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우의 제주풍토록 살펴보기] ② 자연 속 제주인들의 삶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널리 알려진 주류 역사 반대쪽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생활사, 구술사 같은 학문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도 이런 문제 인식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제주의 역사학자 김일우가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학술지 '사총' 올해 5월호에서 김정(1486~1521)이 남긴 '제주풍토록'를 재조명했다. '최초의 제주풍토지'라는 평가와 함께 오늘날 제주풍토록이 어떤 성격과 가치를 지니는지 분석한 것이다. '제주의소리'는 김일우 박사의 논문을 매주 한 차례 총 4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조선전기 김정(金淨) 저(著)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의 수록내용 성격과 가치
(이 글은 2020년 10월 30일 사단법인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에서 주관한 '충암 김정 유배 500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했던 원고를 다시 다듬어 엮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학술지 '사총' 올해 5월호에도 게재됐다.)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이사장

1. 머리말

2. 수록내용의 검토

1) 제주의 자연과 산물
(1) 기후 /(2) 지형 / (3) 토산·서식 동식물 / (4) 형승

2) 제주 사람의 삶
(1) 가옥 / (2) 신앙 /
(3) 제주어 / (4) 풍속 / (5) 민정

3) 김정의 유배살이와 그 처지

3. 맺음말


(3) 토산·서식 동식물 

① 土產尤絶少. 獸但獐鹿猪最多. 猯吾兒里亦多而此外狐兎虎熊等皆無. 禽有雉烏鴟雀而無鸛鵲等. 山菜蕺열蕨最多而香蔬취朮人蔘當歸桔梗等皆無.  海菜但藿牛毛靑角. 而此外海衣甘笞 黃角等皆無. 陸魚但銀口種而已. 海族有生鰒烏賊玉頭刀魚古刀魚等數種. 此外如絡蹄牡糲蛤蟹蝦靑魚銀魚石首魚等諸賤種及雜種皆無焉. 

토산물은 더욱 매우 적은 편이다. 들짐승으로는 노루·사슴·산돼지가 제일 많고, 오소리오아리 또한 많으나, 이들 외의 여우·토끼·호랑이·곰 등은 없다. 날짐승은 꿩·가마귀·올빼미·참새 등이 있으나 황새와 까치 등은 없다. 산나물은 멸 [삼백초]열과 고사리가 최고로 많으나, 참취[香蔬]취 ·차조[朮]·인삼·당귀·질경 등은 모두 없다. 해조류는 미역·가사리·청각이 있으나, 이들 외에 김·감태·황각 등은 모두 없다. 민물고기는 단지 은구 종류만 있을 뿐이다. 바다 어류로는 전복·오징어·옥도미·갈치·고등어 등 여러 종이 있으나, 이 외에 낙지·굴·조개·새우·청어·은어·참조기 등과 같이 흔하고 다양한 종류가 모두 없다.

② 惟土產香簟俗名蔈古 最多. 而五味子亦多. 而實深黑而大如濃熟山葡萄. 不可辨. 味又濃甘. 考本草. 產朝鮮者良. 又云味甘者爲上. 吾知我國產者. 實紫少. 味多酸. 猶見重於本草. 意此土產者. 必高於天下無疑矣. 前此人皆不知. 但充杯盤之用. 吾始乾之. 滋潤異常. 今年則邑宰及吾皆多取作乾矣. 意欲雖少送去. 令君知之也. 時未畢乾也. 

오직 토산물 가운데는 향심속칭 표고이 가장 많다. 오미자 또한 많은데, 열매가 매우 검고 커 잘 익은 산포도와 같아 구분하기 어렵고, 맛 또한 진하고 달다. 본초를 살펴보면, 조선에서 산출되는 것이 좋고 또한 맛이 단 것이 상품이라 하니,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은 열매가 자줏빛으로 작고, 맛 또한 시다. 오히려 본초에서 중히 여겼다고 하는 것은 생각건대, 이곳 토산의 오미자가 반드시 천하에서 최고의 품질임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하여 단지 술을 빚는 데만 사용할 뿐이더니, 내가 비로소 말렸더니 더욱 더 별미로다. 금년에는 고을 관원과 내가 모두 많이 취해 말렸다. 생각하기를, 비록 적게 보내더라도 그대로 하여금 알게끔 하고자 했는데, 현재 말리는 것을 끝내지 못했다.

