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쉰들러' 주인공 구체적 독립운동사실 확인
공덕비 논란사건 문 서장 취임 이전 발생 사건

▲ 독립운동가인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
제주4.3당시 모슬포에서 많은 인명을 살려내고, 성산포에서는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명령을 거부한 제주4.3의 쉰들러인 문형순(文亨淳) 전 모슬포경찰서장은 1930년대 만주를 일대로 독립운동을 펼친 '국민부(國民府)'의 중앙호위대장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문 서장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제3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졌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제주의 소리'가 8.15광복 60주년을 맞아 4.3당시 제주에서 많은 인명을 살려내는 데 공헌을 한 문형순(1897~?) 전 모슬포·성산포경찰서장의 행적을 확인한 결과, 그는 1930년대 18만~40만명에 이르는 남만(南滿) 일대 한인을 바탕으로 준자치를 실시한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이었음이 확인됐다. 

이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데이터베이스 자료에서도 입증됐다.

# 국가보훈처 관리번호 '70229'...만주 준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첫 확인 

▲ 국가보훈처는 그가 만주 노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국가보훈처가 광복60주년을 맞아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독립유공자를 예우하기 위해 8월말까지 벌이는 '독립운동가 유족찾기 캠페인'에서 문순형 전 서장은 평남 안주출신으로 문시영(文時映)이란 이명(異名)으로 만주노령 계열의 독립운동가임이 확인됐다. 국가보훈처가 그에게 부여한 독립운동가 관리번호는 '70229'였다.

이를 근거로 만주독립운동가 공적서와 독립운동 자료를 추적한 결과, 문 서장은 1929년 4월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와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가 통합한 준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이자 중앙호위대장이었다.

국민부는 한 때 약 18∼40만에 이르는 남만(南滿) 일대 재만한인을 바탕으로 준자치(準自治)를 실시하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혁명군의 지원을 통해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단체였다.

▲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조직표 ⓒ 출처 연구논문 국민부 연구 장세윤.
국민부(國民府)는 스스로 '정부'임을 자임하였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에 의한 근대민주주의 이념을 상당부분 구현한 독립운동단체로 1930년대 전반기 상해(上海) 임시정부가 다분히 명분론상의 정부였다면 국민부는 실질적으로 기능하였고, 또 어느 정도의 역할분담에 의한 준자치정부로 재평가 되고 있다.

국민부는 이어 제1회 중앙의회에서 혁명운동, 즉 독립운동과 자치를 분리하여, 독립운동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으로 하여금 계속하게 함에 따라 문형순 중앙호위대장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으로 이속(移屬)된다.

# 조선혁명당 중앙위원으로 독립투쟁...유족없어 독립유공자 대열에 오르지 못해 

이후 문형순 서장은 1929년 12월 20일 요녕성 신빈현(新賓縣)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23명의 중앙위원에 이탁, 이웅, 고활신 등과 함께 선출된다.

▲ 문형순이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했던 국민부 무장부대인 조선혁명군 깃발.
장세윤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1988년 자신의 연구논문 '국민부(國民府) 연구(硏究) - 성립 및 헌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에서 "조선혁명당이 이끈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투쟁역량은 결정적으로 일제에 타격을 줄만큼 성장하지 못했으나, 적지 않은 일본군과 만주국군, 관헌을 살상하고 일제의 만주국 통치를 교란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강대한 일본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을 부분적으로나마 중국동북지역에 묶어둠으로써 일제의 중국 관내 침략을 일정하게 견제·완화하는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일제의 자원수탈이나 경제침략을 상당기간 저지하였던 것도 사실이다"라면서 "이 시기 만주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중국근현대사의 한 범주로 포함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평했다.

