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4.3쉰들러' 문 서장 묘 확인
1966년 쓸쓸히 사망, 한라산 중산간 안장
누가 보면 과연 이 묘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한민족의 기개를 떨쳤던 국민부(國民府) 문형순(文亨淳·이명 文時映) 중앙호위대장의 묘일까 의심할 정도로 혈혈단신인 그는 한라산 중턱에서 잡초만 무성한 채 쓸쓸히 광복 60주년을 보내고 있었다.
제주4.3당시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내며 수백명의 양민을 구해 낸 '4.3의 쉰들러' 이자 독립운동가인 문형순의 묘가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조선혁명군 집행위원 묘 외부에 첫 모습 드러내
'제주의 소리'는 광복 60주년인 8월 15일, 지난 40년간 문형순의 묘를 관리해 왔다는 전정택(79·全晶澤) 제주지구평안도민회장과 함께 제주시 아라동 평안도민회 공동묘지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문 서장이 1930년대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는 사실이 14일 처음으로 확인된데 이어 그동안 '어디 어디에 묻혀 있다고 하더라'며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의 묘가 이날 처음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인 그의 빛나는 이력은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란 비문만이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몰랐던 그의 사망은 묘비를 통해 1966년 6월 20일 타계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 서장의 유족을 찾고 있는 국가보훈처도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인 문 서장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 1966년 사망 첫 확인,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비문만 독립운동가 대변
이날 문 서장의 묘를 안내 해 준 전 회장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문 서장의 이력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성과였다.
전 회장은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이란 그의 직책이 말해주 듯 평북 용천 출신으로, 1948년 북한에서 내려와 서울을 거쳐 그해 12월 26일 경찰의 일원으로 제주에 첫 받을 내딛은 인물이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4.3 광풍이 불던 당시 문 서장과 마찬가지로 제주에서 경찰을 지내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던 그해 봄 경찰 옷을 벗은 전직 경찰 출신이었다. 그는 '제주도참전경찰유공회장'이란 또 하나의 직책을 갖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뒷부분에 기술하기로 하자)
전 회장을 만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게 문 서장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였다.
# 경찰 떠난 후 쌀배급소 일하다 쓸쓸히 세상 등져
전 회장의 기억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제주의 소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 서장은 1950년말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후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의 권유로 함께 경남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함안경찰서장을 1년 동안 지낸다. 그리고 함안경찰서장을 그만 둔 후 다시 제주에 내려와 경찰 쌀배급소에서 일하게 된다.
어쨌거나 전 회장이 경찰을 그만 둔 후 육지로 올라갔다가 다시 1966년에 제주에 내려왔으나 그 때 문 서장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때였다.
"저가 제주도에 다시 내려온 후 문 서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히 쓸쓸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 당시 문 서장의 장례를 해줬던 분들 중에는 여경 경사였던 이춘홍씨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독립운동을 했고 경찰서장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중앙에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줘 평안도민회가 금일봉을 보태 당시 건입동 공동묘지였던 황세왓에 묻었다고 그래요. 저도 제주에 다시 내려와서 도민회 총무를 맡은 후에야 문 서장의 묘를 봤습니다"
# 독립군 출신으로 일제 앞잡이었던 경찰·군간부도 함부로 못 대해
그는 문 서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정의감이 많고, 의리가 있었던 상관으로 기억납니다. 같은 경찰서에 근무를 하지 않았지만 제가 함덕지서에 근무할 때 지나가다가 차를 잠깐 세워 '근무를 잘하고 있느냐'로 물어볼 정도로 정도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이 욕을 잘해 '문 도깨비'란 별명을 달고 다녔습니다.
문 서장은 당시 경찰은 물론, 군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었죠. 다 알다시피 그 당시 경찰이나 군 간부라는 게 대부분 일제치하에서 일경을 하거나 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잖습니까. 때문에 독립군 출신인 문 서장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들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성산포경찰서장 당시 예비검속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도 그 같은 독립군의 기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독립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감히 계엄치하 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서청과 문 서장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 서장이 변명할 수 없는 고인이고 이북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제주도민들에게 '서청'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생각할 때 독립운동가인 문 서장에게 '서청'을 말하는 것은 너무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북에서 내려왔다고 모두를 서청이라고 몰아버린다면 참 답답합니다. 저 역시 이북 출신이고 4.3 발발 직후 경찰자격으로 내려왔습니다만 서청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 "그에게 서청을 말하는 것은 독립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
그는 서청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상기된 듯 한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문 서장이 어떻게 제주에 내려왔는지 내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김구 선생 같은 분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고요. 문 서장도 아마 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바로 내려왔을 거예요.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다가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받을 디딘 후 제주에 내려왔다고 볼 수 있죠. 분명한 것은 그와 서청을 연관시키는 것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아닙니다."
전 회장은 1966년 제주로 내려온 후 지금까지 문 서장의 묘를 관리하고 있다. 추석절을 앞둬 성묘때가 되면 으례 문 서장의 묘를 찾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문 서장이 같은 고향이자 독립군출신이잖습니까. 그런데 자손이 없어 아무도 그의 묘를 돌 볼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뿐입니다. 만약 이 분이 후손이 있어 독립유공자가 됐다면 지금처럼 이런 대접을 받겠습니까. 적어도 국립묘지나 충혼묘지로 옮겼겠죠. 독립운동을 한 게 분명한 사실인데도 후손이 없어 독립유공자 신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한 벌초는 계속 할 것입니다"
# 전 회장도 독립운동가 집안
"말하기 쑥스럽지만 저가 어렸을 때 저희 5촌 당숙이 저희 집에 들르실 때면 항상 일본 경찰이 쫓아왔어요. 독립운동을 했던 거죠. 지난해 처음으로 독립기념관을 찾았더니 '제5 전시실'에 저희 당숙의 사진이 걸려 있더군요."
전 회장이 말하는 5촌 당숙은 전덕원(全德元,1871~1940) 선생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에서 최익현(崔益鉉) 등과 함께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의병을 모아 관서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06년 체포돼 15년 형을 받고 황주(黃州)로 유배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그 후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 군사부장으로 무장항일 활동을 했으며, 대한통군부 재무부장과 동의부 경무감 및 참모부감을 지녔으며 의군수 군무총감으로 일본경찰서를 습격한 인물이다.
또 국내에 있는 일본 고관 암살을 계획하던 중 일경에 체포돼 12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독립사를 편찬하며 항일운동을 재개하다 다시 체포돼 옥중에서 사망한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그의 형 용택(작고)씨는 해방 후 북에서 조만식 선생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등 전 회장 집안 역시 문 서장 못지않은 독립운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기자의 차에서 내리기 직전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4.3당시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북에서 박해를 받고 동생과 함께 내려왔는데 제주에 와서 보니 도민들도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북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