③ 又有山果末應멍. 實大如木瓜. 皮丹黑. 剖之子如林下夫人而異. 子差大. 味差濃. 蓋林下夫人之 種而大者耳. 聞海南等邊海處或有之. 未知信否. 此外則無珍異. 陸地諸果如梨棗杮栗等雜種絶稀. 間有而全惡. 海松子全無. 松木亦甚稀. 吾服松葉. 僅取于遠地也. 

또 산에서 나는 과실로는 말응멍이 있다. 열매는 크기가 모과만하고 껍질은 붉고 검어 깨면 씨가 으름[林下夫人]같으나 그것과 달리 씨가 좀 크다. 맛이 비교적 진하여 대개 으름 종류이나 클 뿐이다. 해남 등 해변 근방에 혹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 이들 외에는 유별나게 이상한 것은 없고, 육지부의 배·대추·감·밤 같은 여러 종류의 과일은 매우 드물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온통 추하다. 잣나무[海松子]는 전혀 없으며, 소나무 또한 매우 귀하다. 내가 소나무 잎을 먹는데 겨우 멀리서 취하곤 한다.

④ 此地可珍者. 橘柚梔子榧子無患子山柚子二年木無灰木鸚鵡螺椰子已上三物隨海. 螺椰子. 士人不知名. 行實陸上岸乃得. 地人作行瓢酒器. 謂之杏核. 加時栗赤栗二物. 乃橡實之類. 但不苦. 可作粥. 良馬等也. 

이 땅에서 보배라 할만 것은 귤·유자·치자·비자·무환자·산유자·이년목·무회목·앵무·소라·야자이상 세 가지 물품은 바닷가를 따라 나고 야자는 토착민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고 열매는 뭍 언덕에서 얻고 길 떠날 때 쓰는 바가지를 만들고 행핵이라 일컫는다. ·가시율·적율두 물품은 도토리 종류로서 쓰지 않아 죽을 쑬만하다.·양마 등이다.

⑤ 橘柚有九種. ㈁有金橘九月熟. 最早者. 乳柑洞庭橘二品. 十月晦時熟. 三品相上下. 而金乳實差大而濃甘. 洞庭差小而味爽. 然酸味稍勝. 靑橘 此品秋冬則極酸不可食. 經冬到二三月. 酸甜適中. 五六月. 舊實爛黃. 新實靑嫩. 同在一枝. 實爲奇絶. 至此時味甘如蜜. 和于醋. 至七月則實中之核皆化爲水而味仍甘. 至八月九月至冬. 實還靑. 核更成. 味極酸. 與新實無異. 方其酸時. 人賤之而不食. 又上三品. 方其時味佳絶. 故品第如此. 吾則謂此品乃第一品也. 山橘實小子如柚而味甘 柑子柚子二品人皆知之 唐柚子 實大如木爪. 可容一升餘而味及柚子. 然巨實懸乘. 黃爛可珍也. 倭橘實大次於唐柚而味又不及唐柚. 斯爲最下. 凡此九種. 枝葉大同小異. 惟柚最多刺而實皮最香. 惟柑葉最厚而實皮最香薄. 意者此二品最下故也. 餘品刺不甚柑亦然而葉疏狹. 實皮嗅不甚香. 而嚼甚香烈且辛辣唐柚倭橘皮亦然. 食不堪而藥最效. 意者品高故也. 

