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올레길 편지] 1. 푸른 뱀의 해, 다시 길에 나서다
이 글은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라는 타이틀로 제주올레 공식 블로그에 연재 중인 올레길 단상입니다. [제주의소리]가 ‘서명숙 올레길 편지’라는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면서 누구나 길과 하나가 되어 가슴에 맺힌 상처나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와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 편집자 주

제주올레 길을 다시 완주해야지! 올해 들어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다짐한 일이다. 그 결심을 한 건 지난해 제주올레걷기축제를 앞두고, 축제 현장인 14, 15, 16코스를 사전 답사하면서였다. 어떤 해안, 어떤 장소, 어느 마을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탐사대에 물어보니 최근 들어 경로가 바뀐 구간도 아닌데도! 속으로 뜨끔했다. 올레길을 처음 시작한 장본인이 정작 자신이 낸 길을 낯설어하다니! 물론 변명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18년 전 제주도로 귀향한 이래 쭈욱 6, 7코스 주변인 서귀포에서 산다. 그러니 북쪽 제주시권, 그중에서도 제주시 동부나 서부는 일주 버스를 이용하면 왕복 네 시간 즈음 혹은 그 이상이 소요되기 마련. 자가용이 없는, 아니 아예 운전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작심하지 않고서는 걷기 힘든 코스다. 그러나 이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경기도 안성에 살면서도 87번째 전 코스를 완주하고 있는 분도 있지 않은가!
이런 자각과 뼈아픈 반성 끝에 연초에 완주를 결심해 놓고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설 연휴가 끝난 1월 31일, 마침내 길을 나섰다. 1코스에서 21코스까지 순방향으로 걷는 대신 21코스 종달리에서 1코스 시흥리까지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사실 이즈음에 올레 완주를 시작하는 건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나 진배없다. 이 계절이면 늘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와 제주가 매우 춥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시기에 완주를 도모하는 건 이 시기에 공적, 사적으로 가장 비교적 일정이 없고 한가하기 때문이고, 완주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비 맞고, 바람 싸다기 맞고, 눈까지 _ 겨울 올레길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편지를 쓰기 전까지 중간에 하루씩 건너뛰면서 완주 또는 반주ㅡ절반 걷기ㅡ하면서 21, 20, 19, 18개 네 개 코스를 걸었다. 날마다 다른 날씨를, 다양한 사람들을, 추억의 공간을, 뜻밖에도 새로운 곳을 만난 무지개색 나날이었다. 귀향 이후 18년째 살고 있는 제주인데도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건 자연 속의 걷기가 주는 귀한 선물임을 다시금 깨달은 날들이기도 했다.
우선 가장 큰 시련이자 선물은 역시 변화무쌍한 기후였다. 단단히 각오는 했지만,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코스를 걸은 일주일 내내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역대급 한파가 계속되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마저도 걷는 날마다 날씨의 주된 테마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첫날은 제주답지 않게 온종일 잔뜩 흐린 수묵화 같은 날씨였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온종일 비가 퍼부어 판초 우의를 입었는데도, 나중 집에 돌아와 보니 속옷까지 다 젖어 있었다. 이날 함께 걸었던 길동무 20대 청년 봉사자 박조은은 물텀벙인 농로를 걷는 동안 몇 번이나 트레킹화에 고인 물을 쏟아내고 물에 불어 터진 양말을 쥐어짜야만 했다.
그러나 비보다 강적은 역시 바람이었다. 하필 풍력 단지가 들어선 행원, 김녕을 지나갈 무렵 바람은 본격적으로 우리의 뺨을 냅다 후려갈기더니 급기야 온몸을 강타하며 날려버릴 기세였다. 아, 바람이시여, 이 가여운 올레꾼을 어여삐 여기소서!
섬 하나 큰 바위 하나 없는 신흥리 망망대해 바닷가를 지나 조천 만세동산을 향할 무렵에는 축복인 듯 흰 눈이 펄펄 날렸다. 이전의 비바람에 견주면 행복감을 자아내는 자연의 변주곡이었다. 그러나 만세동산에 이르러, 추모 사당 앞에 가지런히 놓인 추모비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노라니, 아까의 행복감은 사라지고 비통함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1919년 3.1 만세 사건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이 지역을 무대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감옥에 투옥돼서 옥사하거나 석방된 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병사한 조천 인근 출신 독립 유공자들! 그들 중 두 사람은 사망 당시 나이가 27, 28살이었다. 눈 날리는 날 추모비 앞에서 해방 조국을 꿈꾸며 고통 속에 눈 감았을 영원한 제주 청년들!
종달리장님과 초등학교 어린이 올레길 답사반
날씨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귀한 선물은 역시 사람이었다. 겨울철이라서 봄가을에 비해 길 위의 올레꾼 숫자는 적었지만, 그래도 어느 코스에서든 걷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방향으로 걸으니 그 확률은 더 높을 수밖에.
길을 나서자마자 만남의 작은 기적은 시작되었다. 종달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21코스 출발점인 종달해안가로 가다가 마을의 상징인 폭낭 아래서 기념 샷을 찍고 있었다. 자가용이 멈춰 서더니 한 아주머니가 반가워하면서 리사무소에 와서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강권하신다. 마침, 화장실도 가야 하는 터라 줄레줄레 따라 들어가 이장님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척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하신다. 세상에나! 사연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18년 전인 2007년 9월 개장을 앞두고 그해 여름부터 시흥과 종달리를 마흔 번 넘게 드나들면서 답사하고 주민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다닐 때 지금 이장님이 당시에도 이장직을 맡고 있었단다.
이장님이 이야기하길 “정말 그때는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무슨 말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저 귀찮은 생각밖에 안 들었죠.” 솔직해서 반갑고, 지금은 인정하시는 것 같아 고마울 뿐이다. 그나마 내가 시사저널 편집장 출신이라는 걸 듣고 농협 재직 시절 정기구독했던 잡지였던지라 일말의 신뢰가 갔기에 마을 차원에서 협조는 다 했노라는 그분. 다시 긴 세월 뒤에 이장직으로 복귀한 강문봉 이장님께 이 마을을 지나갈 2026년 축제에 대한 마을의 협조를 부탁드린 뒤에,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리사무소를 나섰다. 창업 조력자 강 이장과의 만남을 신호탄으로 날마다 작은 기적 같은 만남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20코스 걸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먼저 인사하는 한 올레꾼을 만났다. 누군가 했더니 마스크를 벗으니 단박에 알아볼 만한 찐 올레꾼 남해붕씨. 올레 이민자 중 한 사람인 그는 거의 날마다 걷는 올레 걷기 생활 여행자. 걸어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그 큰 키에 걸을 때마다 클린올레 봉투를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큰 키에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기가 여느 사람보다 더 힘들 텐데 싶다.
21코스 안내소에 도착하니 이미 일군의 올레꾼들로 안내소가 가득해 활기가 넘쳐난다. 오늘 제주올레 아카데미 38기가 20코스를 역 올레 하기로 했단다. 동기들 간의 동행 걷기를 위해 서울에서 1박 2일로 내려온 동기도 있단다. 제주 공부면 공부, 걷기면 걷기, 봉사면 봉사! 졸업 기수마다 경쟁적으로 크고 작은 모임을 꾸려나가면서 올레 자원봉사자의 저수지, 보급망 역할을 해주니 참으로 든든한 동문회다.
19코스 걸으러 가는 날, 버스 안으로 초등학생 십여 명이 우르르 한꺼번에 올라탔다. 방학 시즌이고 토요일인데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더군다나 이리 춥고 바람 부는 날에! 온평리 안내방송이 나오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내릴 준비하라고 이르길래 순간 직감했다. 어린이 올레길 체험단이로구나! 맨 끝에 서서 내릴 차례 기다리는 여학생에게 물었더니 그렇단다. 어느 학교냐고 또 물었더니 세상에나 춘천에서 온 석사 초등학교 학생들이란다. 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창문을 열고 급히 사진을 찍었다.

