡혀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당해 바다에 수장된 청년, 죽은 이후로도 내란 전과자라는 오명을 지우지 못한 고인. 증거 없이 죄인이 된 이들이 7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겨우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뒤 빨간줄이 그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행유예를 받아 옥살이는 면했다. 그러나 실형으로 형무소에 간 이들의 소식은 영원히 들을 수 없었다.8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2차 일반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모두 망인(亡人)으로 4.3 당시 농사를 짓거나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군경에 의해 불법 연행된 이후 ‘죄 없는 죄인’이 됐다.
제주4.3 당시 부친께서 어떤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함을 당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아들이 법정에서 흐느꼈다. 억울함을 풀어내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난 부친 대신 흘린 통한의 눈물이었다.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1차 일반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직권재심 대상자들은 대부분 무장대에게 식량이나 기금 또는 군경 정보를 전달하는 등 무장대를 돕고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실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들이다.이날 법정에
거짓 밀고로 16살에 억울한 누명, 고향 제주 떠난 92세 할아버지 16세 때 찍힌 전과자의 낙인을 70년 넘게 견뎌낸 제주4.3 피해자가 모든 누명을 벗었다.22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사법연수원 형사모의법정에서 강택심(92) 할아버지 재심을 통해 내란방조 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심은 고령인 피고인을 위해 제주지법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 등이 협의해 강 할아버지의 주거지와 가까운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진행됐다. 강 할아버지는 4.3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4.3희생자
제주4.3때 일반재판 피해를 겪은 4.3 생존자가 새롭게 확인됐다. 16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은 4.3 때 내란방조 등 혐의로 일반재판을 받아 징역 1년형 집행이 3년간 유예된 A씨(91)에 대한 직권재심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이전 생존자처럼 A씨도 4.3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 아직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희생자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합동수행단은 A씨의 거주지인 서울을 방문해 피해 사실 등을 청취한 결과 A씨가 형사소송법상 재심 대상에 포함된다고 판단했
위법한 1~2차 군법회의(군사재판)를 받은 제주4.3 피해자 전원에 대한 명예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랐다. 멸문지화(滅門之禍) 피해의 후폭풍이다. 2022년 2월10일 첫 군사재판 직권재심을 청구한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의 명예회복 절차가 2024년 12월20일 59차를 마지막으로 멈춰섰다.희생자 미신고 생존자 2명을 포함해 59차까지 1711명을 청구, 올해 4월까지 청구 대상자 전원(1711명)이 무죄 판결로 명예를 회복했다.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4.3의 광풍 속에서 허무맹랑한 절차로
군사독재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A4 용지 8장 분량의 탄원서를 제출했던 70대 제주4.3 유족이 75년 만에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는 기쁨을 누렸다. 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23차 일반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명은 4.3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했거나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진상규명 등을 요구한 것이 반정부 활동이라는 굴레에 휘렸다. 또 4.3 때 해안선 5km 이상 마을에 거주했다는
술만 마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해 온 딸이 법정에서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그는 아버지가 제주4.3 피해자라는 사실을 1년 전에 알게 된 자신마저 원망했다. 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59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1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1명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를, 8명은 1949년 2차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누명을 쓴 4.3 피해자다. 1948년 7월17일 헌법이 공포됐지만, 제주4.3 때
제주4.3 광풍에 휘말린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6살 아이가 여든이 넘은 노인이 됐지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또렷이 기억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는 11일 오후 희생자·유족 청구재심 2건을 심리해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 등 검사가 청구하는 직권재심과 달리 희생자·유족 청구재심은 4.3희생자나 유족들이 직접 변호인을 선임해 청구한 재심이다. 이날 다뤄진 재심은 유족들이 청구했으며, 1건은 군사재판 희생자 2명, 나머지 1건은 일반재판 희생자 1명이다. 고(故)
부산에서 태어나 몸이 편찮은 아버지가 별다른 생계활동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중년 여성이 아버지의 제주4.3 피해 사실에 통곡했다. 11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58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0명 중 12명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내란죄에 휘말렸고, 나머지 18명은 1949년 2차 군법회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받은 받은 4.3피해자들이다. 이날 명예가 회복된 고(故) 임영호는 1949년 2
경찰의 발포로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제주 ‘중문리사건’의 중심에 있는 지식인의 억울함이 풀렸다. 제주4.3 초창기 형사처벌을 받은 그의 명예는 78년만에 회복됐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19차(20명), 제20차(20명) 일반재판 직권재심 2개 사건을 병합해 11일 심리, 대상자 4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명예가 회복된 40명 중 1명은 중문면장을 역임해 중문중학원 원장을 맡은 이승조(李承祚) 씨. 1947년 3월1일 관덕정 일대에서 4.3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