귤과 유자는 9종류가 있는데, 금귤9월에 익으니 가장 이른 것,·유감·동정귤두 품종은 10월 그믐 때 익는다. 이들 세 품종은 서로 좋고 나쁨이 있으니, 금귤은 열매가 좀 크며 달고 동정귤은 비교적 작고 맛이 시원하나 신맛이 좀 더하다.·청귤이 품종은 가을과 겨울이면 극히 시어 먹을 수 없고 겨울을 지나 2·3월이 되어도 시기는 하나 달기가 알맞으며 5·6월에는 묵은 열매가 누렇게 무르익고 새로운 열매는 어리어 푸르나 한 가지에 함께 달려 실로 기이하기가 그지없고, 이때에 이르러 맛의 달기가 꿀과 거의 비슷하다. 7월에 이르면 열매 중의 씨가 모두 물로 변해 맛이 또한 달다. 8·9월과 겨울에 이르면 열매가 또 다시 푸르고 씨도 다시 생겨 맛이 극히 시어 새로운 열매와 차이가 없게 된다. 바야흐로 그 신 때는 사람들이 천히 여겨 먹지 않는다. 또 앞의 세 품종은 바야흐로 이때 맛이 가장 절정이다. 각 품종의 순서가 이와  나는 이 품종이 제일등급이라 하겠다,·산귤 열매가 작고 씨는 유자와 같으나 맛이 달다.·감자·유자이 두 품종은 사람들이 모두 안다.·당유자열매 크기가 모과와 같아 한 되 남짓이고 맛은 유자만큼 한다. 그러나 거대한 열매가 매달려 누렇게 드리운 것은 진기할 만하다.·왜귤열매 크기가 당유자 다음이고 맛은 또한 당유자에 미치지 못하니 최하의 품종이다., 무릇 이들 9품종은 가지와 잎이 대동소이하나, 오직 유자가 가장 가시가 많고 열매 껍질이 최고로 향기로우며, 감자는 잎이 최고 두텁고 열매 껍질은 향기가 제일 얕다. 생각건대, 이 두 품종이 최하라 하는 까닭이다. 나머지 품종은 가시가 심하지 않고감자 또한 그러함., 잎은 성기고 좁으며, 열매껍질은 냄새가 그다지 향기롭지 않으나 씹으면 매우 향기로워지고 또한 맵디맵다당유·왜귤껍질 또한 그러함.. 먹지는 못하나 약으로는 가장 효험이 있다. 생각건대, 품질이 높다고 하는 까닭이다.

이들은 제주에서 나는 특산물 및 토물, 서식의 동식물에 대해 언급한 항목이다. 김정은 제주 관련 여러 사서도 살펴보았겠지만, 자신이 직접 보았던 사실과 더불어, 제주 사람들에게 얻은 정보도 근거로 삼아 이들 항목을 썼다고 하겠다. 이들은 16세기 전반 이전 제주의 토산물과 아울러, 서식 여부의 동식물을 거론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그것이 상당히 다양·다종하기에 이른다. 역시, 이들 내용도 후대의 각종 사서에 인용·발췌해 수록되었거나, 혹은 그 일정 부분의 전체가 실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6세기 전반부터는 제주 감귤에 대한 관심이 민간사회에서도 꽤 높아져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특히, ⑤는 제주감귤의 재배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제주 감귤의 품종을 가장 먼저 다양하게 논의하는 한편, 각 품종에 대해 세세하게 논의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자면, 제주에서 자라고 있는 감귤류 품종을 일일이 나열할 정도에 그치지 않고, 각 품종에 따라 나뭇가지와 잎사귀의 생김새 및 약용작물로서의 효능, 그리고 열매를 맺는 과정과 그 맛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감귤류 가운데 사람들이 금귤·유감·동정귤 등의 순으로 맛의 품질을 매기고 있으나, 김정 자신은 청귤을 최고의 품질로 친다는 사실도 나온다. 이들 내용 가운데 ㈁ 부분은 이원진 편찬의 '탐라지'에도 출처를 밝히면서 전재해 놓았다. 그래서 17세기 중반 제주 감귤류는 감자, 유자, 산귤, 금귤, 청귤, 탱자[枳穀], 석금귤, 동정귤, 당유자, 등자, 유감, 당금귤, 왜귤로써 도합 13개 품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이른다. 또한 16세기 전반부터는 제주 감귤에 대한 관심이 민간사회에서도 꽤 높아져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4) 형승

① 樹高不過丈餘而大者或如柱. 喜叢生. 幹枝亦大. 多至數十. 相糾如龍. 盤礴磊磈. 奇古勁瘦. 皮理. 古者黃紫苔剝. 新者靑駁可愛. 其葉四時長綠. 此地無一可觀. 維此樹林眞奇勝也. 

나무 높이는 한 길을 넘지 않으나 큰 것은 혹 기둥과 같고 수풀 더미가 생겨나는데 적절하며 줄기와 가지가 또한 크고 많기가 수십에 이르러 서로 얽혀 용의 모양과 같고 밑바닥은 돌무더기가 너부러져 뒤섞여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매우 메마르고, 껍질이 벗겨져 오래된 것은 누렇고 자주 빛의 이끼가 끼어 있으며 새 것은 푸른빛이 섞여 사랑스럽다. 그 잎은 사철 내내 푸르니, 이 땅에는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나, 오직 이 나무숲만이 진실로 기이한 경승이다.