그날 절경으로 올레꾼의 사랑을 받는 신촌 바닷가 닭모루 해안을 벗어나서 막 도로변으로 진입하려는데, 저쪽에서 그냥 도로로 곧장 가는 남성 올레꾼이 보였다. 얼른 손을 흔들어서 내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올레는 이쪽이라고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서 또 말해주자, 그는 알고 있지만 바다는 넘치도록 실컷 봤고 발가락도 부풀고 너무 아파서 그냥 해안 도로로 걷겠단다.
알고 보니 직장에서 15일 휴가를 받고 그새 다 걸으려고 너무 무리를 한 듯했다. 이 길은 그렇게 걸으시면 안 된다고 첨 보는 이에게 한소리를 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걷다 보니 조금씩 느림의 미학도 터득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다. 그나마 그의 마지막 말에 적잖이 안도했다.

화북포구 끄트머리를 지나갈 무렵, 한 무리의 올레꾼 남녀들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중, 한 여성이 나를 알아보고 발길을 멈췄다. 그러고는 앞선 일행, 뒤처진 일행을 다 불러 세우고는 날 인사시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세화고 동기 동창들이에요!" 지난해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올레길을 걸으며 함께 완주하기로 했단다. 그 제안을 했다는 한 남성이 말했다. “제가 중국 여행을 갔었는데 가이드가 제가 제주 출신이라니까 올레길 걸어봤냐고 묻더라고요. 아직,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완주를 두 번이나 했다면서 제주 살면서 어찌 올레길을 한 코스도 안 걸어봤냐고 놀라더라고요” 하더란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고 완주는 물론 고교 동창들을 부추겨 완주 모임까지 만들었단다. 날리는 눈을 맞으면서 멀어져 가는 그들이 새삼 부러웠다. 세화고는 남녀공학이라 저런 모임이 가능하구나 싶어서.
이렇게 이런저런 날씨를 겪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종달리 해변에서 시작된 발걸음은 제주항 근처 김만덕 기념관까지 이르렀다. 봄이 오기 전까지는 틈틈이 걸어서 시흥리까지 이를 생각이다. 그 길 위에서 혹시나 걷는 저를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시기를! 그리고 올레길 편지 잘 읽었노라고 말해주시기를!

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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