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미제로 남을 뻔 했던 20년 전의 제주 강간사건 피고인이 결국 법의 처벌을 받게 됐다. 현장에서 발견된 ‘다섯조각의 휴지뭉치’가 모두 증거로 인정되면서 다른 범행으로 이미 교도소에 복역 중인 피고인의 형량이 4년 추가됐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26일 오전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위반(주거침입강간등) 등 혐의로 기소된 한모(57)씨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또 검찰이 요구한 10년간 위치추적 장치 부착을 인용하고, 10년간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 시설 취업 제한과 40시간의 성폭력 예방 교육 이수 등을 명령했다. 

한씨는 2001년 3월5일 서귀포시내 한 가정집에 침입해 A씨를 강간해 달아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건 당시 경찰은 목격자와 CCTV 등을 확보하지 못해 피의자를 붙잡지 못했다. 현장에서는 범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휴지뭉치 5조각이 발견됐다. 

경찰은 휴지뭉치에서 나온 DNA를 토대로 용의자를 찾았지만, 일치하는 대상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을 뻔 했다. 

2010년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법(DNA)' 제정에 따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6년부터 미제사건에 대한 재분석을 시작했다.

그러던 2019년 3월 국과수는 제주 강간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휴지뭉치의 DNA가 교도소에 수감중인 한씨와 동일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씨의 경우 2004년 제주를 떠나 2009년까지 인천과 경기, 서울 등지에서 강간 등의 범행을 일삼아 징역 18년을 선고 받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국과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경찰은 한씨를 제주교도소로 이감했고, 검찰은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올해 3월2일 한씨를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한씨와 한씨 변호인은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휴지뭉치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증거물이며, 기간이 오래돼 DNA가 오염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휴지뭉치가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는 취지다.  

또 휴지뭉치가 증거로서 효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다른 범행으로 처벌을 받고 있는 한씨에게 추가적인 형사처벌은 과하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형법 제39조(판결을 받지 아니한 경합범, 수개의 판결과 경합범, 형의 집행과 경합범)에 따르면 경합범 중 판결을 받지 아니한 죄가 있을 때 그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 죄와 판결이 확정된 죄를 동시에 판결할 경우와 형평을 고려해 형을 선고해야 한다. 

이날 재판부는 한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씨에게 적용된 ‘강간’ 혐의 대신 ‘강간 미수’ 혐의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진술 등을 토대로 한씨의 범행이 미수에 그쳤다는 판단이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현장에서 발견된 휴지뭉치는 ‘유류물’로 판단돼 증거 압수 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불 수 없다. 또 통계학적으로 DNA 분석 결과에 오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한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한씨가 다른 사건으로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복역중인 점 등이 참작됐다. 

장 부장판사는 “20년 이상 지난 사건이 재판에 넘겨졌고, 그동안 관련법 개정으로 양형 등의 기준이 바뀌었다. 피고인이 징역 18년을 선고받았을 당시에 이번 사건도 같이 재판을 받았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제주 장기미제 강간사건의 실체가 일찍 드러난 상황에서 한씨가 법원에 넘겨졌다면 당시 재판부가 한씨에게 징역 18년이 아닌 징역 22년을 선고했을 것이라는 취지다. 

실형을 선고 이후 장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너무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너무 많은 범행으로 (제주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피고인의 범행으로 여러 사람의 삶이 망가졌다. 평생 참회하고 후회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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