② 屋墻外二十許步正北. 有古梨樹一株. 高丈餘. 枝疏葉薄. 非好樹. 暫治而亭之. 環以苦竹. 然地勢高遠則北望滄海海去亭一里許. 楸子諸島. 歷歷眼底. 稍遠則西望城中. 村煙官柳及城南果園在內城之南外城之內. 前泉之源. 乃官植橘柚之園. 外城爲泉. 重築里餘. 使泉在城內. 此園去吾亭半里. 呼聲不遠. 橘林. 頗有景致. 最近則俯臨金剛社果園. 亦官園 橘柚滿植. 園去亭可五六十許步. 限以石墻. 然有小竹逕 可通. 時得逍遙其下. 玉葉金實. 靑黃橘爛. 劈之香噀. 君所謂長歌橘柚林. 斯時也得不倀然 一延頸相憶耶. 惡地斯亭. 有少賴焉. 又吾居幸近泉發源. 城南果園之東隅. 源發卽大 .可如福泉洞水 流出東城底. 以資吾汲用. 汲處僅四十步許冷洌如氷. 地本無氷. 賴此泉滌煩. 又州夏日. 氷肉于此. 但下流 汚不可弄翫. 汲先旣多. 勢不得不汚. 至海口成潭. 至此水淸. 又有淸潭深處. 人不得行. 可泛舟. 中產銀唇最多. 傍有蘆葦之屬. 稍有江湖之幽趣. 產銀口魚. 或網得或釣得. 海有小魚數種. 亦可坐岸而釣. 如此似差可而興味甚淺. 不如淸江澗溪之樂. 蓋坐處無小可者故也. 

집 담 너머 20여 보 바로 북쪽에 고풍스런 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는 한 길 정도인데 가지는 성기고 잎은 엷어 좋은 나무는 아니나, 임시로 다듬어 정자로 삼고서 왕대[苦竹]로 주위를 둘렀다. 그러나 지세가 높고 멀리 떨어졌으므로 북쪽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바다와 정자 사이는 1리 정도., 추자의 여러 섬이 역력히 눈에 보이고, 조금 멀리 서쪽으로 성중을 바라보면 마을의 연기와 관아의 버들나무 및 성 남쪽의 과원내성의 남쪽 외성 안에 있고, 앞 샘이 솟는 근원임, 관에서 귤나무와 유자를 심은 과원은 성 밖에 샘이 있어서 거듭 1리 정도를 쌓아 샘을 성내에 두었는데, 이 과원과 내 정자 사이는 1리의 절반으로 부르면 소리가 들릴 정도로 멀지 않다,귤림은 자못 풍경이 장관이며 가장 가까운 곳을 굽어보면 금강사과원이 임했는데또한 관원, 귤나무와 유자가 가득 심어져 있다. 과원은 정자로부터 60여보 떨어져 있다. 돌담으로서 경계가 지어졌으나 작은 대나무가 있는 좁은 길로 통할 수 있어 때로 그 아래를 거닐면 아름다운 잎과 탐스러운 청황귤이 무르익어 쪼개져 향기를 내뿜는다. 그대가 이른바 귤유의 숲을 길게 노래한다 함은 이때 마음 둘 곳 없는 채 한 번 목을 길게 해 생각지 않겠는가. 험한 땅에 이 정자가 있어 조금 힘입는 바가 있도다. 또 나의 거처에서 다행이도 가까이 샘이 발원하고 성 남쪽 과원의 동쪽으로 샘이 끊이지 않고 힘차게복천동 물과 같을 정도. 흘러 동쪽의 성 아래로 내림으로 내가 길어다 씀에 이용하는데, 물을 길어오는 곳은 겨우 40보 정도. 차고 맑음이 얼음과 같다 이 땅에는 본디 얼음이 없어 차[滌煩]_7)를 차게 해 마시는데 이 샘에 힘입는다, 또 제주의 여름날 삶은 쇠고기 등을 식히는 것[冷肉]_8)도 여기에서 한다.. 단지 하류가 탁하고 더러워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물 길어오기가 우선 이미 많으니 더럽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해안 가에 이르러 깊은 못을 이루고이에 이르러 물이 맑고 또 맑은 못이 있어 깊은 곳은 사람이 갈 수 없다. 배를 띄워 갈 수 있는데 가운데는 싱싱한 물고기[銀唇]_9)가 가장 많고 곁에 갈대류가 있어 점점 강호의 그윽한 맛이 있음., 은구어_10)가 나는데 혹 그물이나 낚시로 낚고 바다에는 작은 물고기가 여러 종류 있어 역시 언덕에 앉아 낚시로 낚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좀 가능할 듯 해 흥미로우나 수심이 매우 얕아 깊고 깊은 강이나 산골짜기 계곡의 즐거움과 같은 것은 없으니 대개 앉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7) 척번(滌煩)은 차에 관한 중국의 유일무이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차경(茶經)'에 나오는 말이다. '차경'은 중국 차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당나라 시대 육우(陸羽, 733~804년)에 의해 지어졌다. 여기에는 차의 효능에 관한 대목 가운데 “세상의 어지럽고 번거로움을 씻어 없애준다”는 뜻의 척번이라는 어휘가 나온다. 이로부터 척번은 차를 달리 이르는 말로 쓰게 되었다.

