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오등동 제주평안도 공동묘지에 자리한 독립운동가이자 '4.3의 쉰들러'인 문형순 서장의 묘.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3.1절 특집] 4.3-6.25때 집단학살 막은 문형순 서장...독립유공자 번번이 불허

제주시 오등동 한 사찰을 지나 서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약 300m를 걷다 보니 제주평안도 공동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서쪽 울타리에 크게 솟은 수백년생 소나무 밑에 그가 잠들어 있다. 만주 벌판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 문형순(文亨淳.1897~1966) 전 모슬포경찰서장의 묘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묘비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반세기 비바람을 이겨내느라 묘비 곳곳에 상처가 역력했다. 비석의 음각 비문은 색이 바라 글자를 한눈에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비석 정면에는 故 南平文公亨淳之墓(남평문공형순지묘)라고 적혀 있었다. 옆에는 '西紀 1897年 1月4日 平南 安州(평남 안주) 出生. 1966年 6月20日 死'라는 글씨가 그의 일생을 말해줬다.

문 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했다. 가명은 문시영(文時映). 국민부는 남만주 지역 일대 한인을 바탕으로 준 자치를 실시한 곳이다.

그곳에서 문 선생은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맡아 조선혁명군의 지원을 통해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9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중앙위원 23명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 제주시 오등동 제주평안도 공동묘지에 자리한 문형순 서장의 묘. 반세기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비석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장세윤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이 1988년 작성한 연구논문 <국민부 연구-성립 및 헌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에는 ‘국민부가 일본군을 살상하고 일제의 만주국 통치를 교란하는데 성공했다’고 명시돼 있다.

‘일본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을 부분적으로나마 중국 동북지역에 묶어두면서 일제의 중국 관내 침략을 일정하게 견제, 완화하는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장 연구위원은 ‘이 시기 만주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중국근현대사의 한 범주로 포함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평가했다.

문 선생은 이후 제주와 인연을 쌓았다. 광복 후 월남한 그는 서울을 거쳐 제주에 내려왔다. 1947년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지내고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을 지냈다.

당시 군과 서청단원이 ‘산에 올라간 사람에게 식량 등을 갖다 준 사람은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유도해 총살하려 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주민 100여명의 소중한 목숨을 구했다.

6.25 전쟁 때는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이 시작됐지만 그는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대량학살을 막았다.

이후 경남도경 함안경찰서장을 지내고 다시 제주로 내려와 쌀 배급소를 운영하며 가난과 싸우다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후손없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

▲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조직표 ⓒ 출처 연구논문 장세윤의 <국민부 연구>.
'한국판 쉰들러'인 그는 그 이전에 독립운동가 였다. 국가보훈처가 2005년 6월 공개한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에도 문 선생의 이름이 올라 있다. 관리번호는 70229번. 일련번호는 18262번이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사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참여자 중 유족이 없는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 2만1013명의 이름을 공개하며 문 선생이 독립운동가임을 확인시켜줬다.

문제는 역사의 평가다. 故 전정택 전 제주평안도민회장은 2006년 8월30일 문 선생의 역사적 자료를 모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지만 입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전 전 회장이 별세하자, 4년 뒤인 2010년 4월20일에는 당시 제주보훈청장 직권으로 국가보훈처에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이후 이대수 전 제주보훈청장까지 나서 자료를 추가해 2011년 3월5일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역시 입증자료 부족과 사후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주도보훈청 관계자는 “3차례나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2012년 8월 최종적으로 불가 통보를 받았다”며 “기존자료로는 입증이 어렵다. 후손들마저 없어 추가 자료확보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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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 예비검속이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체포하는 것으로 당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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