결국 4.3 당시 초대 모슬포경찰서장을 지내며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과 함께 소위 '자수사건'으로 1백여명을 살리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인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명령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명령을 단호히 거부한 문 서장의 기개에는 만주에서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정신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문 서장 등을 독립유공자 유족을 찾아 정부 포상을 하려 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유족이 없어 독립유공자 대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대정읍 하모리에서 일부 주민이 문 서장 공덕비를 세운 것과 관련해 현지에서 일고 있는 문 서장 행적 논란이 구체적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공덕비를 세운 측과 이에 문제제기하며 철거를 주장하는 측 사이에 다소 감정이 섞인 채 진행되고 있어 보다 명확한 사실 파악이 우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대정읍 현지 문형식 공덕비 논란 관련 사건 문 서장 이전의 일
 

▲ 대정읍 하모리 짐개동산에 4.3사건 위령비와 조남수목사 김남원민보단장 공덕비 옆에 최근에 세워져 논란이 일고 있는 문형순 서장 공덕비(우측) ⓒ 제주의 소리
하모리 '문형순 공덕비' 철거 비상대책위와 제주4.3유족회 대정지회에서 문 서장과의 관련성 의혹을 제기하는 대정지역 학살사건은 ▲영락리 '양은하 피살' ▲동일2리 '세미피살' ▲서림피살 ▲상모리 이교동 '48인 피살 및 대살' ▲대정고 옆 '특공대 피살사건' 등 4.3당시 대정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일체를 문 서장과 관련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건 모두 문 서장이 모슬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으로 그와 직접 관련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모슬포경찰서가 만들어진 것은 1949년 1월 18일로 문 서장은 이때부터 11월까지 초대 서장을 지내다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은하 피살사건은 4.3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48년 3월 14일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당한 사건으로 문 서장이 모슬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이전의 사건인 것이다.

또 '동일2리 새미 피살'사건은 이경방(하모리), 양군일(신평리), 김우필(영락리) 등 대정지역 공무원과 유지들이 1948년 10월말경 모슬포 군부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48년 11월 6일 동일2리 천미동(泉味洞·새미)으로 끌려가 총살당한 사건으로 이 역시 문서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객관적인 견해이다(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제4권 110~112쪽). 학살 주체가 군인인데다 학살 시기도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이 부임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일과2리 서림 피살'은 당시 모슬포 주둔군의 중요한 급수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으로, 1948년 7월 2일 수원지를 지키던 경비대원이 탈영을 하고, 10월경엔 도로파괴 등의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화가난 토벌대(군)가 1948년 10월 26일, 11월 4일, 12월 9일에 주민들을 총살한 사건을 말한다. 또 12월 9일에는 일과2리 이장 문병옥이 총살되기도 했다. (4.3은 말한다 제4권 109~112쪽)

# 사건 발생 이후에야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취임...학살주체도 경찰이 아닌 군

'상모리 이교동 48인 피살 및 대살'은 1948년 12월 13일 상모리 이교동 향사 앞에서 주민 48명이 총살당한 사건으로 학살 주체는 경찰이 아니라 군인들이었다. 이 때는 1948년 11월 17일 선포된 계엄령을 바탕으로 군대가 주도권을 쥐고 초토화작전을 벌이고 있던 시절로 경찰이 개입할 상황이 아님은 물론 이 역시 모슬포 경찰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이었다. (4.3은 말한다 제5권 318~328쪽)

▲ 예비검속 총살명령을 거부한 문 서장의 서류를 공개한 이도영 박사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1999년 제민일보.
'특공대 피살사건'은 주민들이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특공대(대장 이원하)를 조직하고 무장을 하기 위해 군에 무기를 달라고 요청하자 군이 1949년 1월 10일 특공대원 10여명을 모슬봉 기슭으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으로 이 역시 학살 주체가 군대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슬포 출신으로 4.3연구가인 이도영 박사(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방문 연구교수)도 "대정고 옆 탄약고에서의 '모슬포 특공대 학살 사건'은 육군 허욱 대위가 이끄는 부대에서 자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성급한 공덕비 건립과는 별개로 충분한 근거에 의해 공과 따져야

대정지역 주민들이 4.3의 아픔을 아직도 씻지 못한 상황에서 4.3당시 모슬포서장을 지낸 문형순 서장 공덕비가 4.3유족은 물론 주민들과 사전 협의 또는 충분한 공감대 없이 일부 주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세워져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 서장의 공과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4.3때 제주도민 학살을 주도했던 제9연대장 송요찬, 제2연대장 함병선, 제주경찰청장 홍순봉이 일제 때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일제경찰이었던 데 반해, 제주도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문형순 서장이 독립군 출신이라는 점은 광복60주년을 맞는 현재의 우리에게 역사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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