8) 냉육(冷肉)은 쇠고기・닭고기・돼지고기 따위를 찐 뒤에 그대로 식히거나, 요리 하여 식힌 고기를 뜻한다.

9) 은순(銀唇)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가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생선 비늘이 반짝이는 점을 염두에 두어 생선을 은순(銀唇)이라 비유한 사례가 나온다. 또한 생선 비늘이 은빛에 비유된 것은 생선이 생생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0) 은구어(銀口魚)는 은어(銀魚)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은어 주둥이의 턱뼈가 은처럼 하얗기 때문에 생겨났다. 은어는 바다빙어목 바다빙어과의 민물고기이다. 맑은 물을 좋아하며,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하천으로 돌아온다. 살에서 수박향이 나며, 생선회로 주로 먹는다.

이들은 김정이 지세나 풍경이 뛰어나다고 본 곳을 뽑고, 그 연유를 밝힌 것이다. '제주풍토록' 수록 전체 21개 항목 중 2개에 불과한 것은 김정이 유배인으로 자유롭게 제주 지역을 유람할 수 없었던 점도 작용했을 듯싶다.

이 가운데 ②의 밑줄 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이 내용은 남문성 밖에 조성된 과원의 경관을 읊은 것 같다._11) 이곳은 현재 제주시 이도1동 1437번지 일대로, 가장 넓은 과원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 경관이 가을에 귤이 익을 때 남성에 올라 바라보면 온천지가 황금물결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_12)

11) 원은 조선시대 때 중앙정부에 진상하던 과일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운영했던 일종의 과수원이다. 특히, 제주도 경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감귤과 유자 등의 감귤류가 산출되는 지역이고, 그 감귤류가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주요한 진상품 등으로 중앙정부에 바쳐졌다. 곧,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는 감귤류 나무가 재배되는 상당수의 과원이 있었던 것이다(김일우, 앞의 논문, 32~38쪽).

12) 한라일보사, '잊혀져 가는 문화유적 제주시편', 한라일보사 유적지표석 세우기 추진위원회, 2002, 160~162쪽.

한편, 매계 이한우(梅溪 李漢雨, 1823~1881)는 19세기 중반 제주 출신의 유학자이다. 그가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곳을 가려 ‘영주십경(瀛洲十景)’이라 하고 시를 읊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귤림추색(橘林秋色)’이다. 이는 가을 들녘에 감귤이 노란 황금빛으로 익는 제주 절경을 노래한 것이다. 김정도 귤림의 경관이 뛰어남을 알아채고, 가장 먼저 글로 거론했다고 하겠다. 곧, 위의 밑줄 친 부분은 귤림추색의 원조 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제주 사람의 삶

(1) 가옥 

人居皆茅茨不編. 鋪積屋上而以長木橫結壓之. ㈀瓦屋絶少. 如兩縣官舍亦茅蓋也. 村屋之制. 深廣幽深. 各梗채不相連屬. ㈁號品官人外無溫堗. 堀地爲坎. 塡之以石. 其上以土泥之如堗狀. 旣乾. 寢處其上. 吾意地多風濕. 喘欬惡疾之類多緣此也. 

집은 모두 띠풀[속칭 새]로 둘러매지 않고 지붕 위에 늘어놓아 둔 긴 나무로 가로질러 눌러 놓았다. 기와집은 매우 드물고, 정의·대정현과 같은 두 곳 군현 관사도 역시 초가집이다. 시골집의 모양과 규모가 매우 깊고 그윽한데 각 집채이 서로 연속되지 않았다. 품관인이라 일컫는 자 외에는 온돌이 없고,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어 돌로 채워 그 위에 흙을 발라 온돌 모양과 같이 한 뒤 말리고, 그 위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내가 생각건대, 땅에 바람과 습기가 많으니, 천식과 같은 악질의 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제주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와가(瓦家)는 희소한 민가 형식이다. 제주사 연구에서는 16세기 전반 이전에는 제주 관아의 건물 지붕도 초가지붕을 잇는 띠, 즉 제주말로는 ‘새’로 엮었다고 한다. 이 논의의 근거가 위의 ㈀ 부분이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의 일반 백성들은 온돌이 없다는 내용만 나올 뿐이다. 반면, ㈁ 부분은 제주에도 온돌문화가 수용되었고, 그 향유계흥도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김정이 제주의 상류계층과 교류하면서 이들이 사용하는 온돌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신앙

① 酷崇祠鬼. ㈀男巫甚多. 嚇人災禍. 取財如土. 名日朔望七七日初七十七二七. 必殺牲爲淫祠. 淫祠幾至三百餘所. 歲增月加. 妖訛屢騰. ㈃人疾病. 甚畏服藥. 謂爲鬼怒. 至死不悟. 

당신[祠鬼]을 매우 숭배하고, 남자 무당이 몹시 많다. 사람들에게 재앙과 허물로 꾸짖어 재물 취하기를 흙과 같이 한다. 명절[名日]이나 초하루와 보름 및 77일(초7일, 17일, 27일)에는 반드시 가축을 잡아 희생으로 바쳐 음사를 지내는데, 신당이 거의 300백 여 곳에 이르렀음에도,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요망스러운 거짓말이 자주 난무한다. 질병이 생겨도 약먹기를 매우 무서워하고 귀신이 노했다고 여겨 죽음에 이르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俗甚忌蛇. 奉以爲神. 見卽呪酒. 不敢驅殺. 吾則遠見必殺. 土人始而大駭. 久而慣見. 以爲彼異土人. 能如是耳. 終不悟蛇之當殺. ㈅惑甚可笑. 吾舊聞此地蛇甚繁. 天欲雨. 蛇頭騈出城 縫數四云者. 到此驗之. 虛語耳. 但蛇多於㈆陸土而已. 意亦土人崇奉之過耳. 

풍속에 뱀을 매우 꺼리며, 신이라 여겨 받든다. 보면 술을 바쳐 빌며 감히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다. 나 같은 경우는 먼 곳에서 보아도 반드시 죽인다. 토착인들이 처음에는 크게 놀라워했으나 오래 봐 익숙해지더니 “다른 지방의 사람이라 능히 이 같이 하는 것이리라”할 뿐 결국 뱀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미혹됨이 심하니 가소롭다. 내가 옛날에 듣건대, 이 땅에는 뱀이 심히 많아 비가 오려고 하면 뱀 머리가 성벽 사이에 서너마리 잇달아 나온다고 이르거늘, 이러한 때에 이르러 실제로 살펴보았더니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뱀이 육지부에 비해 많을 따름이니, 생각건대 토착민들이 높여 받들 탓에 많아졌을 뿐이다.

위의 ㈀ 부분은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도 올라가 있다. '남사록'은 김상헌이 1601년(선조 34)~1602년(선조 35) 간 제주와 서울을 오고가면서 쓴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이다._13) 김상헌은 '남사록'에 각종 제주 관련 자료도 인용해 제주의 역사·풍속·토산·문화유적 등에 대해 해설하는 한편, 자신이 제주를 방문했던 당시의 실정도 서술해 놓았다.

13) 홍기표, '남사록 역주(南槎錄 譯註)(上)・(下)', 제주문화원, 2008-2009.

'남사록'은 '제주풍토록'의 내용을 수십여 차례 인용했다. 이 가운데 남자 무당이 제주에 매우 많다는 사실도 들어가 있거니와, 그에 대해 화랑(花郞)의 유풍으로 보는 김상헌의 관점도 적어놓았다.

근래에도 제주 주민 가운데 매달 이레(7일)에 일뤠당에 찾아가 당신에게 굿, 혹은 비념 등의 기원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 부분은 제주 주민이 16세기 전반 이전부터 일뤠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제주 주민의 음사 숭상과 그 관련 기원 의례 및 행태가 나오고 있으나, 일뤠당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편, 1653년(효종 4) 간행의 '탐라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함께, 출처를 밝히면서 ①의 일뤠당 관련 사실을 포함해 일부 내용을 발췌·전재해 놓았다. 이로 볼 때 제주 사람이 매달 7일·17일·27일에 일뤠당을 다녔다는 사실이 문헌기록으로 처음 확인되는 것은 ㈁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 부분의 음사는 시대와 사용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_14)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줄곧 정치·사회지도이념으로 기능했다. 제의(祭儀)에 있어서도 비유교적 형태를 배격하였음과 동시에, 천자(天子)라야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라야 산천에 제사할 수 있다는 성리학의 제의 원칙을 국가적 방침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조선은 제후에 해당하는 제의에 따라 전국 산천신과 성황당신을 선별해 사전(祀典)에 올려 유교의례화 된 형태의 제사를 거행하는 대신, 산천에 대한 민간의 제사와 무당의 굿 등은 음사로 규정해 금지·배척했던 것이다.

14)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高麗時代 耽羅史 硏究)', 신서원, 2000, 190~196쪽.

조선시대의 제주는 수많은 사서에 음사를 숭상한다고 나와 있다. 위 ①·②의 경우도 이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이는 '남사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음사는 조선시대 내내 전국 각지에서 서민뿐만 아니라 왕실과 지배계층에 의해서도 널리 행해졌다. 특히, 해난사고가 잦은 연안과 도서지역은 내륙지방에 비하여 음사가 더욱 성행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때 무당의 존재와 음사 성행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제주는 여느 지역에 비해 해난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임으로 무당 활동과 음사 거행이 비교적 활발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제주만이 무당 활동과 음사가 극성을 떨었던 것처럼 기록·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 같은 부정적 평가도 통상 뒤따른다. 이는 '남사록'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곧, 김상헌은 “대개 야만인의 풍속이 다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음사를 숭상하니 이것은 단지 제주사람들의 불행뿐만 아니라 우리 道[유교]의 불행이다”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김정과 김상헌의 학문적 소양과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지도이념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이들이 전국 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신앙형태를 살펴보지 못한 채 제주 주민의 신앙 활동을 봤기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한편, '남사록'은 ㈄ 부분의 수록과 아울러, 뱀신을 예전과 같이 높이 받들지 않고, 뱀을 보면 잡아 죽이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제주의 사신숭배(蛇神崇拜)가 80여 년간 쇠퇴일로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부분도 '남사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남사록'에는 제주성내 주민이 약을 얻을 수 있다면, 복용한다는 사실도 나온다. 제주의 의료문화와 민정이 80여 년 간에 걸쳐 크게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음이 드러나고 있은 것이다.

㈆ 부분의 “육토(陸土)”란 표현은 “육지(陸地)”의 오기일 수도 있다. 제주 사람은 1577년 이전부터 한반도 지역을 “육지(陸地)”라 일컬었음이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에 나온다. 또한 김정도 '제주풍토록'에서 한반도 지역을 “육지(陸地)”로 표현했음이 본 글의 1)절 (3)항 ③의 (ㄱ), 2)절 (5)항 ③의 ㈃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 김정도 제주에 살면서 주민들이 한반도 지역을 육지라 일컫는다는 점을 알아채고, 종종 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익숙지 않아 한반도 지역을 일컫는 용어로서 “육토(陸土)”란 생소한 단어를 썼을 듯싶다. (계속)

# 김일우

제주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사단법인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겸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연구자로 나선 후, 줄곧 지방사회와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따른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 특히, 1995년부터 서울에서 다시 제주에 살기 시작한 뒤로는, 제주사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국가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한편, 국가사와 제주사의 유기적 통합을 모색하는 관점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전문적 역사연구자의 연구 성과물을 일반 대중과 공유화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도내 일간지에 1년간 실었던 연재물이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로 이어져 문화관광부 ‘2001년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또한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변화’, ‘한국사학보15’(고려사학회, 2003)로 비롯된 연구물은 ‘제주역사 기행 제주, 몽골을 만나다’로 이어졌다. 이는 일부 개정을 거쳐 일본판 ‘韓國·濟州島と遊牧騎馬文化モンゴルを抱く濟州’(明石書店, 2015)로 출간됐다. 연구 성과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2014년 ‘연구물의 나눔’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이사장을 맡은 뒤, ‘증보판 화산섬, 제주문화재 탐방’(제주특별자치도, 2016) 등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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